구글어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그분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았다. 실로 대단히 넓고, 대단히 하얗다.


위에 보이는 대륙이 남아메리카대륙의 맨 아래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남부이고,
맨 아래 노랗게 표시한 곳이 인듀어런스호가 잠든(?) 곳. 그 바로 위쪽이 22명의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던 엘리펀트 섬,
바로 위가 섀클턴 선장이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끝까지 찾아갔던 사우스조지아섬이다.

아...... 이 감동을 이 전율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마음이 아프다.ㅠㅠ


후기:
라디오북클럽에서 엄홍길대장님이 소개했던 책이었다.
이루말할수없이 감동적인,
피가 끓고 눈물이 나는 책이다.
너무추워서 상상조차할수없는 곳에서
그야말로 처절한 사투를 버렸던 캡틴 섀클턴과 27명의 대원들.
실화여서 더 감동했다. 고작 '감동'이라는 두글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Posted by Hyos :

머큐리

2010. 5. 19. 14:07 from 서재/접어둔 페이지



  창문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딱 한 두 권이 부족했다. 그녀는 장롱 서랍 속에 넣어 둔 『파르마의 수도원』과 『카르밀라』를 떠올렸다. 그렇게 해서 책의 탑은 필요한 높이에 도달했다.
  <자, 이제 만약 이 탑이 무너진다면 그건 문학에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야.>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 아멜리 노통브, 『머큐리』, 열린책들, p.136
Posted by Hyos :


  나는 하루에 열두 시간도 넘게 잠을 잤다. 마치 지난 십 년간 한 숨도 못 잔 것처럼,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잠으로 하루를 보내다시피 했다. 잠을 자지 않는 시간엔 거실 소파에 기대 텔레비전을 보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기찻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조각난 단상들 이어서 서로간에 아무런 연계가 없었다. 나에게 닥친 문제나 미래의 계획에 대해 잠깐씩 생각해본 적도 있지만 잠을 자고 나면 머리는 물에 헹궈낸 듯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 천명관, 『고령화 가족』, 문학동네 p.24

세상에.. 내가 이렇다. 공감백배.
Posted by Hyos :

열두달의 요정

2009. 12. 16. 09:59 from 서재/기록

흐엉엉.ㅠ 다시보고싶은 옛날만화 1위.ㅠㅠㅋ



굴러라 굴러라 반지야

봄의 문을 지나서 여름의 창가로

가을의 문을 열고서 겨울날 융단위를

새해의 따뜻한 모닥불을 향하여..



관련링크

http://blog.naver.com/intara7?Redirect=Log&logNo=40003084020   
http://blog.naver.com/k2zeby?Redirect=Log&logNo=10030974422&vid=0 




+ 어제 오랜만에 접속했는데, 이 페이지 때문에 접속량이 많았다. 나처럼 그리워하는 분들이 있었다.ㅋ

그러다가 잠안오고 검색

누가 유튜브에 영어버전 있다길래..

찾았다.. o_O



++ 더 오랫만에 접속했는데 기존 영상이 삭제되어 다시~ 찾음. 후후

https://youtu.be/Tps6bdcRhYU




그때 그 목소리는 아니지만.. (심지어 영어도 아니지만)

그리운 그 움직임, 음악들은 그대로다. 히잉.ㅠㅠㅠㅠㅠ

내가 꾹 참으면 볼수 있을날이 올줄알았어.

이 귀여운 디지털시대



이걸 찾아낸 검색어는 '열두달의 요정' '숲은 살아있다(일본어 버전포함)' 'twelves months' '사계절'도 아닌

'moriwa ikiteru'





아래글은,

한 까페에 있던 글인데, 혹시 지우실까봐 옮겨왔는데...

진짜 지우셨다.. 복붙한 나야 잘해쩡




땔감을 모으는 고아 소녀


내일은 설날입니다.

소녀는 오늘도 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눈보라 속을 헤치고 땔감을 모으러 숲 속까지 갔습니다.

'탁, 탁' 추위로 인해 나무 껍질이 터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고요한 숲 속의 작은 공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그 곳에서 산토끼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아이, 추워. 너무 추워서 숨이 막힐 것 같다. 다람쥐야, 함께 놀자. 달리고 있어도 발바닥이 시려서 얼어 붙을 것 같다. 술래잡기를 하자. 햇님을 부르자. 봄을 부르자."

 

토끼는 손뼉을 치면서 나무 위의 다람쥐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토끼야."

 

나무 그늘에 숨어 몰래 다람쥐와 토끼의 술래잡기를 보고 있던 소녀는 너무도 재미가 있어 자기가 모르게 웃고 말았습니다. 다람쥐와 토끼는 소녀의 웃음 소리에 깜짝 놀라 황급히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 때 큰 도끼를 허리에 찬 군인이 썰매를 끌고 다가 왔습니다.

 

"안녕, 예쁜 아가씨! 뭘 그렇게 웃고 있나?"

 

소녀는 손을 저으면서 더욱 웃었습니다.

 

"술래잡기를 하고 있던 다람쥐가 나무 위로 도망치면서 토끼를 놀렸거든요. '토끼야, 꼬리를 치며 깡총 나무 가지로 올라 와. 깡총 뛰어서 말이야'라고 하잖아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정말로 그렇게 말했어요."

 

"오늘이 지나면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거야. 이런 날에는 여러 가지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고 하지 않던가? 토끼와 다람쥐가 술래잡기를 한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거야. 섣달 그믐날에는 그 뿐만 아니고 더욱 이상한 일도 있단다."

 

"어떤 일인데요?"

 

"섣달 그믐날 밤에는 1월부터 12월까지의 모든 달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거야. 겨울도 여름도 봄도 가을도 다 모이는 거지. 그런데 너는 이렇게도 추운데, 어째서 여기까지 왔나?"

 

"제가 좋아서 온 것은 아닙니다. 아주머니가 시켜서 왔습니다."

 

"그럼, 너는 고아로구나, 그래서 너의 옷은 그렇게도 허름하구나. 바람이 많이 들어오겠구나. 내가 너의 일을 도와줄게. 그런 다음에 내 일을 하겠다."

 

군인 아저씨는 나뭇가지를 모아 소녀의 작은 썰매에 실었습니다.

 

"아저씨의 일은 무엇이지요?"

 

"전나무를 자르는 거야. 이 숲 속에서 가장 날씬한 것을 말이야."

 

"그렇게 좋은 전나무를 누구를 위해서 자르는 것인가요?"

 

"여왕님을 위해서야. 내일 궁성에 많은 손님들이 오시거든. 그래서 구슬과 방울과 인형들로 전나무를 꾸민단 말이야."

 

"여왕님은 아직도 인형을 가지고 놀아요?"

 

"여왕님은 너보다 그다지 나이가 많지가 않단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돌라 가시고 난 뒤에는 그 분이 이 나라의 주인이 되셨으니까?"

 

"그럼, 여왕님도 고아시군요. 가엾게도."

 

"가엾고 말고. 아무도 그 분에게 슬기와 분별을 가르쳐 드릴 수가 없단다. 자아, 이 정도면 1주일분의 땔감은 충분하겠지? 다음에는 내 일을 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여왕님께 꾸지람을 받게 되거든."

 

"아저씨가 저를 도왔으니까 조도 아저씨에게 훌륭한 전나무를 보여 드리겠어요."

 

두 사람은 숲을 헤쳐 갔습니다.

 

 

 

여왕 폐하는 스노우드롭을 좋아하셔


그 무렵, 궁성에서는 14살이 되는 여왕님이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수염을 기른 지체가 높은 박사였습니다.

 

"이제 더 할 수가 없어요. 손가락이 잉크 투성이에요."

 

"여왕 폐하, 이것은 유쾌하지 못한 일입니다만, 폐하께서 4줄만 써 주시기 바랍니다."

 

"좋아요. 뭐라고 쓰지요?"

 

"풀들은 푸르고 태양은 빛나도다. 제비는 봄날과 함께 우리 처마 끝에 날아 온다."

 

"풀들은 푸르고만 쓰겠어요. 풀들은 푸르고......."

 

여왕님은 완전히 공부에 싫증을 내고 있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새해에 알맞는 이야기를 해 주세요. 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니까 말에요."

 

"알겠습니다. 폐하. 1년은 12개의 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게 정말이에요? 선생님은 그걸 모두 알고 있습니까?"

 

"달 이름은 양와리(1월) 페브라리(2월) 마르트(3월) 아프젤리(4월) 마이(5월) 유니(6월) 유리(7월) 아우그스트(8월) 선처브리(9월) 옥처브리(10월) 노야브리(11월) 데카브리(12월)입니다."

 

"참으로 많군요. 선생님은 기억력이 좋으세요."

 

"황공합니다, 폐하. 그리고 달은 우리들에게 차례로 선물과 위로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12월, 1월, 2월은 스케이트 놀이, 새해의 전나무 잔치, 사육제의 연극놀이, 3월에는 눈이 녹기 시작해서, 4월에는 눈 밑에서 스노우드롭이 얼굴을 내밉니다."

 

"나는 4월이 되면 좋겠어요. 스노우드롭이 참 좋아요! 스노우드롭을 진자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마는."

 

"4월은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폐하. 기껏해야 20일 정도입니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20일이라고요? 나는 3일도 더 기다릴 수가 없어요. 나는 자연에 새로운 법칙을 만들 것입니다."

 

여왕은 방울을 흔들었습니다.

 

"거기 누구든지 대신을 불러 오너라."

 

그리고는 선생님에게 말했습니다.

 

"숲에는 스노우드롭이 꽃이 피어 있다. 광주리 가득히 스노우드롭의 꽃을 궁성으로 가지고 오는 사람은 내가 상금으로 광주리 가득히 황금과 하얀 여우 털가죽이 붙은 빌로드의 옷을 줄 것이며, 새해의 드라이브를 함께 할 것이다."

 

여왕님은 선생님이 쓴 종이에 서명을 했습니다.

 

 

 

이상한 두 노인


소녀와 군인 아저씨가 숲 속으로 사라진 뒤에, 아무도 없는 숲 속의 자그마한 공터에 키가 큰 12월과 1월의 노인이 나타났습니다.

 

"형제여, 마침내 그대의 차례야. 잘 해내야 할 것이야."

 

12월의 노인이 말했습니다. 12월의 노인은 옷소매를 두드리면서 수풀 속의 짐승들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숲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짐승들이 나왔습니다.

 

"좋아, 점호는 끝났다. 각자의 일을 하도록 하라."

 

짐승들은 곧 사라졌습니다. 두 노인은 그 때 소녀와 군인의 썰매를 보았습니다.

 

"아직도 누군가가 숲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구나."

 

12월의 노인이 말했습니다.

 

"바람과 눈보라를 일으키면 집으로 돌아 가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닫게 되겠지."

 

12월의 노인은 지팡이를 높이 올려 소리 높이 외쳤습니다.

 

"충실한 나의 부하들 눈보라들이여, 모든 길에서 불러라.

말을 탄 자도 걸어 가는 자도 숲을 지키는 파수꿑도 숲의 요정도

숲 속으로 다닐 수 없도록."

 

잠시 후 눈보라가 세차게 불어 왔습니다.

 

"참으로 심한 눈보라가 몰아치는구나."

 

눈 속에서 군인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녀와 군인 아저씨가 커다란 전나무를 안고 비틀거리면서 나갔습니다. 그 때 나무 그늘에서 12월과 1월의 노인이 나타났습니다.

 

"가 버렸더. 벌써 저 언덕을 내려 가고 있어."

 

"저것이 그대의 마지막 손님일 거야. 금년에는 더 이상 우리들의 숲에 인간은 오지 않을테니까 말이야. 이제 제야의 모닥불을 밝힐까?"

 

무성한 숲 속에서 몇 개의 불빛이 보였습니다.

 

"이제 거의 모인 것 같아. 우리들의 1년이 모두 모였어."

 

1월의 노인이 말했습니다. 12월의 노인은 지팡이를 높이 쳐들어 숲의 문을 굳게 잠갔습니다.

 

"하얀 눈보라여, 심한 눈보라여,

눈을 긁어 올려 사방으로 뿌려라.

솜털처럼 땅에 내려라.

시트처럼 땅을 덮어라.

숲 앞에서 벽이 되라.

여기 열쇠, 여기 자물쇠,

아무도 다니지 못하게."

 

 

 

 

스노우드롭을 꺾어라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소녀의 집에서는 여왕님의 포고를 들은 아주머니의 딸이 발갛게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서 광주리를 고르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밀가루를 이겨서 파이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너를 밖에 내 보내지 않을 것이다. 숲 속에서 얼어 죽는다."

 

"그럼 어머니가 숲으로 가서 스노우드롭을 캐어 줘요."

 

황금과 하얀 여우의 털옷을 가지고 싶은 딸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아주머니는 방금 구운 파이를 딸에게 먹였습니다.

 

"파이 따윈 필요 없어요! 어머니는 가고 싶지 않고, 나는 나가지 못하게 하니 그렇다면 그 아이를 내 보내세요. 이제 곧 숲에서 돌아 올테니까."

 

"참 그렇군, 그 아이를 보내도록 하자. 그 아이가 꽃을 캐어 오면 너와 엄마가 궁성으로 가지고 가자. 그 아이가 만약 얼우 죽는다면 그것은 그 아이의 운수야. 어차피 고아니까 말이야."

 

그 때, 온몸이 눈투성이가 되어 소녀가 돌아 왔습니다. 소녀는 눈을 털고 벽난로 곁으로 다가 갔습니다.

 

"어때? 밖은 눈보란가?"

 

"아주 심해요. 땅도 하늘도 보이지 않아요.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에요. 겨우 집까지 돌아왔어요."

 

"이제 몸이 녹았지? 네가 다시 갔다 와야 할 곳이 있어."

 

곁에서 딸이 말했습니다.

 

"어디로?"

 

"숲 속으로. 스노우드롭을 캐러 가야 해. 자아, 빨리."

 

소녀는 웃었습니다.

 

"농담이 아니야. 너는 포고문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딸은 소녀에게 여왕님의 포고문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가지 않겠어요. 저를 불쌍히 생각하지 않는군요. 저는 숲에서 돌아 오지 못하게 될 거여요."

 

"그럼 내가 너 대신 숲으로 가라는 말이야."

 

크게 화를 낸 딸은 외투를 입고 밖으로 뛰어 나가려고 했습니다.

 

"어디로 간다는 것이냐?"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 딸을 만류했습니다.

 

"빨리 갔다 와. 스노우드롭을 캐어 오지 않으면 집에 들여 놓지 않을테니까."

 

소녀는 광주리를 들고 나갔습니다.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나무에서 눈덩이가 떨어졌습니다.

 

"누구지?"

 

소녀는 몸을 떨면서 둘레를 돌아 보았습니다. 숲의 깊은 눈 속을 꽁꽁 얼어버린 몸으로 가까스로 걸어 갔습니다.

 

"어쩜 이렇게도 어두울까? 내 손도 보이지 않으니. .....아아 무서워. 누구든지 도와줘요."

 

바삭 바삭 소리가 났습니다.

 

"무서워, 늑대일지도 모르겠구나."

 

소녀는 곁에 있는 굵은 나무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숲을 헤치고 늑대가 얼굴을 내 밀었습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둘레를 둘러 보았습니다.

 

"우우 우우 우우, 사람 냄새가 난다. 내 저녁밥 냄새가 난다."

 

"까옥 까옥, 조심해요, 늑대군. 너를 위한 먹이가 아니야. 덫이야. 덫."

 

나무 위에서 까마귀가 늑대를 얼려서 쫓았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까옥 까옥 예븐 아가씨. 눈을 떠요. 이런 차가운 밤에 졸고 있다가는 얼어 죽어요."

 

"졸면 안돼! 얼어 죽는다!"

 

다람쥐는 솔방울을 떨어뜨렸습니다. 소녀는 눈을 비비면서 주위를 둘러 보았습니다.

 

"누구지? 무슨 말을 한 것은? 그렇지, 나는 꿈을 꾸고 있었지. 어머니가 램프를 들고 집 안을 걸어 가고 있었다. 등불이 눈부셨어. 그런데 저기 진짜로 무엇이 반작이고 있잖아. 빨리 가보자."

 

소녀는 나무에서 뛰어 내려 번쩍이고 있는 것 쪽으로 걸어 갔습니다.

 

"어딘가 따스한 연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내 혼자만의 기분일까?"

 

 

 

한 곳에 모인 12월의 노인들


문득 소녀의 눈 앞에 작은 공터가 열렸습니다. 한가운데는 모닥불이 높이 타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둘레에는 1월에서 12월까지의 달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소녀는 용기를 내어 나무 그늘에서 천천히 나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불을 좀 쬐게 해 주세요."

 

4월의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가까이 와요. 어여쁜 아가씨. 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소녀는 모닥불에 다가 가서 손을 쬐었습니다.

 

"아가씨, 거기 들고 있는 것은 뭐지? 광주리같은데."

 

1월의 노인이 물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스노우드롭을 캐어 오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크게 웃었습니다.

 

"저도 우습게 생가해요. 그러나, 스노우드롭을 캐지 않고는 돌아 오지 말라고 아주머니가 말했어요. 나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소녀는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몸이 따스하게 녹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방해가 되어 죄송합니다."

 

"잠깐 기다려요, 아가씨. 너무 서둘지 말아요."

 

4월의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1월의 노인에게 인사를 하고는,

 

"저에게 1시간만 자리를 양보해 주십시오."

 

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양보를 해 주고 싶은데 모두의 의견은 어떤가?"

 

3월의 젊은이도 2월의 할아버지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1월의 노인이 일어 서서 얼음이 얼어 붙은 긴 지팡이로 땅을 쳤습니다.

 

"추위여, 꽁꽁 얼어 붙은 추위여. 이제 물러 가라."

 

그러자 숲 속은 고요해졌습니다. 눈보라가 그치고 별이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에는 2월의 노인이 일어 섰습니다. 긴 지팡이를 1월의 노인으로부터 넘겨 받아 땅을 쳤습니다. 나뭇가지에서 바람이 일고 눈이 연기처럼 빙빙 소용돌이쳤습니다. 2월의 노인은 3월의 젊은이에게 지팡이를 넘겨 주었습니다. 지팡이는 3월의 젊은이 손에서 싹이 튼 큰 가지가 되었습니다. 3월의 젊은이가 땅을 쳤습니다. 눈이 녹기 시작했습니다. 숲 속의 나무들도 긴 지팡이처럼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자아, 이제 자네가 지팡이를 잡아 보게, 4월의 형제."

 

4월의 젊은이가 지팡이를 잡자, 지팡이에 푸른 새싹이 벌어졌습니다. 젊은이는 가느다란 피리를 입에 물고 짧게 불었습니다. 녹을 듯한 기분으로 마음 속에 스며 드는 달콤한 멜로디가 흘렀습니다. 그리고는 활기에 찬 소리를 질렀습니다.

 

"시냇물이여, 달리 듯이 흘러라. 개미들이여, 기어 나오라. 겨울의 추위는 가버렸다. 스노우드롭의 꽃이 피었다!"

 

숲 속은 완전히 봄이 되어 있었습니다. 눈은 녹아서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으며, 흙 위에는 하늘색 꽃과 하얀 꽃이 피었습니다.

 

"왜 멍청히 서 있지. 아가씨? 빨리 서둘러야지. 형제들이 아가씨와 나에게 준 시간은 한 시간 뿐이야."

 

"정말로 저를 위하여 봄이 왔어요? 저의 눈을 믿을 수가 없어요."

 

소녀는 외쳤습니다.

 

"믿건 말건 빨리 서둘러요. 아가씨의 광주리는 아직도 텅 비어 있지 않은가?"

 

4월의 젊은이가 재촉하는 바람에 소녀는 스노우드롭을 캐러 뛰어 갔습니다.

 

소녀가 사라지자, 1월의 노인이 낮은 소리고 말했습니다.

 

"우리 겨울의 달들은 모두 저 아가씨를 알고 있지. 저 아가씨는 언제나 밝고 상냥하거든. 그런데 오늘은 좀 어두워 보였어."

 

"우리 여름의 달들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6월의 소년이 말했습니다. 겨울의 달들은 얼음 구멍에서 두 손으로 물통을 든 소녀를 만나기도 하고, 숲 속에서 땔감의 다발을 지고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소녀는 혼자서 노래를 부르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여름의 달들은 이른 아침부터 나와 밭의 풀을 뜯고 벌레를 잡고 있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가을의 달들은 숲의 나무와 나무의 열매를 소중히 다루는 소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와 같이 착한 아이에게는 엄동 설한에도 한 시간 쯤 봄을 주어도 아깝지 않거든."

 

2월의 노인이 말했습니다.

 

"그 아가씨가 여러분의 기분에 들었다면 나는 그 아가씨에게 약혼 반지를 보내겠습니다."

 

4월의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서 소녀가 나타났습니다.

 

"벌써 광주리 가득히 채웠구나."

 

1월의 노인이 말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어요. 여러분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살아 있는 한, 여러분의 친절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소녀는 1월의 노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인사는 4월의 달에게 하렴. 그 젊은이가 너를 위하여 부탁했으니까 말이야. 꽃도 그 젊은이가 너를 위하여 눈 밑에서 내어 준 것이다."

 

"고마워요, 4월의 오빠. 저는 언제나 오빠를 만나는 것이 기뻤어요. 이제는 절대로 잊지 않겠어요."

 

소녀는 4월의 젊은이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언제까지나 잊지 않도록 이 반지를 주겠소. 앞으로 곤란한 일이 있으면 이것을 땅바닥이나 물 속, 혹은 눈이 날려 쌓인 곳에 던지면서 이렇게 말해요.

 

굴러라 굴러라 반지여.

봄의 들머리에 여름의 처마 끝에

가을의 높은 다락에 그리고 겨울의 융단 위를

새해의 모닥불을 향하여!

 

12월의 모든 달들이 아가씨를 도우러 갈 것이니 나의 이 반지를 소중히 간직해요."

 

"절대로 잃어 버리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저의 가장 소중한 물건이 될 것입니다."

 

소녀는 반지를 꼭 쥐면서 대답했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된다."

 

1월의 노인이 말했습니다.

 

 

 

스노우드롭을 가지고 궁성으로


아주머니와 그 딸은 나들이옷으로 갈아 입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살아 돌아 올 줄을 누가 알았겠니? 게다가 스노우드롭을 가지고 말이야."

 

"어디서 캐어 왔는지 저 아이에게 물어 보지 않았어요?"

 

"물을 겨를도 없었어. 그 아이는 마치 산보나 하고 온 것처럼 밝은 얼굴로 눈이 빛나고 있었어. 광주리를 저기 놓더니 그대로 들어 가 버렸어. 점심 때가 되었는데도 저 아이는 아직도 잠들어 있으니."

 

"내가 가서 깨울테야. 어머니는 그 동안에 그 광주리에 스노우드롭을 바꾸어 담아요."

 

딸은 잠들어 있는 소녀의 손가락의 반지를 보고 몰래 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주머니는 커다란 광주리에 스노우드롭을 옮겼습니다. 꽃 밑에는 흙을 넣고, 꽃 둘레에는 다른 화분의 나무의 잎을 따서 틈을 보이지 않게 메웠습니다.

소녀는 잠을 깼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찾는 듯이 발 밑을 보면서 슬슬 방 안을 돌아 다녔습니다.

 

"너는 무엇을 찾고 있지?"

 

딸은 반지를 호주머니에 숨기고 물었습니다.

 

"내가 스노우드롭을 넣어 온 광주리는 어디 있지요? 거기서 무엇인가 보지 않았어요?"

 

"우리가 뭘 보았다는 거냐? 잃어 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저의 반지는 아무 쓸 데도 없어요. 그걸 돌려 줘요."

 

"그런 건 본 적도 없어."

 

아주머니와 그 딸은 스노우드롭의 광주리를 들고 궁성으로 갔습니다. 소녀는 벽난로 앞에 걸터 앉아 멍청히 불을 보고 있었습니다.

 

"꽃도 반지도 모두가 꿈이었던 것 같아. 안녕, 4월의 오빠!"

 

 

오늘은 아직 12월 32일


궁성의 큰 홀 한가운데 커다란 전나무가 꾸며져 있었습니다. 잠시 후 많은 신하들과 시종들을 거느리고 여왕님이 나타났습니다.

 

"폐하, 새해를 축하 드립니다."

 

손님들은 모두가 축하의 인사를 했습니다.

 

"새해는 아직도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12월 32일입니다. 12월은 광주리에 가득한 스노우드롭이 올 때까지는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이윽고 경호대의 장교가 스노우드롭을 가지고 온 아주머니와 그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여왕은 광주리로 달려 갔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꽃이야! 지금 우리들의 왕국에도 새해가 왔습니다. 이제는 새해를 축하해도 좋습니다."

 

"새해를 축하합니다, 폐하! 새로운 행복을 함께 축하하는 바입니다."

 

여왕님은 스노우드롭을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전나무 등불이 켜졌습니다. 음악이 연주되고,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춤도 싫어졌어."

 

여왕님은 곧 싫증을 내어 말했습니다. 그러자 모두가 춤을 멈추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여왕님 곁으로 다가 갔습니다.

 

"어머, 그대들이 아직 있었구나? 참 그렇지, 저 사람들의 광주리에 금화를 넣어 주도록 명령을 내리시오."

 

여왕님은 대신에게 말했습니다.

 

"폐하, 저들의 광주리에는 꽃보다도 흙이 더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마는."

 

"좋아요. 스노우드롭의 값은 황금으로 해 주세요. 그러나, 흙은 나의 왕국의 것입니다."

 

여왕이 말했습니다.

 

"폐하, 1년 중에서 가장 추운 계절에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이와 같은 훌륭한 봄의 꽃을 찾아 냈는지 알고 싶습니다."

 

손님이 말했습니다. 여왕님은 아주머니와 그 딸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들은 어디서 꽃을 찾았는지 이야기를 해보아라."

 

두 사람은 머뭇거렸습니다.

 

"사실은 스노우드롭을 캔 것은 우리들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인가?"

 

"저의 양녀이옵니다. 폐하! 그 애가 저 대신 숲으로 가서 캐어 왔습니다."

 

"그럼 그 아이가 길을 가르쳐 주겠구나."

 

"틀림 없이 가르쳐 줄 것입니다. 그러나, 고집이 센 아이이므로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아이의 목을 베도록 명령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누구의 목을 칠 것인가는 내 스스로 알고 있노라."

 

여왕은 이렇게 말하며 일어 섰습니다.

 

 


여왕님은 숲으로


"새해 축하합니다!"

 

소나무 위의 다람쥐가 말했습니다.

 

"새로운 행복을 축하합니다."

 

전나무 위의 다람쥐가 말했습니다.

 

"까옥까옥. 안녕, 꼬마?"

 

까마귀가 높은 곳에서 말했습니다.

 

"새로운 행복을 축하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몇 번이나 새해를 축하했지요?"

 

"150회야."

 

토끼가 튀어 나왔습니다.

 

"안녕, 짧은 꼬리군? 새해를 축하해."

 

다람쥐가 말했습니다.

 

"늑대가 나를 쫓아 오고 있어. 어금니를 갈고 말이야. 나를 통채로 먹어버리려 한다고."

 

"도망쳐요, 토끼군!"

 

"냄새가 나는데. 귀가 긴 친구(토끼)는 틀림없이 여기 있구나!"

 

늑대가 달려 와서 말했습니다.

 

"까옥까옥, 잔소리하지 말고 도망치는 게 좋을 거야. 이쪽으로 많은 군대가 오고 있어!"

 

배가 고픈 늑대는 비틀거리면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여왕님과 시종들은 숲으로 왔습니다. 떠들썩한 소리를 내면서 미끄러지고 구르면서 호수까지 왔습니다. 호수에는 얼음이 얼어 있습니다. 호숫가에는 눈이 높게 쌓여 있었습니다.

꽃은 아무데도 피어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에게 길을 가르쳐 줄 여자들은 어디로 가 버렸어?"

 

여왕님은 추위에 짜증이 나 있었습니다. 겨우 아주머니와 그 딸이 왔습니다. 그 뒤를 따라 소녀도 왔습니다.

 

"나를 위하여 스노우드롭을 캐어 온 사람은 그대인가?"

 

여왕님이 물었습니다.

 

"예, 제가 가지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황금이 든 광주리를 받게 될 것이다. 그 외에도 네가 바란다면 옷을 12벌, 비단과 빌로드로 된 것을 주겠다. 또한 다이아몬드가 붙은 은의 굽이 달린 구두와 팔지, 10손가락에 낄 반지도 주겠다. 어때, 가지고 싶어?"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가 가지고 싶은 것은 저분들이 숨겨 버린 반지입니다."

 

여왕님은 딸이 숨기고 있던 소녀의 반지를 빼앗았습니다.

 

"이 반지구나, 자아, 가져요. 아니지, 그보다도 먼저 말을 해야지. 어디서 스노우드롭을 찾았지?"

 

소녀는 12의 달들과 한 약속을 지켜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에 스노우드롭이 있는가를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호수의 얼음 구멍에 던져 버리리테야. 어때?"

 

"가르쳐 드릴 수 없습니다."

 

소녀는 말했습니다.

 

"자기의 반지에게 안녕을 해요. 물론 목숨과도 안녕을 해야지."

 

여왕님은 이렇게 말하고 반지를 물 속에 던졌습니다. 소녀는 호수로 달려가서 12의 달을 불렀습니다.

 

"굴러라 굴러라 반지여.

봄의 들머리에 여름의 처마 끝에

그을의 높은 다락에 그리고 겨울의 융단 위를

새해의 모닥불을 향하여!"

 

곧 세찬 바람이 불고 눈이 연기처럼 날렸습니다. 여왕님도 손님들도 머리를 감싸고 얼굴을 가렸습니다.

달들이 모두 다가 온 것 같았습니다. 하얀 그림자가 되어 소녀를 감싸고는 어디론가 데리고 가 버렸습니다.

1월은 탬버린을 치고 2월은 뿔피리를 불었습니다. 여왕 일행은 큰 소리로 외치며 서로 엉켜 잡고 세찬 바람에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3월의 작은 방울 소리에 이어 4월의 피리 소리가 흘렀습니다. 그 둘레는 마침내 고요해지고 햇빛이 스며 오면서 따뜻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무들은 잎을 넓히고 땅에는 꽃이 피었습니다. 스노우드롭도 피었습니다. 그러나, 여왕님이 그것을 꺾으려 했을 때는 이미 여름이었습니다. 여왕님은 외투를 벗었습니다. 모두가 외투를 벗어 던졌습니다. 더위에 지쳐 땅바닥에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습니다. 소나기가 무섭게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눈깜박할 사이에 가을이 되었습니다. 신하들은 여왕님을 버려 둔 채 말을 타고 도망쳤습니다. 숲에 남은 것은 여왕님과 선생님, 아주머니와 그 딸, 그리고 군인 아저씨 뿐이었습니다.

 

숲 속은 갑자기 어두워졌습니다.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태풍이었습니다. 나무는 부러지며 쓰러지고 외투도 어깨걸이도 윗도리도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매섭게 추운 겨울이 온 것입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 앞에 키가 큰 노인이 나타났습니다.

 

"당신들은 여기 뭣하러 왔소?"

 

"스노우드롭을 캐러 왔습니다. 아무쪼록 우리들에게 숲을 빠져 나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당신에게 상금을 드릴 것입니다."

 

"나는 무엇이나 가지고 있소. 당신이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에게 선물을 줄 수가 있다오. 각자가 무엇을 바라는지 말을 해보시오."

 

노인이 말했습니다. 여왕님과 박사는 궁성으로 돌아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군인 아저씨는 모닥불에 몸이나 녹이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노인은 좋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외투를 주세요. 어떤 털가죽이라도 상관없어요. 개털가죽이라도 당장 주세요."

 

노인은 품에서 개털가죽의 외투를 꺼내어 두 모녀에게 주었습니다.

 

"기다려, 기다려."

 

아주머니는 황급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것을 입고 두 마리의 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군인 아저씨는 두 마리의 개를 썰매에 매었습니다.

 

"가 보아요, 군인. 불이 있는 쪽을 향해서 가 보아요. 거기 모다불이 타고 있을 것이오. 거기까지 가서 몸을 녹이도록 해요.

"

공터에서는 모닥불을 에워 싸고 12의 달들과 소녀가 앉아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저를 두 번이나 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반지를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 맞추어 봐요. 내 손아귀에 무엇이 있는지."

 

4월의 젊은이는 소녀에게 반지를 주었습니다.

 

"어머, 제 반지! 이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기가 무서워요. 다시 빼앗기지는 않을지."

 

"이제 그 누구도 아가씨의 것을 빼앗지는 않는다. 이번에는 우리들이 아가씨의 초대를 받아 가게 될 것이다. 이 옷상자를 선물로 주겠다."

 

1월의 노인은 소녀에게 옷상자를 주었습니다. 그 상자 속에는 검은 족제비, 다람쥐, 여우 등의 털가죽 외투, 그 밖의 눈부신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소녀는 새 옷을 입었습니다. 2월의 달은 검은 족제비의 가죽이 붙은 은으로 된 썰매를 선물했습니다. 5월의 달은 썰매를 끌고 갈 말을 두 마리, 3월의 달은 말의 목에 달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방울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때 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 여왕 일행이 왔습니다. 군인이 외쳤습니다.

 

"저기 보시오. 모닥불이오. 그 노인은 나를 속이지 않았어."

 

1월의 노인이 권하여 모두 눈치를 살피면서 불 가까이로 다가 갔습니다.

 

"더 가까이 와서 쬐시오. 그래야 몸이 녹을 것이오."

 

"우리들을 아무쪼록 썰매에 태워 주세요. 그 대신 상을 내릴 것입니다."

 

"폐하, 저 아가씨에게는 아무런 약속도 할 필요가 없고, 그냥 태워 달라고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군인이 앞으로 나와서 말했습니다.

 

"우리들을 태워다 줘. 부탁이야! 우리들은 꽁꽁 얼어 붙어 버렸어."

 

"태워다 드리고 말고요!"

 

몸이 얼어버린 여왕님에게 소녀는 외투를 입혀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외투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군인은 마차의 앞 자리에 타고 채찍을 휘둘렀습니다.

 

"안녕히 계셔요, 12월의 여러분들! 여러분의 새해의 모닥불을 잊지 않겠습니다!"

 

소녀는 외쳤습니다.

 

"나도 잊지 않겠어요!"

 

여왕님도 외쳤습니다.

 

"잘가요, 무사히 가세요."

 

12월의 달들은 일제히 말했습니다.

 

"스노우드롭을 찾아 낸 그 아이가 몰라보게 이뻐졌어."

 

군인도, 여왕님도, 박사도, 소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두 마리의 개도 짖어댔습니다. 그 소리에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어디서 들은 것 같은 소리야.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습니다. 아가씨."

 

군인이 말했습니다.

 

"3년이 지나 얌전해지면 섣달 그믐날에 여기 데리고 와요. 개털 외투를 벗겨 줄 테니까."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녀에게 1월의 노인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자아, 서둘러요. 저 하얀 말 주인에게 부탁하여 타고 가면 될 것이오."

 라고 말했습니다.

소녀와 여왕 일행은 이별을 섭섭해 하며 숲 속을 빠져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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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01: 빛이 있는 동안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02: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03: 오리엔트 특급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04: 0시를 향하여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05: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06: 열세 가지 수수께끼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07: 살인을 예고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08: 비뚤어진 집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09: 누명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0: 움직이는 손가락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1: 끝없는 밤 (♦♦♦♦♦)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2: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3: 나일강의 죽음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4: 커튼 (♦♦♦♦♦)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5: 쥐덫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6: 엔드하우스의 비극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7: 마지막으로 죽음이 오다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8: 비둘기 속의 고양이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9: 창백한 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0: 푸아로의 크리스마스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1: 파커 파인 사건집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2: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았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3: 신비의 사나이 할리퀸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4: 목사관의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5: 빅 포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6: 침니스의 비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7: 서재의 시체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8: 갈색 양복의 사나이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9: 시태퍼드 미스터리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0: 구름 속의 죽음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1: 죽음과의 약속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2: 벙어리 목격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3: 비밀 결사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4: 에지웨어 경의 죽음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5: 세븐 다이얼스 미스터리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6: 3막의 비극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7: 뮤스가의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8: 테이블 위의 카드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9: 골프장 살인 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0: 블루 트레인의 수수께끼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1: 부부 탐정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2: 다섯 마리 아기 돼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3: 할로 저택의 비극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4: ABC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5: 푸아로 사건집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6: 살인은 쉽다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7: 슬픈 사이프러스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8: 밀물을 타고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9: 패딩턴발 4시 50분(♦♦♦)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0: N 또는 M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1: 헤라클레스의 모험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2: 하나, 둘, 내 구두에 버클을 달아라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3: 깨어진 거울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4: 백주의 악마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5: 장례식을 마치고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6: 맥긴티 부인의 죽음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7: 시계들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8: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9: 코끼리는 기억한다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0: 엄지손가락의 아픔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1: 빛나는 청산가리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2: 목적지 불명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3: 그들은 바그다드로 갔다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4: 메소포타미아의 살인



+ 작품연보(출처는 내부에)



+ 아래는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안 출판한 책들로 추청.
해문 출판사. 재출간된거같은데 도서관은 1990년판.. 벌써 21년전..
 

아가사크리스트 17: 푸른열차의 죽음
아가사크리스트 19: 애국살인
아가사크리스트 20: 화요일클럽의 살인
아가사크리스트 23: 회상속의 살인
아가사크리스트 24: 위치우드 살인사건
아가사크리스트 25: 삼나무관
아가사크리스트 27: 부머랭 살인사건
아가사크리스트 33: 검찰측의 증인
아가사크리스트 39: 프랑크푸르트행 승객
아가사크리스트 48: 크리스마스 살인
아가사크리스트 52: 마술살인
아가사크리스트 53: 잊을수 없는 죽음
아가사크리스트 57: 버트램호텔에서
아가사크리스트 58: 죽은자의 어리석음
아가사크리스트 60: 죽은자의 거울
아가사크리스트 61: 잠자는 살인
아가사크리스트 64: 헤이즐무어살인사건
아가사크리스트 65: 파도를 타고
아가사크리스트 66: 바그다드의 비밀
아가사크리스트 67: 리스터 테일 미스터리
아가사크리스트 69: 헬로윈 파티
아가사크리스트 70: 히코리 디코리 살인
아가사크리스트 71: 4개의시계
아가사크리스트 72: 복수의 여신
아가사크리스트 74: 패배한 개
아가사크리스트 76: 리가타 미스터리
아가사크리스트 77: 죽음의 사냥개
아가사크리스트 80: 운명의 문



+ 이힝~ 황금가지꺼 드디어 다읽음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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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의 예를 들어보자. <연결>이라는 기능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도움말을 참조하면 이런 대답이 나온다. <개체를 연결시켜주는 기능입니다. 《접속》참조.> <접속>기능이란 또 무엇인가 하고 찾아보면, <연결 문서에 접속하는 기능입니다>라는 설명을 만나게 된다. <에러125> 같은 유형의 긴급성을 띤 메시지가 나타났을 때도 도움말은 대단히 유용하다. 도움말은 당신에게 이렇게 일러줄 것이다. 당신은 <에러125>를 범했으며, 작업을 계속하기 전에 그 에러를 제거해야 한다라고.
  그런 도움말 작성자를 양성하자면 아주 어릴 적부터 특수한 학교에서 준비 교육을 시켜야 할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의 명제를 꾸미면서 논리 훈련을 하는 학교에서 말이다. <모든 독신자들은 독신자이다>, 또는 <에파미메니데스는 뜀박질을 하거나 뜀박질을 하지 않는다>, <모든 동물은 동물이다>, <오늘 날씨는 비가 내리거나 비가 내리지 않는다>, <코르불리데스가 배중률(排中律)을 진술한다면, 코르불리데스는 배중률을 진술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등등.


-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열린책들 p.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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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2009. 5. 26. 19:45 from 서재/접어둔 페이지

  그들은 '산속'이 평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했지만 산속에 떨어진다는 '큰 물고기'의 해석을 두고 다시 의견이 엇갈렸다. 일사학파는 불기둥이 치솟아 하늘에 닿는다는 따져볼것 없이 남성의 발기된 성기를 가리키며, 이로 미루어 큰 물고기는 여성의 성기를 의미한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따라서 노파의 공수는 저주가 아니라 생전의 노파를 사로잡았던 반편이의 거대한 성기를 찬양하는 동시에, 남녀간의 운우지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자 이사학파에선 불기둥을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모든 범주에 기계적으로 무리하게 적용함으로써 해석상의 전반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큰 물고기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은 지난 전쟁에서 등장한 신무기, 즉 미사일을 가리킨다는 거였다. 미사일이 마치 물고기처럼 유선형으로 생긴데다 뒤에 나오는 불기둥이란 말과 정확하게 호응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곧 미사일론에 대한 반박이 뒤따랐다.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은 노파가 어떻게 미사일을 아느냐는 거였다. 귀신이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다는 해명에 대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말라는 반박이 나왔으며, 뒤이어 어따 대고 선배 앞에서 그따위 개소리를 하느냐는 성명이 발표되자, 너 대학 어디 나왔냐는 질문이 나왔고, 이 씹쌔야, 어딜 나온 게 무슨 상관이냐는 반론이 제기되자, 저 새끼, 싸가지 없는 건 학교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는 인물평과, 저 새끼는 학계에서 완전히 매장시켜버려야 된다는 매장론이 뒤따랐으며, 선배 무시하다 뒈지게 맞고 피똥 싼 놈 많다는 협박과, 누군 씹팔, 고스톱 쳐서 학위 딴지 아냐는 고스톱 학위론, 그럼 씹쌕꺄, 미사일이 아니면 도대체 뭐냐, 뭐긴 뭐야, 섁꺄, 니 애비 좆이라니까, 라는 식으로 반박이 줄줄이 이어지며 논쟁은 점점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어갔다. 이후에도 불기둥 논쟁, 남쪽 논쟁, 검불 논쟁 등 논쟁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며 공수논쟁은 그해가 다 가도록 끝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 천명관, 『고래』, 문학동네 p.242-243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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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

2009. 4. 15. 00:32 from 서재/접어둔 페이지


  그 여자의 서성거림은 번번이 그런 식으로 끝나곤 하였다. 차츰 그 여자는 깨달았다. 사내들이 탈출하고 싶어 하는 욕구는 거의 모두가 조건부라는 것을. 다시 말해서 사내들은 영원히 '이곳'을 떠날 의도는 없어 보였다. 그들은 잠깐 울타리를 뚫고 밖으로 나가 본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얼른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니 미처 그것도 아니다. 울타리 안에서 울타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만 한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자기의 욕구는 반드시 사내들이 자기네의 욕구를 과감히 실천할 때 함께 성취 될 수 있음을. 그렇다, 사내가 그 여자의 내부에 공포와 혼란을 일으켜 놓지 않는다면 그 여자는 어떻게 자기의 더러움을 자백할 수 있을 것인가!
  (중략)
  그리하여 최근에 와서 그 여자의 욕구는 비틀거렸다. 이따금 그 여자는 그 공포와 혼란이 없이도 사내의 손에 이끌려 갈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곤 하였다. 창녀들처럼 아니 절실하게 기도해야 할 것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들처럼.


- 김승옥, 『무진기행』中「야행」, (주)민음사 p.346-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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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이게 저승이 아니란 말이야?" 아서가 말했다.
  웨이터가 웨이터답게 예의 바르면서도 조용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예의 바르고 조용조용한 웨이터용 레퍼토리를 거의 다 써버렸고, 이제 곧 말수 적고 냉소적인 웨이터 역할로 들어갈 것이다.
  "저승이라고요? 아닙니다, 손님." 그가 말했다.
  "그럼 우린 안 죽은 건가요?" 아서가 말했다.
  웨이터가 입술을 깨물었다.
  "으음, 음," 그가 말했다. "손님은 분명 살아 계십니다. 안그러면 제가 어떻게 주문을 받겠습니까?"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동작으로, 자포드 비블브락스가 팔 두개로는 자기 이마 두개를, 나머지 팔 하나로는 자기의 넓적 다리를 철썩 갈겼다.
  "이봐, 친구들, 이거 정말 대단해. 우리가 해낸거야. 우린 마침내 우리가 오고자 했던 곳에 온 거라고. 여기가 바로 밀리웨이스야." 그가 말했다.
  "밀리웨이스!" 포드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손님." 흙삽으로 인내심을 꾹꾹 누르며 웨이터가 말했다. "여기가 바로 밀리웨이스,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이죠."


- 더글라스 애덤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 - 우주 끝에 있는 레스토랑』, 김선형 권진아 옮김, 책세상 p.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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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나무인 나에게는 시간을 주고 인간에게는 공간을 맡겼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속에 질투심의 씨가 싹트게 된 것은 아닐까? 움직일 수 없다는 내 약점을 이용해서 인간은 자신의 키를 내 키에 맞추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인간에게 주어진 몇 십년 정도의 수명과 내게 주어진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의 평균 수명을 비교해 보면, 인간은 아찔한 느낌이 들 테지. 나무와 인간 사이에 무엇인가 끊어진 것이 있다면 아마도 바로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 미셸 뤼노, 『시인을 꿈꾸는 나무』, 창작시대사 p.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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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안진태, 『카프카 문학론』, 열린책들
- 전범위에 걸쳐 「변신」에 관련된 내용만 추려낸 것이다. 전체적인 설명은 많이 적지 못했다.


제1장 카프카의 인물적 배경
3. 카프카의 민족성과 종교성
1) 카프카와 프라하
(생략)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태어나서 일생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죽어서도 그곳에 묻히게 되어 카프카와 프라하는 영원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가 증오하고 또 사랑했으며 언제나 떠나려 했는데도 그를 꽉 붙들어 두었던 도시, 그 세계를 그가 뒤로 물러서서, 그러나 정확하게 하나하나 기록해 놓은 도시, 그 위험스러운 다양성과 생소함이 현대적인 소외의 면모들을 지니는 듯한 도시의 준엄한 진실이라는 도구로 카프카는 <자신의> 상황이 낳은 결과들을 기록하려고 노력했다.
  카프카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주위 세계에 부정적 판단을 내렸음에도 이 주변 세계가 카프카의 작품의 주제나 문체에 결정적인 몫을 차지하고 있다. 주제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으로는 프라하에 사는 독일인들의 섬사람 같은 폐쇄성을 들 수 있다.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그곳에 생활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체코어도 히브리어도 모르는 유대인으로 체코적 토속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일률적으로 독일 교육을 받아 독일 정신으로 성장했다. 물론 이것은 프라하의 상류 유대인의 생활 태도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생의 뿌리를 박은 카프카의 대지는 체코이면서도, 공간의 위치를 점하는 육체는 유대인이고, 무한대로 하늘을 나는 정신 세계는 독일이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 독일적이기 때문에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체코인으로부터 배척되고, 오스트리아인에 의해서는 보헤미아인으로 기피되고, 독일인으로부터 유대인으로 경멸되고, 자식으로 부친의 지배 하에 있는 가정에서 소외되고, 유대인으로 기독교에서 단절되고, 무신론자로서 종교적 유대인에게 외면당하고, 예술인으로 일반 대중에게서 이해되지 못한 카프카는 유대인이기에 너무나 독일인이며, 독일인으로서 너무나 체코인이고, 체코인이기에는 너무나 유대인이라는 이율 배반의 화신이다.
(생략)


4)카프카의 종교성
(생략)
  카프카는 1917년 9월에서 1918년 4월에 걸쳐 씌어진 취라우 잠언에서 신학적 물음들과 집중적으로 담판을 벌였다. 특히 『8절지 노트의 기록』중 세번 째와 네 번째에는 신의 창조의 원죄, 실낙원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단상들이 여러 개 발견된다. 카프카의 시각에서 볼 때 인류 역사는 추락과 원죄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원죄에 관한 카프카의 잠언을 살펴보자.
-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은 그 주요 부분에 있어서 영원하다(시간외적인 영원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은 최종적이고 이 세상에서의 삶은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의 영원성은 (혹은 시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 과정의 영원한 반복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낙원 안에 머무를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곳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여기 이 세상에서 그 사실을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 없이.(H 69) -
  카프카는 여기서 실낙원의 상태, 즉 인간의 시간이 영원과 분리된 상태를 영원한 것으로 묘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실낙원의 영원한 반복이 오히려 인간을 낙원의 영원성 속에 머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역설적인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카프카는 이러한 실낙원 등 성서상의 모티프를 작품에 간접적으로 자주 차용했다. 예를 들어 「변신」에서 부친이 그레고르를 향해 던진 대상은 사과이다. 그런데 다른 과일이나 소도구일 수도 있을 텐데 카프카는 왜 구태여 사과를 등장시켰을가. 사과는 인식의 나무로 실낙원을 상징하며 원죄 의식과도 관련된다. 실낙원의 원인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해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한 선악과, 즉 사과인데 카프카는 이 사과를 작품에 자주 등장시키고 있다.  「변신」에서 부친이 던진 사과 조각이 몸에 박혀 생긴 그레고르의 상처는 <살 속에 박힌 가시적인 기념물>(E 90)로서 그레고르가 인간 이전의 동물적 단계로 퇴행에 대한 벌인 동시에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기억시키는 매체이기도 하여 신화와 현실의 양자적 개념을 암시한다. 인류의 조상이 사과를 따먹는 순간 자기 의식을 갖게 되고 원죄를 느껴 쫓겨나야 했듯이 그레고르는 자기를 의식하는 순간 변신한다. 사과의 형태는 원형(圓型)이며 원형은 종말이 없는 무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 파의 말도 있다. 마찬가지로 그레고르의 고독과 원죄의 짐은 끝이 없어 죽을 때까지 그 고독과 짐을 감내해야 했다. (홍경호, 「카프카의 『변신』연구」, 『카프카 문학론』, 한국카프카학회, 1987, 241면.) (중략)
  카프카는 창세기의 원죄 이야기를 읽은 후 1916년 6월 19일자 일기장에 <인류에 대한 신의 분노>(T 366)라는 말을 적었다. 그는 오래된 유대 전통에 따라 신에대한 논쟁을 벌이면서 신의 잔인함을 비난했다. 그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신의 금기 사항은 근거 없으며, 이를 어긴 뱀, 아담, 이브에 대한 신의 처벌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며 이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  우리 인간은 단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죄가 있는 것만이 아니라 아직도 생명 나무 열매를 따먹지 못한 데 죄가 있다. 그리하여 죄와는 상관없이 우리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이 죄가 된다.(H 48) -
(생략)


4. 카프카의 여성관
1) 부정적 여성상
(생략)
  심지어 「변신」에서는 근친상간의 면모도 보이고 있다. 폴리처는 평범한 인간 그레고르의 변신을 근친상간적 모티프로 해석하였다. 즉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 여동생을 소유하겠다는 그레고르의 죄악이 변신의 원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였다.(Heinz Politzer, Franz Kafka, Der K ünstler, Frankfurt/M., 1978, S. 128) 
  음악에 대하여 특별한 재능이나 취미가 없으면서도 여동생의 연주를 듣고 감동하였으며 그 여동생을 자기 방으로 데려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그 방 안에 가두어 두고 싶어한 그레고르는 그녀를 음악학교에 보내겠다는 결심을 한다. 따라서 음악이 그의 동경을 나타낸 것이라면, 동생은 소유욕을 상징한다. <그러면 그(그레고르)는 여동생의 어깨 위까지 기어올라가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어 주리라. 직장에 다닌 후부터 여동생은 리본이나 깃을 달지 않고 목을 드러내 놓고 다녔으니까.>(E 99)
  심지어는 여동생 그레테 자신도 약간의 애욕성을 보이고 있다. 그레테가 집안의 하숙생을 위해서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벌레가 된 그레고르가 출현하자 불쾌감을 느낀 하숙인들이 이것을 구실로 하숙 계약을 취소하겠노라고 그의 가족들을 위협하자, 이들 하숙인들의 교만에 비분강개해야 할 여동생은 오히려 하숙인들에게 잘못을 빌고 아양을 부린다. 즉 음악에 무관심한 하숙인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교태 같은 행위를 하자 그레고르는 실망과 분노의 눈초리를 보낸다.
  이렇게 대부분의 카프카 문학의 여성들은 육감적 사랑에 치우쳐 있다. 카프카에게 여성들이란 말하자면 <유혹의 올가미>이며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G 178)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카프카의 독신의 남자 주인공들이나 카프카 자신의 공통적 심적 상태인 고독, 불안, 우울, 방만, 유아적 특징, 자질구레한 성찰 따위가 일으키는 강박 관념의 소산으로 여성상도 들 수 있다.
  따라서 카프카 작품의 주인공들의 정신적 갈등 과정에는 언제나 애욕적인 여성들이 등장하여 이러한 갈등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러한 애욕은 인간이 아닌 그림에서도 등장한다. 예를 들어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기어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동생이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의 방에 놓여 있던 가구를 치우는 과정에서 그레고르는 액자 속의 여인과 관련되어 있는 성적(性的) 모티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애호하던 가구와 물건이 거의 들려 나가고 방이 텅 비게 되었을 때 소파 밑에 있던 그레고르는 어린 시절부터 사용해 온 책상마저 들려 나갈 기미가 보이자 무엇 하나라도 붙들어 두고 싶은 마음에서 가족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세심한 배려도 잊어버린 채 소파 밑에서 기어나온다. 이때 그레고르의 눈에 띈 것은 바로 텅 빈 벽에 걸려 있는 털제품을 두른 여인의 그림이 들어 있는 액자이다. 그는 급히 벽으로 기어 올라가서 액자의 유리에 들러붙는다. 뜨거운 하체가 차가운 유리에 닿자 그레고르는 쾌감을 느낀다. 이 느낌이 바로 그레고르가 느끼는 애욕의 정점이다. 그가 지금 전신을 감싸고 있는 이 액자만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방어 태세를 취한다.
(생략)


제2장 카프카 문학의 구성 분석
(생략)
-  카프카에서 무엇인가 습득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상황도 최종적이지 못하다. 긍정이든 부정적이든 세상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더 많이 아는 자를 찾아야한다.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Martin Walser, Beschreibung einer Form, Versuch Franz Kafka, München, 1961, 30.) -
  이렇게 시간적 지형적으로 서구의 계몽적 세계와 거리가 먼 카프카 작품은 바로 그의 시대의 비판의 결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카프카에게 있어서 외적 현실은 보편성이 상실된 체험인데, 이는 그 당시의 시대 상황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페터 지마에 따르면 카프카 텍스트의 다의성은 주체의 위기에서 새로운 주체성을 찾으려는 세기 전환기 소설의 기본적인 특징에 해당된다. 즉 <세기 전환기의 소설들은 모든 일회적인 것과 특수한 것을 의문시하는 매개의 중의성을 그 정반대의 차원 - 텍스트와 그 기호의 다의미성 - 으로 변화시키려는 변증법적 시도>인 것이다. (페터지마(서영상, 김창주 공역), 『소설과 이데올로기, 현대 소설의 사회사』, 문예출판사, 1996, 301면 이하.) 따라서 카프카의 불확정적인 서술 전력의 배경에는 세계 대전 이후의 20세기의 상황, 즉 소외 의식과 불안이 팽배했던 당시 사회적 혼란과 무관하지 않다.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로 전환하면서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야기된 계층간의 갈등, 제국주의 경쟁 하에서의 국가간의 대립, 전통적인 기독교 이념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서 비롯된 종교관의 분열 현상 등이 이 시대 상황을 대변한다. 외적 현실은 이미 절대 규범과 보편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뿌리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으며, 각 개인은 저마다의 세계 속에 파묻혀 공동의 이해를 이룰 수 없다. 기존 가치들은 절대성을 상실하고, 개인이 지금까지 삶을 규정하고, 해석하고, 밝혀 왔던 모든 관념들은 보편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현대 문명이 낳은 비인간화와 부조리한 사회의 현실이 결과적으로 계몽주의 이래로 과학적인 이성으로 극복했다고 믿어온 또 다른 현실에 불과했다는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떠한 판단도 확신할 수 없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렇듯 인간 상호 간의 관계가 절대 규범과 보편적 가치를 상실하고, 정상적인 사고 행위에서 보편 이념이 표출될 수 없으며, 보편성을 창출하고 매개해야 할 언어가 그 기능을 상실한 상황에서 외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꼼꼼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요구는 시대를 초월한 초석을 형상화하려는 카프카의 창작의지와 상반될 수밖에 없었다.(G 185) 따라서 카프카는 작품에서 자신의 독특한 보편성을 전개시킨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서로 모순되거나 이질적인 요소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긴장상태로 양립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카프카는 소재의 변형을 통해 자신과 더불어 문제시함으로써 인류의 발자취를 반성한 것이다.
  결국 카프카의 작품은 서구 모던의 합리성의 위기를 확인해 준 셈이다. 따라서 소위 새로운 시대적-계몽주의적 인식 능력이 그의 작품의 여러 곳에서 언급되어 있다. 그러한 형상은 종종 전근대적 혹은 고대적인 모티프와 상황의 형태로 나타나 우리의 존재와 존재의 의의를 보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파악시킨다.
  이런 배경에서 카프카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카프카 문학을 우연히 대하면 그것은 기괴하고 무의미한 유희, 그저 자기 자신에 몰두하고 있는 황당무계한 행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프카의 기술된 언어만 살펴보아도 이러한 해석은 타당치가 않는다고 인식하게 된다. 논증의 혼란 속에 내재적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이다.
  카프카의 작품에 기술된 것은 깊이 분석해 보면, 냉철하고 명확한 조서처럼 즉물적인 언어이며, 어떠한 요술도 또 어떠한 <순수한> 추상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황당무계한 행위처럼 생각되었던 것이 사실은 참된 현실이며 우리 자신의 아주 구체적인 운명이 된다. 이와 반대로 지금까지 현실이라 생각되었던 것이 가상(假象)의 모습을 띠게 된다. 환영이 진리가 되어 나타나고, 여태까지 참된 현실이라고 믿어 왔던 것이 허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중략)
  한편으로 기울지 않는 공평한 곳에서 인간은 구제된다. 따라서 카프카의 문학을 인간 전체의 실존적 묘사로 여겨, 즉 삶에서 거리를 두는 전체성으로 여겨 끊임없는 현실 압박에서 벗어나는 구제를 얻을 수 있다. 이 내용을 요약해 볼 때, 카프카는 우리를 현실과 거리가 먼 꿈의세계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절실하게 체험시키고 있다. 


1. 카프카의 언어
2)시각적 서술
(생략) 카프카는 무대 장면적인 묘사를 선호한다. 그는 일단 그의 의식 속에 단락적으로 들어온 사상(事象)을 정지시켜 집중적으로 집요하게 묘사함으로써 가시적(可視的) 인지(認知)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형상 세계로 시각화 경향은 현실의 탈개념화 과정과 맞물린다. 추상적인 개념이나 논증적 담론보다는 구체적으로 시각화된 형상 기호는 텍스트 체험 과정에서 수용자 직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는 논증적 담론에서의 개념적 현실 인식이 아니라 체험적 미적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유선, 「디지털 다매체 시대의 글쓰기 전략」, 『카프카 연구』, 제12집, 한국카프카학회, 2004, 252면 이하.)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변신한 갑충은 사실상 표현될 수 없고, 결코 볼 수 없는 상상적 동물인데도 우리에게 친숙한 시각적 동물로 이해되어 <부당함>과 <당연함>의 당혹스런 동시성을 갖게 한다. 따라서 본 적이 없는 신비스런 동물에서 아무런 놀라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기괴한 일상성>이 놀랄 만하다. 갑충이란 명백한 동물로 극히 시각적으로 표현되었기만 관계된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실제로 그 동물을 본 사람이 없다. 따라서 이 동물을 이해하고 관찰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갑충 그레고르를 실재하는 갑충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다.
  카프카 자신이 이 점을 명확하게 말한 적이 있다. 쿠르트 볼프 출판사가 슈타르케에게 「변신」에 들어갈 삽화를 그리게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때, 카프카는 출판인에게 보낸 1915년 10월 25일자 편지에 <슈타르케가 어쩌면 곤충을 그려보고 싶어할 거라고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가 그의 힘을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제가 당연히 제 작품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요청하려는 것입니다. 곤충 그자체를 그려 넣어서는 안 됩니다. 어렴풋하게 곤충을 암시하는 것조차 결코 안 됩니다>(F. Kafka, Briefe 1902~1924, hg. v. Max Brod, Frankfurt/M, 1986, S. 136.)라고 쓰고 있다. 갑충을 실재하는 동물로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의미다. 이렇게 갑충은 인간의 표상 세계에 들어맞을 수 없는 이물(異物)로 전혀 다른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감각과 표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인데도 작품에서는 시각적으로 당연한 동물로 등장하고 있다.


2. 비유와 상징
2)상징
(생략)  이러한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볼 때 카프카 문학이 지닌 <전체로서의 상징성>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그의 문학의 올바른 해석이 불가능하다.
(중략)
  넷째는 시대와 장소를 떠난 보편적 인간 상황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부유한 유대인이 내일 아침에 개처럼 비참히 학살당할 후도 있다. 오늘의 도둑이 내일 아침에 영웅이 되고, 오늘의 매국노가 내일 아침에 애국자가 되는 변신의 시대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양심에 따라 변신을 거부하고 끝까지 고려 왕실에 충절을 지키다가 선죽교에서 살해당한 정몽주와 몰살당한 그의 가족들, 한편 그를 죽여 변신한 뒤 왕권을 약탈하고 500년 동안 자손을 많이도 번식한 이방원. 어느 쪽이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6.25전쟁 때에도 한 동네에서 나름대로 똑똑하고 꼿꼿했던 탓에 공산주의자 혹은 국군에게 학살당한 사람이있는 반면 머리가 부족했거나 실리에 약삭빨라 변신한 덕분에 살아남아 면장 군수 국회의원이 되어 자손을 번식하고 출세시킨 이들도 있다. 생존 경쟁의 승리자로서 크나큰 긍지를 느낄 수 있지만 살아남은 자신에 대해서는 어쩐지 거북하고 계면쩍은 감정이 될 수 있는 것이 변신이다. 치열한 생존 경쟁의 시대, 강하게 살아남는 것이 미덕인 시대에 인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 변신이다.
  이러한 인간 상황의 변신이 카프카 작품에도 반영되어 이미지나 용모까지도 의도적으로 변신시키는 동기가 나타난다. (중략)
  앞에서 카프카의 상징적 성격을 작품 「변신」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았다. 그런데 우의(寓意)를 나타내는 알레고리와 상징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알레고리란 추상적인 개념이나 사상재(思想財)와 사유(思惟)된 복합체를 상징적으로 지각(知覺)되는 구체적 실체의 현상으로 옮겨놓는 화법을 말한다. 즉 이념적인 것이 의인화로 물질화된 것이다. 여기서는 어느 것 대신에 어느 <다른 것>을 말하지만, 이 <다른 것>이란 그 자체로서의 뜻이 없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난데없이 한 마리의 커다란 갑충이자 독충이라는 딱정벌레로 변해 버림으로써 자기의 인간으로서의 실체를 은폐한다. 인간이 벌레로 변신함으로써 자기 실체를 은폐한다는 기만 행위는 카프카 나름의 알레고리 수법이다.
  카프카의 알레고리는 비본질적인 언어 양식이 아니라, 본질적인 언어 양식으로 이해된다. 각각의 형상은 자체적으로 의미되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언어 형태, 형상과 사고 가능성 등은 항상 스스로의 세계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 뒤에는 매우 깊은 인식이 담겨 있다. 자기 형상적 의미 배후의 본질적 의미는 잘 해명되지 않는다. 특히 이 본질적 의미가 우리 삶에 관련된 일반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에 관련될 때 더욱 해독되지 앉는다. 그리고 알레고리는 이렇게 추구된 일반적인 것에는 삽화되지 못하는데, 이렇게 추구된 일반성은 우리 인식의 고유 법칙으로 다른 존재가 되거나, 인간 자신의 인식이 변하기 때문이다. 본질성은 형상으로 고정되어야 마땅한데 본질적 영역과 비본질적 영역의 혼돈으로 인해서 독자는 본질성의 정확한 규정이 어렵다.
 

제3장 카프카 문학의 내용분석
3. 꿈같은 초현실적 문학

1)꿈같은 초현실적 작가
(생략)
  조겔도 카프카의 작품이 서술구조상 꿈의 원리를 철저히 견지한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천재성을 인정하였다.(Vgl. Walter H. Sokel, Franz Kafka, Tragik und Ironie, Frankfurt/M., 1976, S. 9 f.) 카프카 스스로도 자신을 <잠자며 꿈꾸는 자>로서 또한 <깨어 있으면서 꿈꾸는 자>(S. Freud, Der Dichter und das Phantasieren, in: Ders. Bildende Kunst and Literatur, Frankfurt/M., 1969, S. 177.)처럼 글을 쓰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뜬 눈으로 꿈을 꿀 줄 아는, 낮에도 꿈꿀 수 있는 자인 카프카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완전히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T 291, 468)할 수도 있고, 또한 종종 <몰아의 상태>(F. Kafka, Briefe 1902~1924), Frankfurt/M., 1958, S. 385.)에 도달하곤 했다. 따라서 카프카는 자신의 글쓰기를 <보다 깊은 잠>으로 또는 <꿈같은 내면적 삶>(T 306)의 묘사로 이해한다.
  이런 맥락에서 꿈과 같은 서술이 카프카 문학의 공식으로 볼 수 있다. 카프카가 언급하는 모든 것은 정신적인 의미로 수렴된다. 형상들의 상호 연관성 상실, 주인공들의 불확실한 전망, 불안의 기본 정서, 꿈과 현실의 결합에서 카프카와 초현실주의자들 사이의 유사성이 나타난다. 예컨대 현대 회화의 연상(聯想) 묘사, 몽환적 환상 등이 상기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카프카에 의해서 묘사된 현실은 꿈 속처럼 비현실적이며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다. 카프카는 자신의 이야기가 <형상들>일 뿐이며, 이 형상은 <바라봄>이 아닌 <눈감음>의 결과라고 말했다.(G 51 f.) 이 눈감음은 외부 현실 세계의 사실적인 묘사를 포기하고 현실적인 사건들을 꿈같이 비현실화 시킨다.
  따라서 인습적인 시간 개념의 상실, 재빠른 공간 변화, 원근의 급박한 뒤바뀜, 순간적인 등장인물들의 배열, 감각적으로 불가능한 시점 인식의 변화, 모든 사건들의 뒤엉클어짐 등에서 우리는 꿈의 기교로서 몽환과 같은 내면 세계를 표출하려는 카프카의 의도를 직감할 수 있다. 카프카는 고정되고 인습적인 삶에 얽매인 관념의 세계로부터 탈피하여 보다 포괄적인 인식을 위한 불가결한 <거리>를 창출해 내기 위하여 세상의 잡다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요구한 것이다.
(중략)
  그러나 카프카 특유의 방식인 꿈같은 초자연적 현상은 작품의 끝까지 재전환이나 해명되지 않아 독자를 혼란 속에 빠뜨린다. 카프카가 쓴 내용은 끊임없이 의문만 제기시키는 것이다. 카프카의 서술자가 묘사한 것이 자체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이유는 항상 발생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을 상대했기 때문이다.(Vgl. Hartmut Binder, Motiv und Gestalrung bei Franz Kafka, Bonn, 1966, S. 360.) 대체로 처음에 꿈같이 낯선 상황이 묘사되어 독자는 이에 대한 해명을 기대하며 계속 읽어가지만 후속되는 대목에서도 앞서의 내용에 대한 설명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미국에 빠져들어 독자는 논리적 연결을 위해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보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에 따라 인물들이 자아의 분열로 말미암아 출구 부재의 허구 공간에서 자체내의회전 운동을 하는 텍스트의 구조는 독자들에게 불가능한 논리를 쫓는 원 운동을 강요한다.
  이렇게 꿈의 형태는 분석적 방법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논리적 시각으로 접근해들어가다가 미로에 빠지는 원인 또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혼란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카프카의 개별적인 형상과 서술 자체를 모조리 음미 검토하여 작품의 우주적인 뜻을 이해해야만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카프카의 소설은 느낌으로서 공유체험으로 먼저 접근해야 한다. 분석적 시각으로서가 아닌, 종합적 이미지로 파악되면 카프카의 소설이 안고 있는 난해한 다의성이 일원론적 세계관으로 드러난다. 즉 카프카의 작품을 느낌으로서 공유 체험으로 접근하면 작품의 몽환적 내용이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예를 들어 사람이 동물로 변하는 모티프로 시작되는 「변신」의 이상한 특징은 꿈같은 현상에 대한 사실적 차원의 해석이다. 「변신」에서 그레고르의 변신도 분석적 시각이 아닌 종합적 이미지로 파악되면 서술자에게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부득이한 자연 현상으로 수용된다. 심지어 작품을 읽어 가노라면 독자도 서술자와 동일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Vgl. Benno von Wiese, Die deutsche Novelle, Von Goethe bis Kafka, Interpretationen II, Düsseldorf, 1962, S. 322.) 이는 카프카의 불확실성이 확실성으로 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변신의 사건은 매우 중대하기는 하지만 인간이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이 유효하게 되는 것이다.
  나겔은 작품의 내용이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쓰여져서 독자는 자기 눈앞에 전개되는 사실이 있을 수 있는 일인지, 혹은 있을 수 없는 꿈인지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으며, 결국에 가서는 처음에 도저히 믿어지지 않던 꿈같은 사실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바로 카프카 작품의 특징이라고 말했다.(Bert Nagel, Franz Kafka, Aspekte zur Interpretation und Wertung, Berlin, 1974, S. 89.) 따라서 그레고르가 갑충으로 변신하여 잠에서 깨어나는 것보다 그것에서 아무런 놀라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기괴한 일상성>이 발생한다. 놀라운 대상이나 사건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거나 당혹케 하지 않고 그것들을 정상적인 것처럼 아무런 동요 없이 천진무구(天眞無垢)하게 서술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카프카의 소설에서는 환상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가 서술상의 특수한 관점에 의하여 결합하게 된다. 독자는 <불신의 유예(猶預)>나 <잠정적인 불신의 지양>(Erich Heller, Franz Kafka, München, 1976, S. 69.)을 거듭하면서 카프카의 작품을 <읽고, 경악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다.>(Bert Nagel, Franz Kafka, Aspekte zur Interpretation und Wertung, Berlin,1974, S, 11.) 경악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상반된 감정은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높여준다.(김용익, 『프란츠 카프카 연구』, 삼영사, 1984, 9면.)
(생략)


2)꿈같은 초현실적 작품
  카프카의 작품들은 우리들을 꿈같은 세계 속으로 불러들인다. 이 꿈같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나 사건은 시간과 공간으로 규정된 현상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져 시간과 공간, 원인과 결과와 같은 경험적 질서는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카프카의 작품 세계의 <시도 동기>는 꿈의 원리와 꿈의 구조로, 즉 <정신적인 것을 투사하고 주관적인 것을 구상화시키는 문체 의지와 형식 의지> (Walter H. Sokel, Franz Kafka, Tragik und Ironie, Frankfurt/M., 1976, S. 10.)로 표출된다.
  <어느 아침 어수선한 꿈에서 깨어, 자기가 한 마리의 거대한 갑충으로 변신하여 침대 위에 누워 있음을 발견한다>(E 57)는 시작 부분처럼 「변신」은 <어수선한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시작된다. 이러한 시작 부분과 마찬가지로 「변신」의 마지막 부분, 즉 그레고르가 죽은 후에 계속해서 서술된 에필로그에서도 갑충으로의 변신이 꿈의 세계를 대변하고 있다. 동일 시점적 소설이 중심 인물이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그의 시각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하나의 꿈에서 또 다른 국면의 꿈으로 변전되는 것이다. 이렇게 카프카의 기법은 인간을 기상천외의 갑충의 모습을 변신킴으로써 꿈과 같은 초현실의 세계를 일상적인 현실 세계에 대치시킨다.
  흔히 카프카의 소설을 난해하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환상적인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진지하게 다뤄지기 때문이다. 「변신」에서도 사람의 형태를 가진 생물이 하급 곤충으로 변하고도 역시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지속하고 있다. 사람이 별안간 벌레로 변해도 정신 기능을 잃지 않고 있음이 사실이라면 그 사실은 인과성을 벗어난 것으로서 그 이유를 꿈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레고르는 이미 변신했으면서도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다. 그는 인간으로서 자기 속에 숨겨진, 보다 높은 곳에 이르려는 인간적인 충돌을 발견하면서 현실과 꿈같은 세계를 끊임없이 내왕하는 이중의 역을 하고 있다. 즉 그는 완전히 자기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자기 밖 꿈속에 있는 이중의 실존 상태에 있다. 사고와 존재를 일치시키는 상황이 조성되어 현실과 꿈같은 상황이 융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꿈같은 사건이 점차 진짜 현실로 하나씩 입증되는 사실이 카프카 문학의 특징이다. 「변신」의 첫 구절의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E 57)라는 주인공의 꿈에 잠긴 듯한 독백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실제의 현실로 전개된다. 꿈같은 방식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자연적인 양상을 띠게되는 것이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변신을 이상하지만 있을 수 있다고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생각을 집중한 결과 모든 망설임과 불확실성은 사라진다. 카프카는 묘사의 정밀성으로 꿈같은 것을 현실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카프카 문학에서 꿈같으면서도 줄거리는 매우 현실에 근거하여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 카프카 자신도 「화부」를 <어떤 꿈에 대한 회상>(G 53)으로 그리고 「변신」을 <표상이 배후로 물러나 있는 현실을 드러내는 꿈>(G 55)으로 보고 있다. 또 카프카는 「변신」과 관련하여 <꿈은 심상이 숨겨져 있는 현실을 드러낸다. 이것은 삶의 끔찍스러움이며 예술은 충격적인 성격이다>(G 55 f.)라고 말한 바 있다. 카프카는 야노우흐와의 대담에서 <변신은 무서운 꿈입니다. 소름이 끼치는 표상입니다. 꿈은 현실을 폭로하는데, 그 현실의 배후에는 표상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공포입니다. 예술이 주는 충격이지요>(G 55 f.)라고 말하고, 이어서 <변신은 결코 나의 고백은 아닙니다. - 어느 의미에서는 - 비밀 누설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겁니다. 물론 암호 따위는 아닙니다. 그저 그것뿐입니다>(G 55) 라고 말하고 있다.
(생략)


5.실존주의적 개념
1)존재를 위한 문학
(생략)
  실존주의적 방법은 전후 실존주의 사상적 경향과 더불어 키르케고르의 영향과 베르그송, 후설의 철학 사상을 발판으로 하여 독일에서는 신화, 환상, 꿈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현실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밝히려는 데서 대두되었다. 실존주의는 존재와 실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과 인간이 이 세계에 어떻게 존재하며 무엇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일상의 현실로 복귀함으로써 그 해답을 얻으려는 철학의 한 방향이다.  따라서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가 실존주의의 첫 번째 전형적인 문제로 나타난다.  실존주의의 또 다른 측면은 존재의 부조리성이다. 욕망하는 정신과 실망만 안겨 주는 세계 사이의 절연, 통일에의 향수, 지리멸렬의 우주 그리고 그 양자를 한데 비끄러 매놓은 모순이 바로 부조리이다. 실존주의자들은 표현주의 시대에서 성립된 카프카의 작품에서 실존의 문제가 예증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실존주의는 실존의 관계 상실과 결속 상실을 주장한다. 인간이 발견한 세계에는 자연 법칙이 있을지언정 보편타당성을 지닌 인간적 법칙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기존의 행동 법칙에서 볼 때나 스스로가 설정한 일의 선택에서도 그러하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을 위하여 <구상>한다. 이러한 구상은 누구에게나 자유롭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결을 받은 이유는 그가 그 자신을 창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유롭지 못한데 그 까닭은 일단 세계에 던져진 그는 자기가 행하는 모든 것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니므로 존재에 책임이 없다. 즉 이 세상에 원해서 태어나지 않았고 또 원해서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허무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존재>이다.
  실존주의 내용대로 카프카 작품의 주인공들은 허무 속으로 내동댕이쳐져 있다. (중략)
  중편 「변신」에서도 주인공 그레고르가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보니 자신이 커다란 갑충으로 변신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변신」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본질적으로 변해 버린 부조리의 주인공들에게는 삶이 고역일 수밖에 없다. 그레고르는 부친이 던진 사과가 등에 박히는 중상을 입고 사랑하는 여동생이 밖에서 잠가 버린 방 안에서 죽는다. 그레고르는 죽고자 하는 의도가 없어도 세상에 의해 허무 속으로 내동댕이쳐져 불가항력적으로 죽임을 당한다. 그것은 그가 대결하고 있는 부조리한 운명이다.
  이렇게 카프카가 그리는 세계는 실존과 결속을 상실한 부조리한 세계로 나타난다. 인간은 예기치 못한 완전히 변화된 현실과 대립하고 새로운 상황에 의해 고통을 당한다. 결국 문학 작품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들 주인공들이 당하는 부조리한 사건은 실제로 우리 모두에게 닥치는 상황이다. (생략)


제4장 카프카 문학의 소외 개념
2. 이념적 배경
1) 카프카의 이데올로기적 분석
(생략)
  카프카는 사회주의 경향의 <클럽 믈라디취>와 노동자 계급에 대항한 정치 경제적 억압에 대항하여 투쟁한 정치 단체 <빌렘 쾨르버>의 집회에도 참가했다. 클럽 믈라디취는 <자유학교>의 설립자인 프란시스코 페러의 처형에 반대하는 집회를 개최하였다. 카프카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카차라는 사람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카프카는 1909년 10월 13일에 있었던 이 시위에 참가했다. <군국주의와 애국심>이라는 주제로 모임을 개최한 후 이 클럽은 반군국주의와 기타 반국가적인 이념을 유포했다는 이유로 프라하 총독령에 의거하여 해체되었다.
  카프카는 야노우흐에게 <자본주의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상부에서 하부로, 하부에서 상부로 향하는 종속 체계이다. 모든 것이 종속적이며 얽매어 있다. 자본주의는 세계와 영혼을 지배하는 상태다>(G 102)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비판이 카프카의 작품에 자주 반영되고 있다.
  카프카는 작품 「변신」에서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신한 주인공의 개인적인 삶을 통해 다가오는 후기 자본주의의 물신화되고 기능화 된 인간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그레고르는 가족 구조 내에서 뿐만 아니라 산업 경영 구조 내에서도 오직 그의 기능 역할로 필요한 존재가 된다. 그는 절대로 인격으로서 필수적이 아니라 일정한 기능의 수행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는 후에 <도대체 아침에 두서너 시간만 일을 하지 않아도 양심의 가책을 받아 멍하게 되어서 곧 침대에서 빠져 나오게 되고 마는 그런 충실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E 62 f.) 하고 의문을 표시한다. 자신의 기능 역할을 수행해야만 비로소 사회적 유기체의 건강이 가능해지는데 이는 가족과 경영에 대한 <효용성>을 의미하며, 이런 경우 자신의 인격은 병들게 되는 것이다.(Vgl. Wilhelm Bernsdorf, Wörterbuch der Soziologie, Frankfurt/M., 1972, S. 836.)
(생략) 


3. 주체의 객체화
  마르크스에 의하면 개인의 사회적 역할은 물질의 관계로 규정된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은 소비 형태의 관점에서 파악되고, 이 소비 형태가 그 신분을 결정한다. 이렇게 인간이 소비 형태로 파악되는 내용이 카프카 작품에 자주 암시된다. 예를들어 「양동이를 탄 사나이」에서 여자 석탄 장수는 곧장 값을 지불할 수 없는 고객에게 <아무것도 아니에요>(B 92) 혹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B 93)라고 말한다. 고객은 인간적인 관계에 기초해야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즉시 지불이냐 아니면 사후 지불이냐 하는 지불 방식에 따라 고객 접대의 기준이 결정되므로 곧장 가격을 지불하지 못하는 옛 고객은 석탄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작별>(B 94)로 사라져 버린다. 「양동이를 탄 사나이」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객체에 대한 인간의 사물화를 볼 수 있다.(Joachim Isreal, Der Begriff Entfremdung, Reinbeck bei Hamburg, 1972, S. 380.) 즉 인간의 관계는 오직 객체의 교환 가치를 통해서 결정되고 있음을 본다. 이 작품에서는 <사물 숭배> 때문에 옛 고객에 대한 인간적 관계가 무시되어 버린다.(한석종, 「카프카의 난해성과 그 구성 요소」, 『카프카 연구』, 범우사 1984, 47면.)
  이러한 인간의 사물화가 「변신」의 에필로그에 해당되는 그레고르의 사후에 보인 가족들의 태도에서 정점으로 나타난다. 갑충으로 변신한 후 처음 얼마 동안은 가계 수입에 공헌하는 인간의 흔적을 아직도 느껴서인지 가족들은 그레고르를 계속 인간으로 취급한다. 인간 그레고르와 갑충으로서의 존재 사이에는 그 어떤 상응점이 있어 실질적으로는 그 어떤 변신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변신 이전과 이후의 생활은 너무나 일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레고르는 5년이나 직장에 근무하는 동안 한 번도 병을 앓아 본 적이 없고, 아침 기차 시간에 지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회사로부터 신임도가 높았다. 매일같이 여행을 해야 하고, 기차 연결에 대한 걱정, 불규칙하고 좋지 못한 식사, 언제나 바뀌는 고객들과 사무적인 교제를 해야 하는 등 너무나도 증오스러운 외판원 생활은 자신의 경제적 노력 없이는 도저히 살아 나갈 수 없는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계속되어야 했다.
  이렇게 그레고르는 세일즈라는 직업이 싫지만 가족 부양을 위해 온갖 희생을 다해 온 것처럼 앞으로도 자신의 회사 사장에게 싫지만 가족 부양을 위해 온갖 희생을 다해 온 것처럼 앞으로도 자신의 회사 사장에게 부친이 진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아마 5~6년은 더 그 노릇을 해야한다. <나는 내 부모 때문만이 아니라면 벌써 오래전에 해약을 하고 회사를 그만 두엇을 것이다. 나는 사장 앞으로 걸어가서 솔직하게 나의 생각을 말했을 것이다. 그러면 사장은 책상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졌을 것이 틀림없어.>(E 58)
  (중략) 의무와 혐오감, 이 양자의 어느 것도 자의로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레고르는 자신의 실체가 은폐되는 벌레로 변신한다.
  그레고르가 갑충으로 변한 이후 그의 가족에 대한 헌신은 망각되고 계속 (가계 재정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동물로 조재하자 마침내 가족들은 짜증을 느껴 그를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하게 된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그가 죽자 가족들은 벌레와 그레고르를 동일시할 것인가를 놓고 곤혹해 하던 갈등을 버리고 벌레로 죽은 그레고르의 시체를 단순한 사물로 간주한다. 시중드는 할멈이 옆방에 있는 <물건>(E 106)을 치워 버릴 걱정은 말라고 하며 집을 떠났을 때 가족 가운데 어느 누구도 섭섭하다는 눈치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그레고르 자신으로 볼 때는 벌레가 되어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완전히 무의미한 작업 생활의 실체, 인간적 따뜻함의 결여를 보게 되어 메마른 일상생활 그리고 특히 자신의 육체와 욕구로부터 철저히 소외된다.
  심지어 「변신」에서는 순수 예술도 기업 세계의 결정체인 상품화, 즉 사물화에 좌우된다. 그레고르는 비록 생계 유지를 위해 자신의 내면 생활을 포기하더라도 여동생만은 아무런 걱정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에 정력을 쏟도록 하고 싶었고, 이러한 뜻은 곧 그레고르의 유일한 정신적 힘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레고르가 아끼던 여동생의 음악성은 어느 날 저녁, 그의 부모가 하숙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간소한 연주회를 베풂으로써 상품으로, 오락으로 전락된다. 딸의 연주회를 마련하는 부모의 행위는 딸의 음악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음악이라는 수단을 통해 딸을 혹사하고 착취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그 음악을 감상하는 하숙인들은 음악에 심취하여, 음악성의 깊이를 추구하기 보다는 호기심으로 식사 후의 무료와 권태를 달래며, 또한 경제력으로 그레고르의 가정을 지배하는 권력 의식을 충족시킨다.
  「변신」에서처럼 인간에서 벌레를 거쳐 하나의 사물로 이어지는 한 인간의 운명은 사회주의에서 인간의 사물화로 암시된다. 이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에 의하면 상품의 경제적 품질이 아니라 교환 가치에 의해서 개인의 사회적 지위가 상징되고 그다음에 인간의 물질화가 시작된다고 한다.
  (중략) 카프카 작품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의지에 어긋난 일방적이고 기능적인 직업속에 머물고 있다. 직접성과 전문성에 수렴(收斂)된 직업은 개인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무의미한 일로 느껴질 수박에 없다. 따라서 「변신」에서 그레고르는 이러한 직업에 대한 처지를 저주하면서 <악마여, 이 모두를 쓸어가 버려라!>(E 58)라고 외친다. 개인은 거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손에 조종당해 사물화되면서 자신의 결정이 환상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물질적인 발달만을 추구한 나머지 인간을 비참 속으로 몰아넣는 산업 사회의 능률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해서 카프카는 다음과 같이 극단적인 공격을 하고 있다. <산업에 있어서의 테일러 시스템과 분업은 끔찍스럽다. 거기에는 인간의 노예화 이상의 것이 들어있다. [......] 모든 창조의 가장 숭고하고 가장 범해서는 안되는 부분, 즉 시간이 불순한 기업적 이해(利害)의 그물 속에 빠져 버리게 된다. [......] 이처럼 심하게 능률화된 삶이란, 바라던 부와 이득 대신에 굶주림과 비참만이 자라날 수 있는 소름끼치는 저주로 가득 차게 된다. [......] 인간은 생물이라기보다 오히려 사물, 물건인 것이다.>(G 105)
  (중략)
  이런 식으로 카프카의 세계에서 기계화된 산업 사회에서의 천재성은 상실되고 모두가 일반화된 현대 인간의 처지가 된다. (중략)
  결국 산업 사회에서 개개인을 평가하는 규준은 천재성 등 인격이 아니라 이용가능성, 즉 기능적 업적 등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실존적 가치를 지녀야 할 어느 개체가 자신에 대응하는 집단 혹은 전체에 대해 소기의 값어치를 지니지 못할 때 그 개체의 배제가 현대 사회의 통념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개인적으로 천재성보다는 기능적인 직업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사회는 기술 진보 이외의 다른 생활 목적을 알지 못하고 이데올로기, 즉 마르크시즘, 파시즘, 종교 정신 등을 이용하여 인간을 동화시킨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사회, 즉 마르크시즘, 파시즘, 종교 정신 등에 의한 인간 동화의 결과는 인간의 착취이다.  (중략)
  카프카의 「변신」에 이러한 사상이 잘 암시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그레고르는 스스로의 가족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회사와 가정의 톱니바퀴가 되려고 영혼을 희생적으로 직장에 팔아 버린다. 「변신」에서 지배인은 아주 경멸적인 언사로 회사의 피고용인이 점점 능률이 떨어지면서 쓸모없이 되어 가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이때가 실은 대단한 이익을 남기는 시기는 못 된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을 하기는 하네. 그러나 잠자 군, 전혀 이익을 남기지 못하는 시기란 없는 것이며, 또 있어서도 안 되네.>(E 65) 이 진술에서 지배인이 그레고르의 직업적 처지를 혹독히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레고르의 판매고는 떨어지고 있어서 회사에서의 그의 처지가 위태롭다.
  그레고르는 엄청난 업무량, 진실되지 못한 대인 관계 등 직업에 대한 많은 불만에도 불구하고 5년 동안 성실히 일해 왔으므로 직장에서 자기 위치는 확고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레고르가 변신한 수 업무적 수단으로서의 이용 가치를 잃게 되자 나오는 회사 지배인의 태도는, 개인과 직업 사회는 상호간에 유용한 경제 수단으로서만 관계를 맺고 있음을 드러낸다. 선량하고 사심 없는 행동은 기업 세계의 눈에는 악하게 비쳐지는 것이다. 지배인의 언급에서 카프카는 거의 냉소적으로 인간이 얼마나 철저하게 시민 사회의 엄격한 기능주의와 노동 이데올로기에 얽혀있는 가를 보여준다. 고용주는 피고용인에게 직접적이고 외부적인 권력을 통해서 피고용인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둔다. 그 때문에 그들 피고용인은 <외적 권력의 연관 속에서 변형된 정신에 의해 간접적으로 지배된다. 즉 외적 제재가 내적 통제로 대치되는 결과를 초래한다.>(Wilhelm Arnold, Hans Eysenek, Richard Meili, Lexikon der Psychologie, Bd. 3, Freiburg, Basel, Wien, 1972, S. 376.) 달리 표현하면 기업 세계가 개적인 삶 속으로 침입하게 된 것이다.
  「변신」에서 인간이 직업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상황이 그레고르의 부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는 한 은행의 말단 수위직을 얻고난 후 가장(家長)으로서의 태도보다는 오히려 수위 직책이 가정에서도 그에게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심지어 부친은 잠을 자면서까지 제복을 벗으려 하지 않으며 상관이 부를 때는 언제나 뛰어나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가족이나 그레고르에 대해서만은 이성을 잃고 지배자가 되려 한다. 이러한 직업 사회화 때문에 그레고르 가족에게 개인적 삶이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생략)


4. 개인과 조직의 대립
(생략) 카프카 문학에서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목표의 제한이냐 아니면 조직으로서의 개혁이냐의 어려운 선택이 제시된다. 그런데 사회의 발전은 오직 조직이나 집단을 이루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그 사회에서 개인은 이탈되어 말살되고 있다.
  결국 카프카의 작품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망각되고 상실된 생의 의미를 새로이 모색하려는 시도로서 허위적인 사회 질서, 법의 질서, 종교 질서에 대한 풍자 이상의 힘을 소유한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모색을 시도한 결과 토지 측량사 K 등 주인공들은 좌절만 당할 뿐이다.(김용익, 『프란츠 카프카 연구』, 삼영사, 1984, 88면.)
  이러한 좌절의 체험이 특히 <카프카에스크>란 단어에 잘 암시되어 있다. 카프카에스크는 전율, 불안, 소외, 좌절을 나타내는 표제어이다. 이것은 불투명하고 의미 엇는 운명에 어쩔 수 없이 내맡겨져 있는 상태에 대한 상념이며, 테러, 죄, 절망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무가치함과 무력함을 느끼게 하는 관료주의 조직 및 익명의 권력 구조에 의한 위협을 상기시킨다. (중략)
  현대의 유행어가 된 <카프카에스크>란 단어가 온갖 악몽.미망(迷妄).유령적인 것, 인간의 사고와 행동과 꿈의 부조리, 그리고 현대의 관료주의 메커니즘, 인간을 노예화하는 제도의 부조리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문학의 본질을 가늠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카프카에스크는 물론 우리 인식의 전형으로 카프카 작품에서는 주로 조직에 의한 개체 상실의 상념으로 묘사되고 있다.
  예를 들어 「변신」에서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었을 때 자신이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E 57)는 작품 처음의 문장처럼 젊은 외판원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서 벌레로의 <변신>은 집단에 제대로 융화되지 못한 사람이 느끼는 소외감을 의미한다. <소외>의 근본적인 의미는 <이질성(異質性)>에 있으며,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억압하고 죄어 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다르게 갑충이 된 그레고르는 고립된 상황에 수동적으로 지배를 당하는 처지가 된다.
  그레고르는 여러 차례 가족 공동 사회의 영역에 도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결코 <만남>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갈 것을 강요받으며, 그때마다 상처를 입는다. 따라서 한 개인이 동물로 변신하는 상상을 하거나 그 상상이 현실로 나타나는 상태는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자신이 소속되기를 원하는 공동체로부터 소외를 반영하는 것이다. 엠리히는 이러한 그레고르의 실존 상황을 가리쳐 <이 벌레의 가상적 환상적 비실재성은 바로 그레고르의 의식 속에 숨은 자아의 실제가 현실 생활에 침투된 현상으로 써 그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최고의 실재성>이라고 했는데, 이는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내용과 유사하다.
  카뮈의 시지프는 자신의 불행을 의식으로써 극복해 나간다. 즉 그의 시지프는 불가해한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분명한 의식으로 항거하며, 그 운명을 대범하게 무시함으로써 극복한다. 카프카도 임의적 행위에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 지각을 잃은 - 대담한 것을 결단력 있게 지속시킨다.(W. Emrich, Kafka und der literarische Nihilismus, 119, in: Maria L. Caputo-Mayr(Hg.), Franz Kafka, Karmstadt, 1978, S. 115.) 그러나 이렇게 주인공이 강한 의식으로 자신의 상황을 개척할 만큼 그는 고립에 빠져들게 된다. 결국 카프카의 인물들은 현실의 고립에 대해 맹목적인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5. 세계 상실의 비극
1) 가정에서 소외
  삶의 가장 본질적인 단위는 가정이다. 외부에서의 갈등을 풀 수 있는 가장 본질적 장소가 가정인 것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소외는 먼저 가정 생활에서 파생되어 역설적이다. 사회가 가정으로 침투할 때 가정에서도 지속적인 진실한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사회처럼 가족에서도 금전이 개재되어야 행복이 수반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생계비라는 명목으로 벌어 들인 돈을 탁자 위에 놓을 때마다 고마운 마음으로 가족들은 돈을 받을 수 있었고 그레고르도 이에 대한 기쁨으로 돈을 내놓았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가족들이나 그레고르는 익숙해져 그것을 예사로 생각해 버리고, 그렇다고 서로 각별히 따듯한 마음이 오고 가지도 않는다. 오직 여동생만이 아직도 그레고르와 친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결론적으로 가정에서 어느 개체의 실존적 가치란 전체, 다시 말해서 전 가족에 대한 부양 의무를 충실히 지킬 때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그레고르는 가족의 부양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을 때 전 가족의 환심을 샀지만 갑충으로 변신된 뒤에는 이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즉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모해 버린 뒤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노동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의 부모와 여동생도 이미 그레고르의 실제 가족이 아니다. 결국 그레고르의 존재는 단지 가정을 위한 것이었고, 가족들에게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명종 쪽을 바라보았다. 6시 30분이었다. [......] 다음 기차는 7기에 출발한다.>(E 58 f.)라는 내용이 보여 주듯이 그레고르의 생활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직업 생활로 철저히 짜여 있었다. 그러다가 몽매간에 돌아온 영혼, 즉 본래의 자기 자신이 가족의 생활을 위협하는 갑충이라는 엽기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자 그는 가정에서도 소외된다.
  그레고르를 다시 인간으로 변신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모티프는 아마도 가족의 관심일 것이다. 그러나 가족은 그를 철저히 외면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레고르의 방에서 물건을 치우는 장면에서 단적으로 예시된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가 방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는 것을 발견한 여동생은 어머니를 동원해 그레고르의 방에서 물건을 치우려고 한다. 물론 외견상으로는 그레고르가 자유로이 방을 기어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고 주장하지만, 그레고르를 기억나게 하는 옷장과 책상을 치우는 것을 그의 과거의 주체성, 즉 가족의 일원으로서 아들과 오빠로서의 주체성을 부인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오직 어머니만이 그레고르의 방에서 그를 연상시키는 옷장을 치우려는 딸에게 가구를 치워버린다는 것이 <그레고르의 회복에 대한 모든 희망>(E 84)을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방을 예전 그대로 놓아 두자고 제안한다. 그래야만 그레고르가 다시 가족의 일원인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 갑충으로서의 과거를 쉽게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어머니가 그레고르의 회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음이 드러나지만, 그것은 어떤 실천적 행동도 수반하지 않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희망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가정에 얽매이다가 벌레로 변해 버린 그레고르의 고뇌는 자기 신앙에 일어난 육체적인 변화보다도 먼저 생계 부양자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된, 이른바 한 가정에 예속된 윤리적인 실존자로서의 죄의식이다. 그에게 주어진 이러한 죄의식은 무엇보다 자기 한 사람을 오인해서 지금까지 환희와 행복에 차 있던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온다. 이렇게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감이 몸에 밴 그레고르는 빨리 갑충의 벌레에서 벗어나 출근해야겠다는 생각에 다급하지만, 가족은 오히려 그가 변신한 상황에 차츰 적응하며 자구책을 마련해 간다. 그러므로 더 이상 돈을 벌어 오지 못하는 <벌레>가 된 그가 생활에 불편까지 주게 되자 가족들은 그를 죽이려 든다. 결국 그레고르는 부친이 던진 사과가 등에 박히는 중상을 입고 사랑하는 동생이 밖에서 잠가 버린 방 안에서 죽는다.
  가족은 거대한 곤충으로 변한 그레고르를 방에 가두고, 그의 외양을 견디지 못하고 악의를 두려워한 결과 그의 죽음에 기쁨의 기색까지 나타낸다. 말라 비틀어진 갑충의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처럼 빗자루로 쓸어버리고 부친은 비정하게도 비애가 아니라 해방과 구제의 안도감이 곁들인 십자(十字)를 그은 다음 가족들과 더불어 이른 봄날의 햇빛을 받으면서 교외로 소풍을 가며 그동안 몰라보게 성숙한 딸의 새로운 삶에 희망을 건다.
  여기서부터 무수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린다. 사회학적 관점에선 시민 가족 이데올로기가 허상이라는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 소설이 밝혀 주는 무서운 진실은 가장 아름답고 애정어린 인간 관계가 미망(迷妄)에 근거한 것이라는 통찰이다>(W. Emrich, Franz Kafka, Frankfurt/M., 1957, S. 122.)는 엠리히의 말처럼 그레고르의 변신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보여 준 가족들의 태도는 현대의 가족 사회에 진정한 애정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개인은 결국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아서 산업 사회에서 극한의 소외 상황에 놓인다. 기계의 한 부품처럼 되어 버린 개인이 벌레같이 느껴지는 감정을 「변신」은 아예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해버린 인간이 결국 비참하게 죽는 모습으로 덤덤하게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변신」에서 독자는 작품의 전개를 따라가는 동안 주인공 그레고르가 한 마리의 갑충이 될 수밖에 없는 참담한 상황을 스스로 읽어 내게 된다.
  이렇게 그레고르의 가족이 그를 버리는 내용에서 변신이 되면 주체성이 상실되어 같은 가족이나 종족도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는 오랜 병을 앓다가 죽은 아들의 유골을 화장하고 온 직후에 맛있는 음식을 찾고 내일 걱정하는 오늘날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레고르의 죽음은 고통스런 슬픔이 아니라 오히려 무거운 짐으로부터 가족을 해방시킨 것이다.
 

제6장 카프카 문학의 신화적 분석
3. 작품의 신화적 분석
3) 동물의 인간으로 변신
  「변신」에서 그레고르처럼 인간이 동물로 변신하는 것을 <격하 변신>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동물로의 변신은 가치 하락이나 치욕스런 비인간성으로 생각되어 발전사(發展史)에서 비인간적으로 좋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개념에서 동물은 예속되는 존재로 여겨져, 인간의 동물로의 변신은 엄청난 불명예로 생각되는 것이다. 민담의 기념비적인 상징성을 저술한 바이트와 프란츠는 동물로의 변신을 <동물 단계로의 역행>이라고 부르거나 <인간이 더욱더 무의식으로 되돌아감, 즉 인간 개성으의 필요한 무의식>으로 해석했다.(Max Lüthi, So leben sie noch heute, Betrachtungen sum Bolksmärchen, 2. Aufl, Gttingen, 1976, S. 51.)
  (중략) 동물로의 변신이 가치 하락으로 여겨지므로, 여기에서 구원의 염원인 인간으로의 변신이 요구된다. 카프카 작품에서 동물로 치환(置換)된 주인공들은 고전적인 우화나 낭만주의 동화의 그것들과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이들 우화나 동화에서 동물 주인공은 일종의 인간으로 이해되며 위기가 극복되면 다시 인간으로 바뀐다. 여기에서 동물들은 위험한 일에 직면한 어린 아이들을 도와 구원한다. 이것은 그림 동화에서 동물들이 젊은 왕자들 혹은 바보들이 위험한 시험과 모험을 극복하도록 도와주거나, 그들을 위해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 주는 것과 동일하다. 이렇게 우화나 동화에서 동물로 변신된 주인공이 위기 등이 극복되면 다시 인간으로 되는 만면, 카프카의 변신된 동물은 사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어 그 이상 인간 회복이 불가능하다. 일종의 <인간은 사물이 된다>는 명제의 출발로 격하 변신이 되는 것이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동물로 변신된 주인공이 다시 인간으로 변신 되는 내용은 희망으로만 전개될 뿐이다. 예를 들어 「변신」에서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가 방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는 것을 발견한 여동생은 어머니를 동원해 그레고르의 방에서 물건을 치우려고 한다. 물론 외견상으로는 그레고르가 자유로이 방을 기어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고 주장하지만, 그레고르를 기억나게 하는 옷장과 책상을 치우는 것은 그의 과거의 주체성, 즉 가족의 일원으로서 아들과 오빠로서의 주체성을 부인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레고르의 방에서 그를 연상시키는 옷장을 치우려는 딸에게 가구를 치워 버린다는 것이 <그레고르의 (인간으로의) 회복에 대한 모든 희망>(E 84)을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방을 예전 그대로 놓아 두자고 제안한다. 그래야만 그레고르가 다시 가족의 일원인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 갑충으로서의 과거를 쉽게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렇게 어머니는 그레고르의 인간으로 변신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희망일 뿐이지 카프카 작품에서 실제로 인간에서 동물로 된 존재가 다시 인간으로의 변신되는 일은 없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윤리적 존재>다. 중요한 것은 <동물처럼 번식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영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존재하느냐>이다. 살아 있는 한 인간은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지나칠 수 없다. 따라서 가치 하락적 동물은 인간으로 변신은 격상 변신이라고 불린다.
(생략)


4) 창조적 해방
  카프카 작품에서 인간이 동물로 되거나 동물이 인간이 되는 신화적 기능은 미학적 유희의 가능성으로 현실에 대한 압력으로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카프카가 볼 때 세상에는 미학적 요소가 끊임없이 작용한다. 그러나 의미 부여로 생긴 미학적 거리감이나 인간이 동물 되기나 동물의 인간 뒤기는 신화적 변신이 <현실적 부담을 경감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쿼드는 공포의 이야기에서 그 공포를 피하는 시도를 한다.(Vgl. Odo Marquard, in: Manfred Fuhrmann(Hg.), Lob des Polytheismus, Über Monomythie und Polymythie, S. 107 f. in: Ders., Abschied vom Prinzipiellen, Stuttgart, 1984, S. 528 (Kap. Erste Diskussion: Mythos und Dogma)) 이러한 신화이론은 몇몇 문제성을 제외하고, 특히 마쿼드가 현실의 압박을 덜어 주는 신화의 기능을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의 합리화 전략을 사용한 예(Odo Marquard, a.a.O., S. 91~116.) 외에 카프카에서는 현실의 압박을 덜어 주는 기능이 있다. (중략) 따라서 신화적 기능이라 할 수 있는 카프카의 변신도 한편으로는 현실적 압박을 경감하는 신화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동물이나 인간의 변신은 또 다른 형태의 삶으로 구제를 의미한다. 이러한 변신은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 현실의 압박을 경감시켜주어 현실에 대한 미학적 의미를 지닌다. 신화옹호론자에게 신화는 사고와 표현 형식으로 삶과 행동의 형태라고 케레니는 주장한다. 그에 주장에 의하면 사고와 삶 사이에는 어떤 틈이 있을 수 없다. (Karl Kerényi, Was ist Mythologie? S. 219, in: Ders.(Hg.), Die Eröffnung des Zugangs zum Mythos, ein Lesebuch, Darmstadt, 1982, 212~233.)
  이러한 동기에서 「변신」에서 그레고르의 동물로의 변신은 해방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변신」에서 그레고르의 신화적 변신은 일종의 구원적 모티프를 강하게 암시한다. 어느 날 아침 동물로의 깨어남은 의식의 깨어남, 즉 자기 인식의 행위이다. 모름지기 물질적인 가족 구조가 지니고 있는 힘, 모든 부조리한 인간의 모순된 힘으로부터 재창조되는 것이다.
  출근하기 싫고 그대로 빈둥거리고 싶은 유혹적 소망은 갑충 변신으로 표출되어 실제로 출근을 하지 않게 된다. 직업으로부터 일탈하여 자유로운 자아를 찾고 싶은 소망이 역설적으로 흉물스런 갑충의 변신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변신」에서 그레고르의 갑충으로 변신은 <이른바 인간 세계의 절대적 파기>를 뜻한다. 외판사원 직업에 나름대로 충실몰 그레고르의 벌레로의 변신은 자본주의적 직업 세계에서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정체성에서 해방을 의미한다. 한 집안의 경제적 지주인 선량한 그레고르의 머리에 어느 날 문득 책임을 저버리고 싶다는 저주스런 생각이 번득이고 바로 이때 갑충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엠리히는 카프카의 이렇게 변신된 동물을 인간의 <해방적 자아>(W. Emrich, Franz Kafka, Frankfurt/M., 1960, S. 115.)라고 언급한다. 조켈은 <자아의 분열>이 변신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변신은 결과적으로 가정에 대한 책임과 일과 의무로부터 도피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Walter H. Sokel, Franz Kafka, Tragik und Ironie, Frankfurt/M., 1976, S. 82.)
  이렇게 그레고르는 변신을 통해 가정의 경제적인 억압으로부터 도피하여 그의 변신은 일종의 <자신의 재창조>(R. Lachmann, Erzählte Phantastik, Frankfurt/M., 2002, S. 370.)로도 볼 수 있다. 재창조란 그대로 자신으로 머무는 지속 반복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여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중략)
  그대로 머묾과 반복은 폐쇄적이며 제한되고 갇혀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재창조로 카프카는 이를 변신으로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그레고르처럼 갑충으로 변신하여 파멸이 구원이라는 <역설적 관계>가 성립된다. 죄를 의식하는 자가 가장 구제에 가깝고, 반대로 죄를 의식하지 못하는 자는 언제까지나 현세의 권력에 예속해 있는 것이다. (W. Emrich, Franz Kafka, Frnkfurt/M., 1960, S. 122 f.)
  여기에서 카프카 특유의 역설적 사상을 느낄 수 있다. 즉 신이 창조한 세계에 악이 없었다면 자유가 설 여지가 없는, 선택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계가 되어 버렷을 것이다. 상응하는 악덕이 없다면 미덕을 인식할 수 없으며, 빗나가도록 유혹받지 않는다면 미덕을 수행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신은 선과 악을 구분하고 둘 간에 거리를 두어 우리가 악의 본질과 대비해 보도록 함으로써 선의 본질을 파악케 하였다. 악의 배제는 선을 없애는 것이다. 종교 개혁가 루터는 개혁가답게 <용감하게 죄를 지어라, 그리고 투철하게 회개하라!>고 가르쳤다. 죄를 지을 수 있는 자만이 회개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성 바오로는 그렇게 혹독하게 기독교인을 학대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토록 투철한 신앙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러한 역설적 관계가 카프카 문학의 본질이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사유 과은 어떤 때는 직접적으로 부정에 의해 제거되고, 어떤 때는 그 궤도의 반대 방햐으로 전향을 통해 밀려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놀랄 정도로 전도된 근본 상황에 속한다.>(Gerhart Neumann, Umkehrung und Ablenkung: Franz Kafka, Gleitendes Paradox, in : Richard Brinkmann und Hugo Kuhn(Hg.), Deutsche Bierteljagrsschrift für Literaturwissenschaft und Geistesgeschichte, 42. Jahrgang, Stuttgart, 1968, S. 704.) 이러한 역설적 상황은 <신화의 재난에 무엇으로 대비할 수 있을까? 찾는 사람은 발견하지 못한다. 찾지 않는 사람이 발견하는 법이다>(F. Kafka, Hochzeitsvorbereitungen auf dem Lande. hg. v. Max Brod, Frankfurt/M., 1986.)라는 카프카의 잠언에 신화의 내용으로 잘 나타나 있다.
(생략)


5) 변신에서 인간적 주체성
  민간 동화에서는 어린이들 혹은 연인들이 동물 혹은 사물로 변신을 통해 마녀나 악한 마술사의 추적을 피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들 주인공들은 격하 변신을 의미하지 않으며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명제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는다. 이들에게 가끔 적용되는 <비인간적>이라는 말도 인간의 마음에 도사린 칸트적 야수성(野獸性)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에게서 소외나 이화감(異化感)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카프카의 작품에서도 변신된 동물에서 격하 변신을 느끼지 못하며 <동물도 인간이다>라는 명제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변신」에서 인간인가 하면 인간 아닌 벌레요, 벌레인가 하면 벌레 아닌 인간인 그레고르의 존재는 매우 역설적이다. 변신은 그레고르의 외면에 전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외면은 그를 동물의 자태로 바꿔 놓았으나 그의 내면에는 그 같은 변화가 없다. 그의 내면은 인간의 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의식은 변신 이전의 그와 변신 이후의 그가 동일인임을 알게 한다. 변신한 그레고르는 변신 이전에 겪었던 일들을 회상하고, 또 그것에 기초하여 현재와 미래의 일들을 생각한다. 변신한 자신을 현실적 상황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그레고르는 육체적으로 동물적 존재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인간저인 식사나 쾌락을 거부한다. 반면 정신척인 추구는 여전히 인간적으로 음악에 대한 동경이나 인간의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그레고르가 겉은 동물이고 속은 인간이라는 이중성의 존재인 데서 가족들의 인식도 서로 다르게 발생한다. 그레고르는 너무나 징그럽고 <끔찍한 자태>(E 99)로 변했다. 가족들은 그런 벌레의 자태와 동작을 접할 때, 또 그런 것을 의식할 때 자신들을 그레고르와 동일시 않는다. 따라서 가족들은 그런 벌레의 존재로서의 그레고르와 일치감을 갖지 않고 거리를 갖게 된다. 반면에 가족들은 내면적인 인간적 존재로서는 그레고르와 일치감을 갖고, 그의 입장에 서게 된다. 가족들이 그레고르에 대해서 이렇게 이중적인 입장을 갖게 된 결과, 한편으로는 그레고르에게 공감과 동정을 갖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시각을 벗어나 제3자의 안목에서 그의 이야기를 관찰하고 그 전체의 의미 관계를 파악하게 된다.
  「변신」의 끝 부분에서 여동생 그레테는 그레고르와 동인성(同人性)을 부정한다. 그레고르의 취업이 그의 가족 전체의 생계를 감당한다는 생각에서 그레고르의 인간성이 연상되다가, 약 한 달 동안 직장 활동을 하지 못하는 오빠 치다꺼리에 짜증이 날 대로 난 그레고르의 여동생은 갑충 오빠의 사람 취급을 거절하기 시작하는 태도를 보이며 <저것이 그레고르 오빠란 생각을 버리면 돼요. 저 갑충이 그렇게 오랫동안 오빠인 줄로 믿었던 것이 불행의 씨였어요. 어떻게 저것을 그레고르 오빠라고 믿을 수 있단 말이에요. 만일 저것이 그레고르 오빠라면, 사람들이 이런 동물과 함께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벌써 알아차렸을 게 아니에요>(E 101)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오직 그녀의 이기주의적인 심사(心思)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도 처음에 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갑충 그레고르가 오빠임을 의심치 않았고, 그녀가 태도를 바꾸게 된 마지막에도 갑충 그레고르 오빠의 형태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신한 그레고르는 여전히 인간 의식과 양심을 갖고 직장과 가족의 생계를 염려한다. 그 기괴한 갑충의 생활은 가족들의 일상적 평범성과 병존하여 양자간의 단절에서 불가사의한 교섭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갑충으로 변해서 방안을 기어다니지만 그레고르는 역시 전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인간 그레고르로 자아가 분해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가 존재하고 있는 곳인 <방>의 낱말이 당연히 인간의 사용 공간을 의미함에도 새삼스럽게 <인간의 방>으로 강조된다. 작품의 시작에서 이미 벌레의 몸이 되었지만 그레고르는 죽을 때까지 이 인간의 방에서 지내게 되어 그에 대한 인간의 주체성의 본질에 대한 의심이 없다. 그것은 그레고르의 주체성은 외면적 육체적 형태에 있기 않고 그레고르의 자아라고 불리는 정신력에 있다는 믿음이다.
  따라서 갑충이 되었지만 그레고르는 여느 인간 못지않게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예민하게 느낀다. 그 자신이 벌레로 변한 것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여타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의해서 확인받은 이후 그의 가족들 간의 대화를 통해서 변신 이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가정 경제 상황은 물론 가족들의 일 거수 일 투족을 모두 알게된다. 즉 벌레로 변한 그의 육신과는 대조적으로 정신 세계, 의식 세계는 완전히 인간인 것이다. 그러기에 변신이 됐으면서도 그레고르의 죄의식, 즉 의무감에서 오는 죄책감은 지워지지 못한다.
  따라서 그레고르는 폐쇄된 자기 방에서 벌레가 됐지만 부모와 여동생의 모습을 연연히 그리워하는 인간적인 면을 여전히 지녀, 다시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다정스런 가족의 일원이기를 갈구하면서 온갖 수단을 강구한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자기가 부모나 여동생에게 이런 훌륭한 집에서 살림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는 것을 자랑으러 생각하지만, 이제 그 모든 평화와 행복과 만족이 공포감으로 끝을 맺어야 한단느 생각에 몸서리친다. 벌레로 변신한 자기 처지로 인해서 점점 가세가 기울어지게 되고, 이미 5년 전에 사업에서 실패하여 은퇴한 부친이 다시 어느 은행 수위복을 입어야 하는 궁지도 염려한다. 또 더 이상 바이올린 교습을 받을 수 없게된 여동생을 위해서 그레고르는 서글픈 비애감을 되씹는다. 육체적으로는 벌레지만 정신적으로는 인간의 본질로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레고르는 <어서 일어나야지>(E 58), <어서 기차를 타야 할 텐데>(E 58) 그리고 <전처럼 부모님에게 돈을 가져다 드리고 집안의 평화를 깨뜨리지 말아야 할 텐데>(E 58)라는 논리적인 죄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변신되었으면서도 그레고르의 내심에서 부모와 여동생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자기의 가정을 구하기 위해서 <상반신을 침대 밖으로 끌어 내려고 시도>(E 61)도 해보고 <조심해서 머리를 침대가로 돌려>(E 61) 보다가 여의치 않자 <몸 전체의 균형을 잡고 몸부림을 치면서>(E 61) 방 안에서 <큰소리가 나면 온 집안을 놀라게 하진 않더라도 집안 사람들이 걱정할 것이라고 생각>(E 62)하여 아무도 문조차 열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전력을 다해 침대에서 뛰어내린다.>(E 63) 이렇게 간신히 뛰어내리는 순간에도 그레고르는 회사와 가족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족에 대한 인간애가 예술적으로도 영감을 받는다.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한 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음식이 없어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단식 예술가』의 단식 광대가 경이적인 단식을 하면서 <저는 입에 맞는 맛있는 음식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을 찾아냈다면, 저는 결코 세인의 이목을 끌지 못했을 테고, 당신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배가 부르게 먹었을 것입니다>(E 199 f.)라는 말과 같다. 그러다가 그레고르는 벌레가 된 이후에 자신에게 알맞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음식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육신의 생명 연장을 위한 음식이 아니고 그의 정신이 강렬히 갈망했던 정신적 양식인 예수르 즉 여동생 그레테의 바이올린 연주라는 음아기었다. 즉 그레고르는 하숙생들의 요청에 의하여 우연히 듣게 된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그것이야말로 자기가 찾던 음식이라고 여긴다. 결국 갈망했던 음식을 마침내 찾은 것으로 여긴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잠깐 잊고 방에서 기어나와 인간 세계에 들어가는 것에서 분해되거나 파괴될 수 없는 인간적 본질을 볼 수 있다.
-  음악에 감동되는데도 짐승이란 말인가? 자기도 몰랐던 양식으로의 길이 열리는가 싶었다. 그는 여동생이 있는 데까지 나가려고 결심했다. 그녀의 스커트를 잡아당겨 바이올린을 가지고 자기 방으로 가자고 의사 표시를 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연주에 보담할 자는 자기 말고 이곳에서는 업기 때문이다. 적어도 생존하고 있는 동안 그녀를 방 밖에 내보내지 않으리라. 흉측한 이 모습도 도움이 되겠지. 문 옆에 있다가 침입자에게 덤벼들리라.(E 98 f.)-
  여기에서 동물 변신의 긍정적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동물로 변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여겨져 <격하 변신>이라 불리는 것과 반대로 여기서는 인간이 동물로 변신하는 것이 긍정적 의미를 가져 <격상 변신>으로 되는 것이다. 문제가되는 것은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양식>이다. 동물인 그레고르는 동시에 동물 이상으로 동물 속에 인간적 주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변신은 동물 안에 있는 인간적 존재에 대한 동경을 일깨우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음악은 카프카에게 사실 인간을 모든 지상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다.
  물론 카프카 문학 고유의 애매성 때문인지 그레고르에 미친 음악의 영향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폴리처는 그레고르가 갈망하던 미지의 양식이 음악과 동일한지 그리고 음악 속에서 구원을 발견했는지에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작품에서 우리는 음악 그 자체가 그레고르가 갈망하던 천상의 양식이 아니라 단지 그 양식에 이르는 길에 지나지 않음도 알 수 있다. 여동생이 연주하고 있는 동안 그레고르는 가족과의 화해, 특히 여동생과의 화해를 꿈꾼다. 그러나 갑충을 본 하숙생의 공포에 찬 비명 때문에 그레고르는 이 꿈에서 깨어나고 바이올린 소리는 갑자기 중단된다. 이를 두고볼 때 여기서 음악이라는 수단 때문에 일순간 소음으로 가득찬 세계가 정지되고 보다 나은 세계로의 돌파가 가능한 것으로 보였을 따름이라는 이론도 있다. (Heinz Politzer, Franz Kafka, Der Künstler, Frankfurt/M., 1978, 128 f.)
  그러나 이러한 일부 이론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내용을 종합해 볼 때 결국 그레고르는 여동생 그레테가 연주하는 음악을 통해서 인간으로 동물적 속박 상태를 초월했다고 볼 수 있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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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빌헬름 엠리히, 『카프카를 읽다1』, 유도
-p.176-195

해방하는 자아로서의 동물
단편 「변신」의 갑충
(생략)
  잠자의 운명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그의 변신이 아니라, 이 변신에 접한 모든 인간이 품는 착각이다. 잠자는 변신을 승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곧 옷을 입고 견본을 꾸려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부모와 누이동생은 변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아는 업무 세계에서 뿐 아니라, 가족세계에서도 절대적으로 낯선 것, 중요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감동적인 방법으로 그의 상황을 개선하고, 해충의 모습을 참아내고, 그를 돌보며, 지키고, 그를 안락하게 해주고, 그녀들이 그의 인간적인 것과 그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보존하고 다시 불러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무서운 진실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애정이 넘치는 인간관계조차 착가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통찰이다. 그 자신과 다른 사람의 본래 모습이 무엇인지 누구도 모르고, 예감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부모는 그레고르의 갈등, 그가 부모를 위해 치렀던 희생을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부모는 모든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여러 해가 지나가는 동안 그들은 그레고르가 그 회사에서 평생토록 신분이 보장돼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부모는 변신의 형태로 이 내적인 질병이 폭발하기 오래전에 그레고르의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모반을 일으켰고,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음을 예감하지 못했다. 그들은 인간의 본질적인 것이 단순한 부양으로 말미암아 은폐되고, 왜곡되고,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왜곡이 뚜렷한 특징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찌할바를 모르고 자기 아들을 이물(異物)로 느낀다.
  반대로 그레고르 역시 자신과 가족과의 관계를 오해했다. "'식구들이 무척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구나'하고 그레고르는 혼잣말을 했다. 그의 어둠 속을 응시하며, 부모와 누이동생을 이런 좋은 집에서 이렇게 생활해 나가도록 뒷받침해 왔다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혹시 이 편안과 윤택한 생활과 만족스러움이 끔찍스럽게 끝장나면 어떡하지?'" 그는 자신을 희생하고 회사에 몸을 팔면서 가족에게 아름답고, 만족스럽고, 안정된 생활을 마련해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상호관계는 은밀한 계산과 타협에 기초하고 있다. 아무도 이 계산과 타협의 영향력을 예감하지 못한다. 질서의 가상, 만족스러운 세계의 가상이 완성된다. 그러나 그레고르의 불안한 꿈속에서 이 가상은 찢기고 찢긴 틈에서 흉측한 해충의 형태로 진실이 나타난다. 그레고르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자신을 왜곡시켰다. 이제 희생당한 동물은 무자비할 정도로 왜곡된다.
  기만은 계속된다. 사실 부모는 그의 희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레고르가 알고 있던 것 보다 더 많은 돈을 갖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일을 할 수 있었고, 겉으로 보이듯이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그레고르 역시 속았다. 그의 희생은 무의미했다. 가족의 모든 행복과 모든 만족은 착각과 은밀한 타산에 기초하고 있었다. 업무세계가 실제로 사적인 생활 속으로 침입했다. 모든 것은 소유에 기초하고 있지, 존재에 기초하고 있지 않았다.(「죄, 고통, 희망 그리고 진실의 길에 대한 성찰」35번을 참고하시오) 가족의 목가적 생활 전체가 허위였다. 어느 곳에도 진실은 없었다. 그레고르가 가족에게 돈을 더 많이 벌어다 주면 줄수록, 가족관계는 그만큼 더 냉담해진다: "식구들이나 그레고르나 그것에 습관이 되고 만 것이었다. 식구들은 고맙게 돈을 받고 그는 기꺼이 돈을 대주었지만, 거기에 특별한 온정 같은 것은 두 번 다시 없었다." 이제 비로소 그레고르의 왜곡으로 말미암아 희생당한 동물이 눈에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동물은 쫓기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괴물은 사라져야만 한다. "옆방의 물건은 치워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허위에 의해서만 이 세계는 존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레고르 자신이 이것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식구들에 대해서 그는 감동과 사랑으로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자기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은 아마도 누이동생의 생각보다 더 확고한 것 같았다." 그레고르가 뒈졌을 때, 이 목가적인 허위는 한층 고양된 형태로 방해를 받지 않고 계속 전진한다. 세 명의 하숙생이 눈짓을 한다. 결혼 적령기의 딸은 젊은 육체를 쭉 편다. 공포의 종말이 오직 그레고르만 덮친다. 바로 그가 가족만 생각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동물로의 변신은 긍정적인 의미도 갖고 있다. 갑충인 그레고르가 누이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을 때 결정적인 문장이 나타난다: "음악에 이렇게 감동을 하는데도 내가 동물이란 말인가? 마치 그리워하던, 미지의 양식에 이르는 길이 그에게 나타난 것만 같았다." 여기에서 비로소 이 동물변신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지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양식'이다. 동물인 그는 동시에 동물 이상이다. 그의 소외는 그안에 있는 이 양식에 대한 동경을 일깨우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음악은 카프카에게 사실 언제나 인간을 모든 지상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어느 개의 연구」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음악과 영양학을 결합하고, 음악의 도움을 받아 땅에서 생산되지 않는 양식을 위에서 아래로 유인하고, '영양분을 불러내리는 노래에관한 학설'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학설은 "자유를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높이 평가하는 궁극적인 학문"에 도달한다. 그레고르의 갑충변신의 최종 의도는 자유를 향한 탈출이고, 인간의 미지의 양식을 향한 동경이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변신의 동물 혹은 괴물은 오히려 결코 표현할 수 없고, 결코 볼 수 없는 하나의 영역을 표시한다. 왜냐하면 관계된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실제로 그 동물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동물을 이해하고, 관찰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실타래인 오드라덱 등과 같은 카프카 문학의 사물들과 꼭 마찬가지로 동물은 인간의 모든 경험적인 이해능력을 뛰어넘는다. 갑충 잠자를 실재하는 갑충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다. 카프카 자신이 이점을 명확하게 말한적이 있다. 쿠르트 볼프 출판사가 오토마르 슈타르케더러 「변신」에 들어갈 삽화를 그리게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때, 1915년 10월 25일에 카프카는 출판인에게 편지를 쓴다: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그(슈타르케)가 어쩌면 곤충을 그려보고 싶어할 거라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가 그의 힘을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제가 당연히 제 작품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힘을 요청하려는 것입니다. 곤충 그 가체를 그려넣어서는 안 됩니다. 어렴풋하게 곤충을 암시하는 것조차 결코 안 됩니다."
  그레고르의 물화된 꿈은 동시에 꿈 이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꿈의 형상들 역시 어쩌면 모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이야기는 하지만 아무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밀이다. 그런데 비유 속에서 그러한 비밀이 폭로된다. "너희들 자신이 비유가 되면"(「비유에 대하여」) 진실은 드러난다. 잠자의 변신은 자아의 비유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비유에서 비로소 자아는 현실적이 되고, 인간 세계의 허위를 파괴한다.
  그렇다면 갑충 잠자는 무엇인가? 그것은 명백하게 모든 사람이, 잠자 조차 참을 수 없는 것, 낯선 것, 무서운 것으로 느끼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그도 자신을 이 갑충과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갑충이 되고, 갑충의 생활방식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지만, 처음에는 그는 종래의 생활의 사고, 표상과 감정에 사로잡혀서 더 이상 자기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한다. 갑충이라는 실존은 그를 익숙한 모든 것에서 쫓아내고, 그를 모든 사람들에게 낯설고 무섭게 만든다. 그러나 옛날에 숨겨진 실제의 금전관계가 이제 밝혀졌다고 해서 주변세계에 대한 그의 애착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는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갑충의 실존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폭력 때문에 그 소망은 방해를 받는다. 그 때문에 잠자를 아주 좋아하고 돌보아온 누이동생이 결국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없어져야 해요. 아버지  그리고 오직 그와 같은 것으로서만 갑충은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진실의 바탕에서 비롯한 것은 다시금 설명하기 어려운 것으로 끝나야만"(「프로메테우스」)하기 때문이다. 진실과 자아는 동일하다. 자아는 정말 설명하기 어렵다. 자아는 우리의 자아에 대한 모든 표상을 뛰어넘는다. 갑충은 우리의 의식적, 무의식적 표상의 피안을 구현한다. 다름 아닌 인간 그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동물은 이른바 인간세계의 절대적 파기를 의미한다. 잠자의 삶의 세계와 잠자의 갑충형상과의 분열은 표상과 존재와의 분열이다. 카프카의 경우 표상의 피안이 인간 자신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외부에 피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피안의 형상, 이 피안의 비유는 필연적으로 현세의 형상이다. 동시에 이것은 비현세의 형상이며, 묘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사정은 카프카가 그런 피안을 사물들 혹은 동물들의 형상으로 묘사한 이유이다. 사물들과 동물들은 혼란에 빠트리면서, 놀라게 하면서, 모든 장애를 제거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일상세계 안으로 침입한다. 라반의 갑충에서 잠자의 해충으로의 왜곡은 단지 시각의 역전에 불과하다.
  라반은 움직이지 않고 휴식하고 있는 자아와 진실의 바탕에서 세계를 보았다. 그에게 세계는 왜곡되고, 참을 수 없고, 혐오스러운 것의 모습으로 나타나야만 했다.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그에게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잠자는 세계 안에 머무르려고 한다. 그 때문에 휴식하는 자아는 그를 익숙한 생활권에서 끌어내는 끔찍한 괴물로 그와 그의 주변세계에게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 이 두 입장은 보호받아야만 한다. 이 두 입장이 합쳐져서 비로소 인간의 삶이 구성된다. 카프카는 두 입장을 비판하기도 하고 긍정하기도 한다. 단지 라반의 은둔의 생활방식 아니면 잠자의 가족과 직업에 대한 근심의 견지에서 카프카를 해석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라반과 잠자, 이 둘의 이름이 카프카 자신의 이름에 대한 별명이듯(「카프카와의 대화」, 『일기』), 이 두 가지가 카프카 안에서 교차하고 있다. 이 두 갑충환상을 해석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의미가 밝혀진다., 그 방법밖에 없어요. 저것이 그레고르 오빠라는 생각은 집어치우세요."
  그러나 이미 그의 음악과 미지의 양식에 대한 동경이 보여주듯이, 결국 그레고르는 포로상태에서 풀려나 경험세계로 들어간다. 그의 죽음은 무의미한 멸망일 뿐 아니라, 해방하는 인식이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죽음을 긍정한다. 그는 자신과 세계와 화해하고 죽는다: "식구들에 대해서 그는 감동과 사랑으로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자기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은 아마도 누이동생의 생각보다 더 확고한 것 같았다. 교회의 탑시계가 세시를 칠 때까지 그는 이렇게 공허하고 평화로운 명상에 잠겨있었다. 그는 창 밖에서 세상이 환해지기 시작하는 것도 느꼈다."
  물론 작품 어디에서도 이 인식의 내용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또한 여기에서 어떤 이미지의 양식이 문제되고 있는지, 그 것이 정신적인 의미의 양식인지, 종교적 의미의 양식인지, 심적인 의미의 양식인지, 아니면 단순히 물리적 의미의 양식인지 작품 어디에도 암시되어 있지 않다. (중략)
  이 자아는 예컨대 직업과의 갈등 속에서 노동세계와 가족세계에 맞서 이제 말하자면 지금까지 억눌려왔던 잠자의 본래의 자아를 대표하는 일련의 내적인 감정과 이상과 목표가 활동한다는 의미에서 영혼으로, 여전히 감정과 소망과 희망의 꿈과 노력 등의 영역에서 해명할 수 있는 특정한 정신 상태로 심리학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이와 같은 해석은 논외이다. 또 이런 내면세계가 하필이면 어떻게 구역질나는 해충의 형상을 지닐 수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잠자의 자아가 억눌리거나 굴복당하고 그 때문에 부정적인 특징을 띠어야만 하기 때문에 라반-환상과는 달리 자아의 왜곡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견해를 전개했지만, 이 경우에도 심리학적 해석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만약 심리학적 해석이 가능하다면, 이 억눌린 자아와 잠자와의 내적 대결이 벌어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자아는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이든 상관없이 그에게 호소하는, 태도결정을 강요하는, 그를 내적으로 변신시키는 내용을 전개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심적인 변화와 변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다. 변신은 심적인 변신, 정신적인 변신, 성격적인 변신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이것이 이 작품이 지닌 전대미문의 것, 불가해한 것이다. 이것이 이 작품을 종래의 심리문학과 구별한다.
  따라서 갑충-동물이 인간에 내재한 꿈처럼 무의식적인 본능영역, 동물적이며 인간이전의 본능영역을 대표한다는 주장 역시 결정적 제한이 필요했다. 이 동물이 말하자면 꿈의 소산인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신은 이미 눈을 뜨기 전, 잠을 자고 꿈을 꾸는 상태에서 일어났다. 꿈 즉 낮의 인식으로부터의 해방이 변신의 전제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꿈의 세계에서 변신된 것의 세계 속으로 이행하지 않는다. 잠자의 갑충이라는 실존은 꿈속의 상태와는 관계가 없고, 꿈속의 자유롭고 본능적인 감정, 반응, 체험의 직접성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잠자의 합리적인 낮은 표상을 위협적으로 좌절시키는 악몽 혹은 직접적인 반응의 형태로 직접성이 전도됐다는 의미에서는 잠자의 갑충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제로 잠자는 갑충이라는 실존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낮은 표상들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해하기 쉬운 모든 해석들은 무용지물이다. 갑충은 인간의 표상세계에 들어맞을 수 없는 이물이다. 이것이 유일하게 갑충이 지니고 있는 의미이다. 갑충은 전혀 다른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감각과 표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갑충은 미숙의 의미에서 뿐 아니라, 갑충의 실존을 모사하는 해석의 의미에서도 결코 암시적으로 묘사될 수 없다. 갑충은 오직 해석하기 어려운 것으로서만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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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조정래, 『프란츠 카프카(읽기의 즐거움)』, 살림

-p.64-96

종말 또는 새로운 탄생 -「변신」론
동물 모티프와 메타포
 (생략)
  「변신」을 구성하고 있는 세 개의 장에는 일상적인 삶에서 비일상적이며 비현실적인 상황에 처한 주인공의 행위와 그에 대한 가족의 반응이 집중적으로 묘사된다. 주인공에게 익숙했던 일상적인 것 속에서 낯설고 비일상적인 것이 갑자기 개입하게 된 상황은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불안한'이나 '무시무시한' 또는 '벌레' 등의 단어로 제시된다. 작품의 첫 문장이 동화적인 서술 방식이 아니라 무섭고도 혐오스러운 사실성에 토대를 둔 반동화적 방식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독자는 이 작품이 우화도 동화도 아니라는 관점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독자로서는 벌레로의 변신을 우선 인간 본질의 상실과 연결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은 작품 진행 과정에서 빗나가고 만다. 처음에는 비록 주인공이 공동생활을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흉한 모습을 하고는 있기만 가족에게는 그가 여전히 책임져야 할 아들이자 오빠로 남아 있다. 작품의 후반부로 가서야 비로소 이러한 생각은 사라지게 된다. 마침내 가족은 아들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러나 동물적인 방식으로의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자아동일성은 손상되지 않는다. 변신 후에도 주인공이 여전히 그레고르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작품의 모순적 상황이야말로 카프카적 우화의 특징이 된다. 그러니까 인간과 동물의 인류학적인 분류를 토대를 두고 있는 전통적인 우화나 동화의 개념은 카프카의 시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일상적인 것과 비일상적인 것과의 갈등이란 측면에서 볼 때, 이 이 작품은 '음식'과 '음악'이라는 두 개의 중요한 메타포를 내포하고 있다. 누이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서 주인공은 "이처럼 음식 소리에 감동을 받는데도 내가 벌레란 말인가?"라고 생각한다. 음악 소리에 의해 내적으로 감동된 비일상성은 가족과 하숙인들의 세계와 같이 보편적이며 규범적인 일상성에 의해 축출된다.
  변신 이후 점점 축소되긴 했지만 그나마 유지되왔던 주인공과 가족간의 인간적인 관계는 작품 후반부에 와서는 완전히 단절된다. 주인공을 돌보는 일은 전적으로 늙은 청소부 할멈의 손에 맡겨진다. 카프카는 백발이 성성한데도 뼈대가 굵은 큰 몸집 덕에 자신의 긴 인생에서 온갖 궂은일을 극복해온 청소부 할멈을 주인공과 대조되는 인물로 설정한다. 일상적인 것의 중심에 활기차고 굳건하게 서 있는 할멈은 비일상적인 것 속에 방치되어 있는 주인공을 두려워하지 않고 "늙은 말똥벌레"라고 지칭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비일상적인 것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야만 한다는 일상성의 법칙에 따라 주인공의 시체는 결국 할멈의 손에의해 한낱 쓰레기로 처리된다.

잠자 가족과 실제 가족과의 유사성
잠자 부인과 카프카의 어머니
  (생략)
  인물의 성과 관련하여 앞에서 언급한 유사성 외에도 두 가족(카프카 가족, 잠자 가족)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잠자 부인은 두 아이의 어머니이며 아들 그레고르가 변신하기 전에는 직업 활동을 하지 않다가 변신 후에 유행품 가게에서 삯바느질을 한다. 그녀는 남편의 사업은 이미 5년 전에 파산했기 때문에 남편 일에는 신경 슬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잠자 부인은 카프카의 실제 어머니에 비해 비교적 가사에 대한 부담이 적은 편이다. 그녀는 그레고르가 갑자기 보통 때처럼 회사에 출근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자, 그 즉시 걱정을 하면서 조심조심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레고르가 출근 시간을 미루는 이유를 알아내려고 한다. 그녀는 변신 후의 그레고르와 접촉을 시도하는 한편, 아들이 변신 전에는 성실하고 바람직한 직원이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등 그레고르의 무성의한 태도에 화가 난 회사 지배인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는 첫 인물인 셈이다. 그레고르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아버지는 열쇠 수리공을 부르자고 주장하는 반면에 그녀는 의사를 불러오라고 한다. 이런 그녀의 배려와 부드러운 마음씨는 작품 끝부분에 가서야 비로소 과감하고 단호한 태도로 바뀐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녀는 그레고르와 특별히 친밀함을 유지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아머지가 그레고르에게 사과를 던지면서 공격할 때도 그녀가 자발적으로 개입하여 남편을 제지하지 않았다면 그레고르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레고르를 남편으로부터 보호해 줄 뿐만아니라 그레테 앞에서도 그의 입장을 옹호해주기도 한다. 잠자 부인은 딸의 주장에 따라 그레고르의 방에 있는 가구를 치워버린 뒤에 야기될 수 있는 불행한 결과를 통찰하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는 딸에게 맞서기에는 너무 약하고 불안정한 인물이기도 하다. 잠자 부인의 이러한 행동 방식의 원인은 그녀의 허약한 건강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그녀는 자주 몸이 아픈 데다 계속 천식에 시달려왔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비로소 그녀는 건강과 활기를 되찾는다. 작품에서 종종 묘사되는 그녀의 실신과 히스테리성 발작은 남편과 아들 사이의 갈등이나 경제적인 어려움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잠자 부인의 특성은 그녀로 하여금 카프카의 어머니 율리 카프카에 비견되는 가족내의 중간자 역할을 가능하게 한다.
  아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특징으로 하는 어머니 역할에서 볼 때 잠자 부인과 율리 카프카는 거의 일치한다. 율리 카프카는 아들 프란츠 카프카에게는 그야말로 좋은 어머니이다. 카프카 부인은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에게 종종 소포를 보내주곤한다. 외적으로 볼 때 아들에 대한 두 여자의 사랑과 보살핌은 행동 방식의 공통분모가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율리 카프카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물질적인 면에만 치우친 피상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밖에서 보내야 했기 때문에 아들과 내면적으로 깊은 신뢰를 형성할 만큼의 시간적인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런 카프카 부인과는 달리 잠자 부인은 그레고르와 진지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비교적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카프카 아버지, 여동생에 관한 내용 생략 )

그레고르와 카프카
(생략)
  그레고르의 외적 특성은 시간이 가면서 점점 동물적인 것으로 바뀐다. 처음에는 언어능력이, 다음에는 식욕과 시각이 상실되어간다. 이러한 과정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르에게는 인간적인 사고와 인식력, 그리고 가치 판단 능력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 누이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서 자신이 여전히 인간임을 스스로 확신한다. 그러나 가족은 그레고르를 더 이상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의 방 속에 방치할 뿐이다. 회사에 출근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제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된 그레고르는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커다란 손실을 초래하는 존재가 된다. 가족은 경제적으로 쓸모없게 되어 버린 그레고르를 대신해 각자 새로운 직업을 갖는다. 그레고르의 변신을 통해 가족은 예전과는 달리 각각의 삶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특히 아버지는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활기찬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한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속담은 적어도 카프카와 그의 아버지 사이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를 몸이 비쩍 마르고 연약한 체질이라고 묘사한 카프카의 눈에 아버지는 항상 강하고 힘센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아버지는 훗날 성공적으로 자신의 사업을 물려줄 튼튼한 아들을 원했지만, 카프카에게는 아버지의 그런 현실 지배욕이나 사업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카프카의 삶에서 모든 것을 의미하는 글쓰기 작업은 아버지의 눈에는 한낱 현실 도피처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강압적인 자세와 끊임없는 책망은 카프카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는 카프카적 침묵과 수줍음은 그러한 상처의 흔적일 것이다. 항상 자기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아들에게는 반항의 권리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아버지 앞에서 아들이 느끼는 공포는 카프카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그 무수한 익명의 불안으로 확장되었다. 그 결과 카프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고, 수시로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적 감정에 빠져들었다. 
  카프카는 자신의 비극적인 경험을 작중 인물 그레고르 잠자를 통해 독자에게 제시했다. 그레고르의 변신 후 그의 아버지에게서 볼 수 있는 부정적인 행동 방식은 카프카의 아버지의 것과 동일한 속성을 갖는다. 이러한 일치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님은 지금까지 밝힌 바와 같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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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 10. 00:35 from 서재/접어둔 페이지


  기만이는 영신이가 초면이었지만 M대학 정경과의 졸업 논문을 쓰다가, 신경 쇠약에 걸려서 나왔다는 것과, 별안간 궁졸한 이 시골서 지내려니 갑갑해서 죽겠다는 것과, 그러나 이러한 동지들이 있어서 함께 일을 하니깐 여간 의미 깊은 생활이 아니라고, 일본말 조선말 반죽으로 건배의 다음 결은 갈만큼 씩둑꺽둑 늘어놓는다.


- 심훈, 『상록수』, 한국뉴턴, p.81
씩둑꺽둑이라니... 흐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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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정작 에르네스토의 흥미를 끈 것은 그 거대한 기계장치보다는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들이 자기가 속한 구역에서 하고 있는 일밖에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이들은 이곳에서 10년 넘게 일하고 있었으면서도 다른 구역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노동력을 쉽사리 착취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문화적, 정치적 의식을 낮은 단계로 묶어둘 필요가 있는 회사로서는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물론 몇몇 용감한 노조 지도자들이 에르네스토에게 설명했듯, 사용자측에서 제시하는 계약조건을 노동자들에게 깨우쳐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모습들도 없진 않았다.


- 장 코르미에, 『체 게바라 평전』, 김미선 옮김, 실천문학사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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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유숙자, 『자화상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 (인생에 대한 친밀한 고백의 기록)』, 살림

- ~p.98 '인간실격'에 연관된 부분이나 작가의 유년시절에 된해서 적었다. 분홍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책속의 인용문!



1부다자이 오사무의 문학과 삶
고향을 찾아서

아오모리현 기타쓰가루군 가나기촌
  나는 시골의 소위 부잣집에서 태어났습니다. 형과 누나가 많았고, 막내로서 무엇하나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막내로서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이 때문에 세상 물정 모르는 지독한 부끄럼쟁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런 부끄럼이 자칫 남 보기에 스스로 자랑삼고 있는 듯 보이지는 않을까 신경이 쓰입니다.
  나는 남한테 제대로 말도 거의 못 붙일 정도의 여린 성격으로, 따라서 생활력도 제로에 가깝다고 자각하면서 어린시절부터 지금껏 지내왔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염세주의라 부를 만도 하고, 산다는 것에 별로 흥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저 한시라도 어서 이 생활의 공포에서 도망치고 싶다. 이 세상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만, 어릴 적부터 늘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성격이 나를 문학에 뜻을 품게 한 동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성장한 가정이나 가족, 혹은 고향이라는 개념, 그런 것이 아주 깊게 뿌리박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나의 반생을 이야기한다」)

  (이하생략)

유년시절
  (윗부분 생략)
  내가 태어났을 때 가장 출세해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귀족원 의원이었다. 아버지는 우유로 세수를 했다.(「솔로몬왕과 천민」)
  '오즈카스'. 가부장제가 엄격했던 당시, 쓰가루 지방에서는 삼남이나 사남을 업신여겨 이렇게 불렀다 합니다. 특권층 계급 출신, 그리고 집안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오즈카스'로서의 위치는 작가에게 '세상 물정에 어둡고' '제로에 가까운 생활력'을 허용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해타산을 밝히는 현실적 문제와 생활로부터 무풍지대에 놓인 작가는 이로써 초현실적인 절대성이나 순수에 대한 갈망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굉장히 바쁜 사람으로 집에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집에 있어도 아이들과 같이 있지 않았다. 나는 이런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머니와도 나는 친해질 수 없었다. 유모의 젖으로 자라 숙모의 품에서 성장한 나는 초등학교 2,3학년 때까지 어머니를 알지 못했다. (중략)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쓸쓸한 것이 많다.

  인용한 문장은 다자이의 초기 단편 「추억」에 나오는 글입니다. 「추억」은 작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거의 사실그대로 묘사한 작품으로, 작가의 내면세계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텍스트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공포, 어머니의 부재는 작가의 기독교 이해, 신(神)을 받아들이는 자세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용서하는 신이기보다 벌하는 신.
  병약한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다자이를 돌본 사람은 숙모 기에와 유모 다케입니다. 오랫동안 다자이는 숙모를 생모인줄 알았는가 하면, 자신에게 독서와 도덕을 가르쳐준 다케의 존재가 자신에게 그 누구보다 큰 의미를 띠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1944년, 쓰가루를 방문하고 나서 발표한 기행문 소설 『쓰가루』에는 고향을 떠난 이래, 극적으로 이루어진 다케와의 재회가 클라이 막스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케의 이렇듯 진하고 거침없는 애정의 표현방식을 접하고, 아아, 나는 다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형제 중에서 나 혼자 촌스럽고 거친 구석이 있는 것은, 이 슬픈 키워준 부모의 영향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때 비로소, 내 성장의 본질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는 결코 고상하게 자란 남자가 못된다. 자연히, 부잣집 자식답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부잣집 자식답지 않은 구석'. 이는 강한 자보다 약한 자, 승리자보다 패배자, 권력자보다 고뇌하는 자에게 더 관심과 애착을 보인 작가의 특징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하 생략)


작가로의 길
- 쓰시마 슈지에서 다자이 오사무로


습작시절
  드디어 나는 어떤 쓸쓸한 배출구를 발견했다. 창작이었다. 여기에는 많은 동류가 있어서 모두들 나와 똑같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떨림을 응시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작가가 되자, 작가가 되자, 나는 남몰래 소망했다.(「추억」)
  아오모리 중학교 시절 『교우회지』에 소설을 발표하면서 다자이는 작가가 되기를 열망했습니다. 급우들과 동인지 『신기루』를 창간해, 적극적으로 편집도 맡으면서 잇달아 단편과 에세이 등을 발표합니다(통권 제 12호로 폐간).  히로사키(弘前)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자이는 평소 흠모하던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의 자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으로 어느덧 우리에게도 그 이름이 낯설지 않은 이 작가는 스스로 죽음의 이유를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라 했습니다. 다자이는 후에, 당시 문단에서 '문학의 신(神)'으로 까지 존경받던 작가 시야 나오야(志賀直哉, 1883-1971)를 향해 "당신이 지긋지긋한 까닭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아쿠타가와의 고뇌를 전혀 이해 못한다는 점이다."〔『여시아문(如是我聞)』〕라고 쏘아붙입니다.
  아무튼 이로 인한 심리적 우울을 치유하기 위해서였을까. 이때부터 다자이는 기다유〔義太夫, 음곡에 맞추어 낭창하는 옛이야기로 전통 악기 샤미센(三味線)을 이용〕연습에 열을 올리기도 하고, 게이샤가 있는 요릿집을 드나들게 됩니다. 요즘과 달리 당시 풍속으로는 부잣집 출신 고교생의 이런 도락이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는데, 다만 쓰시마 집안의 '수재'로 기대받던 다자이의 갑작스런 변모에는 어떤 심상찮은 전조가 분명 엿보입니다. 게이샤 오야마 하쓰요(小山初代, 당시 17세)와의 만남. 그녀는 다자이의 첫 아내가 됩니다.
  고교 때 창간한 동인잡지 『세포문예』창간호에 다자이는 장편소설 『무간나락』의 「서편 아버지의 첩댁」을 쓰시무 슈지라는 필명으로 발표합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소설에는 호색한 아버지와 그의 방탕한 피를 물려받은 소년의 조숙한 성의식이 노골적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소년이 지닌 용모의 추악성, 굴절된 성의식에 대한 과장된 표현은 작가의 자학적 자화상에 가깝습니다. 용모로 인한 열등감, 소외 체험, 자신의 출생에 대한 망상, 과도한 자존심 등 유년시절 작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습작 『무간나락』은 집안의 치부를 드러낸 만큼 결국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하 생략)

자살의 시대
  도쿄생활의 시작과 더불어 다자이에게는 여러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진 듯한 느낌입니다. 일본공산당 재건을 위해 활동하던 고향 선배의 권유로 매달 십 엔씩 자금 원조를 승작하면서 비합법운동에 관여하게 된 것. 유독 우애가 두터웠던, 도쿄미술학교 조소과에 다니던 셋째형의 죽음. 오야마 하쓰요와의 결혼 문제로 인해 생가로부터 분가(分家) 절연. 긴자의 바(bar)에서 만난 여급(다나베 아쓰미)과 칼모틴 동반자살 기도, 여자만 사망……. 
  다자이와 공산당 운동에 관해서는, 그가 사상으로서의 코뮤니즘 그 자체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따른 행동이었다기보다, '부르주아'로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죄의식, 약자에 대한 공감 등 다분히 윤리적, 양심적인 측면이 앞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남에게 부탁을 좀체 거절하기 힘든 그의 연약한 심성도 미루어 짐작하게 됩니다. 활동 참가를 권유하면서 내세운 두 가지 조건은, 직접 운동에 가담 않고 생가에는 비밀에 부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다자이는 2년 뒤 공산당 활동과의 절연을 서약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부친의 뒤를 이어 정치에 입문한 큰형의 입지를 고려한 생가의 강권이 크게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전향을 한 셈으로, 비합법 운동과 전향 체험이 다자이의 문학정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라는 필명으로, 유년시절의 자신을 찾아 '역행'해가는 「추억」을 쓰기 시작합니다.
  여자와 동반자살을 기도했다가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사실 또한, 평생토록 '생애의 흑점'〔『도쿄팔경』〕으로 다자이의 내면에 아픈 흔적을 남깁니다. 아오모리에서 도쿄로 자신을 좇아 가출해 온 하쓰요와의 결혼 부담, 생가와의 절연이라는 중압감에서 막다른 도피처로 선택한 죽음. 이때의 사건을 소재로 쓴 소설이 『만년』에 실린 「광대의 꽃」입니다.
  나는 이 손으로 소노를 물에 빠뜨렸다. 나는 악마의 오만함으로, 나 살아나도 소노는 죽어버려 하고 바랐다. 더 얘기할까. 아아, 그렇지만 친구는 그저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중략)
  다자이는 고교시절(1929)에 이미 칼모틴 음용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아쓰미와의 가마쿠라 동반자살 미수(1930) 이후 서른아홉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두 차례나 더 비슷한 사건이 되풀이됩니다. 혼자 가마쿠라로 가서 산에서 목 맨 자살 미수(1935), 그리고 아내 하쓰요의 불륜을 알고나서 그녀와 동반자살 미수(1937).
  원래 보통사람과는 달리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가 결핍되었다고는 하나, 다자이의 거듭되는 자살 기도와 미수를 보노라면, 마지막의 경우를 제외하고 네 번씩이나 죽음의 가능성을 절묘하게 피해나간 그 우연에 대해 참으로 기이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듭니다. 못다 한 문학에 대한 야망과 미련이 그의 몸과 정신세계를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저는 이렇게 추정해 봅니다. 혼자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의 장벽(고교 시험성적 부진 우려, 신문사 입사 시험 실패, 대학 졸업 가망 없음에 대한 절망 등)에 부딪힐 때마다 이를 해결, 극복하려 애쓰기보다는 순간적인 충동에 내맡겨 죽음으로 치닫는 그의 데카당적인 기질, 자기파멸적 성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짚어 두고 싶은 점은, 수차례에 걸친 다자이의 자살 미수가 모두 1938년 이전, 그러니까 그의 초기 문학시기까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등 시대적 정황이 작가의 순수 예술적 창작 활동을 크게 위협하던 시기에, 놀랍게도 다자이의 생활과 문학은 오히려 건강성을 유지하는 저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절망과 방황의 계절

(윗부분 생략)
『HUMAN LOST』 체험과 성서
  당시 병원에서 '자살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그를 어둑한 감금병동에 강제 수용했는데, 이때의 절망으로 다자이 스스로 자신에게 내린 선언-인간실격. 이듬해(1937) 발표한 『HUMAN LOST』는 이 입원 체험을 소설화한 것입니다.
  쇠창살과, 철망, 그리고, 육중한 문, 여닫을 때마다 쩔거덕쩔거덕 열쇠소리. 불침번 서는 간수, 어슬렁어슬렁.
  다자이와 성서(聖書). 약 한 달간의 입원 생활은 비록 굴욕과 절망의 시간이 분명했으나, 오히려 이러한 조건이 다자이에게는 '성경만 읽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이 작가의 내면 깊숙이 흡수되는 중요한 계기를 부여했습니다. 성서는 다자이의 사상적 근간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는 책입니다. 그렇다면 다자이는 성서,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요.
  우리가 알고 잇는 요짱은, 무척 얌전하고 아주 눈치 빠르고, 그냥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 하나님처럼 착한 아이 였습니다.
  다자이의 대표작 『인간실격』은 마담의 대사로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인간실격자 , 오바 요조 - 그를 마담은 '하나님처럼 착한 아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실격자가 '신격화'되는 자리, 여기에 일본적 풍토의 문제를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우치무라 간조 수필집』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치무라의 제자인 쓰카모토 도라지의 「성서지식」강독을 들 수 있습니다. 알려진 바대로 우치무라는 무교회주의라는 일본의 독특한 기독교적 정신을 주창한 인물입니다. 우치무라의 글에 보이는 신(神)인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상(像), 그리고 이에 동화되어 스스로 그리스도가 되려 노력해야 한다는 점 등은 다자이의 시점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형성된 그리스도상이 일본의 패전을 거침으로써, 현실적 위기 상황을 맞아 일종의 파멸적 저항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는 측면도 충분히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나는 그 사람의 고뇌만을 생각했다.(『고뇌의 연감』)
  지금까지 다자이 연구에 있어서 특히 성서와의 연관성은 여러 논의가 진행되어 왔으나, 신앙보다는 자기인식의 수단 으로서 기독교의 의미가 강조되는 것이 일반적인 듯합니다. 비록 다자이와는 그 시대나 입장이 상이하긴 해도, 기타무라 도코쿠, 시마자키 도손, 아리시마 다케오 등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작가들이 기독교 신앙의 세례를 받은 후에 결국은 종교로부터 멀어지는 전말을 함께 떠올려도 봅니다. 공교롭게도 기타무라, 아리시마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아내 하쓰요와의 결별
  그런데 무사시노 병원을 퇴원하고 난 뒤, 몇가지 사실이 다시 다자이를 충격으로 몰아넣습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아내 하쓰요의 '슬픈 실수'.
  H는 이제, 죽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을 때, 나도 죽는 걸 생각한다. 둘이서 함께 죽자. 신(神)인들, 용서해 주겠지. 우리는 사이좋은 형제처럼 여행을 떠났다. 미나카미 온천, 그날 밤, 두 사람은 산에서 자살을 시도했다. H를, 죽게해선 안 돼, 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애썼다. H는, 살았다. 나도 멋지게 실패했다. 약품을 사용했다.(『도쿄팔경』)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사람은 충분히 세상앞에 면목이 설 터'이니 '나만, 혼자서 죽자'라고 결심한 다자이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아, 이로써 네 번째 자살 미수라는 기록을 남깁니다.
  되풀이되는 다자이의 자살 충동과 미수에 그치는 사건들을 보면서, 자칫 우리는 그의 전 생애가 어둡고 무거운 막에 휘덮여 잇는 게 아닌가 단정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다자이=절망, 자살한 작가'라는 단선적인 이미지에 구속되어 다자이 문학의 명(明)과 암(暗)을 균형 있게 감상하지 못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하 생략)


새로운 출발
- 전시하(戰時下)의 수확기

(윗부분 생략)
여성 독백체
  다자이 문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특징이면서 중기 이후 현저해진 점으로는, '여성 독백체'문장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집대성이라 할 소설이 『여학생』. (이하 생략)

순수를 위한 동경
  단편 『직소』는 그리스도를 은화 30냥에 팔아넘긴 배신자 유다의 고백으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자신의 배신 행위에 대한 정당화를 이리저리 둘러대며 비굴하게, 또는 나름대로의 간절한 진실성을 담아 다급하게 호소하는 유다의 어투는, 작가의 '구술 필기'라는 방식과 어우러져 생동감 잇는 극적 효과를 전달해 줍니다.
  다자이와 성서의 관련을 언급할 때 자주 거론되는 이 소설은, 어째서 작가가 유다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는가, 하는 문제를 던져보게 합니다. 가령 "나는 나쁜 짓을, 언젠가 저질렀다, 난 지저분한 녀석이다라는 의식이지요, 그 의식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어, 나는 언제나 비굴합니다."(「갈매기」)라는 문장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과거 자신의 행위-특히, 동반자살 미수와 전향 체험-에 대한 잠재된 죄의식에 기인되었다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또한 작가에게는 전지전능한 그리스도보다 유다의 배신과 그의 고뇌가, 순수를 동경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나약한 인간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순수에 대한 동경은, 인간의 마음속에 지닌 사랑, 신뢰, 명예에 대한 기원을 담은 『달려라 메로스』에서도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메로스의 순수와 대비해, 폭군 디오니스 왕의 인간 불신이 서로 상극을 이루며 이야기의 긴장을 유발한다는 점에 주목할 만합니다.


『인간실격』
- '고뇌'하는 인간

신에게 묻습니다
  일본 근대 작가 가운데 다자이만큼 극단적인 호(好)·불호(不好)의 취향으로 나뉘는 독자를 가진 이도 아마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숭배, 아니면 혐오. 짐작하건데, 그 취향은 다자이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인간실격』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결정적으로 좌우될 여지가 많아 보입니다.
  『인간실격』은 '인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노라고, 그래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노라고 호소하면서 '실격'을 자처한 한 '인간'의 고백서입니다. 그의 참담한 고백이 당신의 내면에, 영혼에 어느 정도의 진정성과 파장을 확보할 수 있는가. 이 점이 다자이와의 거리를 좌우하게 됩니다.
  흔히 다자이 문학은 '청춘의 문학'이라 일컬어집니다. 청춘 - 감수성 예민하고 자기 정체성에 눈뜨기 시작해 주면과의 불가피한 마찰에 직면하는 이 시기에, 다자이는 '나의 다자이'로서 독자에게 거의 절대적인 대변자로 화려하게 등장하지만, 이는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일 뿐 언제까지나 다자이 팬으로 남는다는 것은 '미성숙'의 표출이다,라는 암묵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지 오래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문학은 시들지 않는 생명력으로 새로운 세대와의 호흡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다자이 연구가로 잘 알려진 오쿠노 다케오는 『만년』『신(新)햄릿』『옛이야기』『사양』등 다자이의 그 어떤 걸작들이 잊혀진다 해도 『인간실격』만은 오래오래 사람들에게 거듭 읽히면서 남게 되리라 확신한다(『太宰治論』)고 썼습니다. 반면에 이런 평자도 있습니다. 『인간실격』은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의 걸작으로도, 또한 다자이 오사무적인 훌륭한 작품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의 자신이건 현재의 자신이건, 보기 드문 뛰어난 인간 이해자이면서도 그저 실용적인 측면에만 유독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고 연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자신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정신의 귀족인 양 과시하는 듯하여, 참으로 역겹다〔하나다 도시노리〕라고.
  『인간실격』의 구성을 보면 '첫 번째 수기' '두 번째 수기' '세 번째 수기'를 사이에 끼고, 앞뒤로 '서문'과 '후기'를 각각 나눠 싣고 있습니다. '수기'의 주인공은 오바 요조(다자이의 첫 단편집 『만년』에 실린 「광대의 꽃」주인공 이름과 동일). '서문'과 '후기'는 소설가인 '나'가 쓴 것입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사소설 작가로서의 면모를 부정할 수 없는 만큼, 독자들은 아무래도 소설가 '나'보다는 오바 요조를 작가 다자이의 자화상으로서 추출해 읽으려는 경향으로 쏠리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실격』이 단지 오바 요조의 수기만으로 성립되지 않고, '나'에 의한 '서문'과 '후기'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점은 새삼 강조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작가 다자이는 오바 요조를 '나'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시각과 의견 표명을 하고 있으므로.
  이건은 『인간실격』 이후, 다자이가 아사히 신문에 연재될 예정으로 집필한 소설 『굿바이』의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분위기로의 급변에 대한 낯설음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는 게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오바 요조의 '인간실격'은 현실세계에 내재하는 선과 악, 미와 추(醜), 그 양면성을 꿰뚫은 지(知)에 기인된 이해 불가, 소통의 부재라는 지점에 그 불행이 놓여 있습니다. 자포자기의 막다른 길목에서 오바 요조는 신(神)에게 물음을 던집니다. "신에게 묻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신에게 묻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조차도 두려워하는' 요조, '하나님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벌만을' 믿는 요조에게 신앙이란 '단지 하나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입니다. 폐인이 된 요조는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비어 더 이상 '고뇌할 능력'조차 상실하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아버지라는 '그립고도 무서운 존재'의 죽음(부재)이 있습니다. 요조의 '인간실격'은 신과의 관계 단절로 인한 '고뇌'의 상실이 핵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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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출신 아니죠?" 하고 드디어 내가 물었다. 그것이 내가 고작 생각해낸 화제였다.
  "할리우드."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일어서서 아까 자기 옷을 내려놓은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옷걸이 있어요? 옷을 구기기 싫으니까. 이건 새로 드라이 클리닝한 거예요."
  "물론 있어요." 하고 나는 바로 대답했다. 일어서서 무슨 일을 하게 된 것이 기쁘기만 했다. 나는 그녀의 옷을 가져다 옷장 안에 걸어주었다.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옷을 걸어줄 때 좀 서글퍼졌다. 그녀가 옷가게에 들어가 그 옷을 사는 장면을 상상했던 것이다. 옷가게에서는 누구도 그녀가 창녀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이덕형 옮김, 문예출판사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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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성곤, 『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살림
(ISBN 89-522-0349-6, ISBN 89-522-0096-9)
- 재밌는 부분이 많아서 전범위에 걸쳐 조금씩 옮겨적었다. 책마다 같은 내용을 다르게 설명하기도 하고, 자세하게 여기는 내용이 다르기도 해서 주로 그런 부분만 뽑았다.


은둔의 작가 샐린저

(앞부분 생략)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샐린저는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의 입을 빌어, "정말로 내가 감동하는 책은 말이야. 다 읽고 난 뒤에 그걸 쓴 작가가 친구가 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책이란다. 하지만 그런 기분을 주는 책은 좀처럼 없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그 어느 독자의 접근도 철저히 차단하고 있는 패러독스를 보여주고 있다.
(이하 생략)


샐린저 현상

『호밀밭의 파수꾼』이 등장한 시대적 배경
  미국의 1950년대는 흔히 '정치적 보수주의, 경제적 호황, 그리고 사회적 순응'의 시대로 기억된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인들은 평화와 안정을 선택했고 1952년에 '평화와 번영'을 약속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이 주도한 좌파색출 마녀사냥인 매카시즘의 횡포에 순응했다. (중략)
  1950년대에 중산층들은 교외로 이사 가기 시작했으며, 잔디밭에서 바베큐 파티를 열고, 세탁기와 텔레비전 수상기를 들여놓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의 미덕을 존중했고, 정원에는 동양의 약초를 심었으며, 애국심과 건전한 정신을 숭상했다. (중략)
  1950년대는 또 미국인들의 이혼율이 최저로 떨어지고 가족이 중시되었으며 출산율이 높아지던 시대였다. 텔레비전 드라마 역시 가족을 중시하는 홈드라마들이 주종을 이루었으며(예컨대 인기드라마 「비버에게 맞겨줘 Leave It to Beaver」),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과 품위가 리바이벌되던 시대였다. 심지어는 오늘날 범죄의 온상으로 여겨지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조차 당시는 가족들이 놀러가는 평화로운 곳의 상징이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이 센트럴 파크를 자주 거니는 것도 바로 그런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한 장치라고 보아 틀림이 없다.(중략)
  그러나 평온한 외관과는 달리, 1950년대의 그러한 모노크롬적 분위기를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매카시즘의 철저한 반공이데올로기로 정치적 우파만을 허용했고, 소위 정상적인 그룹이나 커뮤니티에서 일탈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억압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경제적 풍요 대신 다양성이 결여된 단일문화와 보이지 않는 정신적 통제를 그 대가로 치르고 있었다. 그래서 고백파 시인들(Confessional Poets)은 내면 속의 문제점들을 천착하기 시작했고, 로버트 로월 같은 시인은 「스컹크들의 시간」이라는 시에서 "시대는 병들고 내 정신도 정상이 아니다."라고 노래했으며, 비평가 어빙 하우는 당시를 "순응의 시대(This Age of Conformity)"라고 불렀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바로 그러한 시대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신선하고 도발적인 작품이었으며, 1950년대 초반,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정신적 빈곤을 고발한 반문화(反文化)의 원조가 되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프렙 스쿨(Preparatory School : 아이비리그에 진학하기 위해 부자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 고등학교)에서 낙제해서 자랑스럽게 학교를 떠나는 설정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위선으로 위장한 점잔은 사회에 대한 저항의 상징처럼 보인다.
  (생략)

'샐린저 현상'은 왜 일어났는가?
  (생략)지금 읽어도 『호밀밭의 파수꾼』의 구어체 문체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 강한 마력으로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독자들은 이 소설이 당대에 누렸던 그처럼 폭발적 인기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인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950년대를 전후한 미국사회의 분위기를 알아야만 한다. 1930년대 좌파 진보주의 시대를 겪은 미국사회는 제2차세계대전을 지나 전후사회로 접어든 1940년대 후반부터는 차츰 우파 보수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파괴적 전쟁을 겪은 제대군인들과 그 가족들은 평화와 안정을 원했고, 그 결과 미국은 1957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애들라이 스티븐스 대신 또 다시 공화당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선택했으며,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이 주도해 현대판 좌파 마녀사냥을 주도한 극우 매카시즘이 사회전반에 걸쳐 횡행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몸을 사렸고, 작가들은 비정치적인 작품들을 썼으며, 사회는 점잖음과 안정을 내세워 보수로 회귀하고 있었다.
  가장 비정치적인 작가로 알려진 헨리 제임스와 윌리엄 포크너가 재발견되어 재평가된 것도 바로 이때였고, 솔 벨로 같은 작가들이 정치적 이슈 대신 산업사회에서의 개인의 소외를 주제로 질서를 추구하며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또 엘리아 카잔 같은 유능한 감독이 미의회에 불려가 영화계의 좌파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정면 도전하는 도발적인 작품이었다. 학교라는 제도로 표상되는 보수적 기성세대의 위선과 허위를 고발하며, 분연히 학교를 떠나 뉴욕의 거리를 방황하는 홀든 콜필드의 체제 저항적 태도는 당시 억눌려있던 젊은이들의 가슴에 반항의 불을 지피는 기폭제가 되었다. 홀든 콜필드의 거칠 것 없는 언사, 당시로서는 사회적 터부였던 적나라한 욕설, 그리고 시원하게만 느껴지는 그의 저항적 태도는 점잖음을 추구하던 미국문단에도 충격적이었지만, 허위와 기만 속에 안정을 추구하며 살고 있었던 기성세대에도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아직은 아무런 체제 저항이 시작되기도 전인 1951년에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샐린저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의 작가였다는 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기념비적 소설은 이후 시작된 일련의 체제저항운동의 시발점이자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알려져 있다. 예컨대 『호밀밭의 파수꾼』은 1950년대 중반과 후반에 일어난 반체제 움직임인 미국의 '비트운동(The Beat Movement)'과 전후 영국의 진보주의 그룹인 '성난 젊은이들(The Angry Young Men)'의 시효가 되었으며, 1960년대를 풍미했던 히피문화와 젊은이들의 반문화(counter culture)의 원조가 되었다.
  (생략)


샐린저의 삶과 문학적 여정

은둔하기 전의 샐린저
  (생략)
  전쟁이 발발하자 샐린저는 군에 입대하려 하지만 심장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징집을 거부당한다. 후에 신체 검사 기준이 약화되자, 샐린저는 드디어 부사관으로 입대해 통신부대에 근무하다가, 1943년에는 정부보대에 근무하게 된다.(중략)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때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종군작가로 샐린저의 부대에 왔다가 독일제 루거 권총의 성능을 시험해본다는 이유로 닭의 머리를 날려 보내자 샐린저는 이후 헤밍웨이를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헤밍웨이에게 있어서 용기를 획득하고 성인으로 입문하는 과정은 늘 사자나 투우(죽음)와 대면해서 그 짐승을 죽임(두려움의 극복)으로써 이루어진다. 반면 윌리엄 포크너에게 있어서 순진성으로부터 벗어나 경험의 세계로 들어가는 성인의식은 언제나 동물(사슴이나 곰)과 대면했을 때 그 동물을 차마 죽이지 못하는 보다 더 고양된 감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헤밍웨이의 문제점은 그러다보니 닭처럼 위협이 되지 않는 짐승도 별 생각 없이 죽이게 된다는 데 있고, 샐린저는 바로 그 점에 혐오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의 입을 빌어,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있거라』를 '가짜 책(phony book)'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중략)
  당시만 해도 샐린저는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한때는 사라로런스 칼리지의 단편 강좌에 가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곧 대중 앞에서 말을 한다는 것과, 강연 중에는 작가들을 범주화하게 된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이후 공적 행사에는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중략)
  1953년까지만 해도 샐린저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 사교를 했다. 그가 셜리 블레이니에게 유일한 인터뷰를 허용한 것도 이때였는데,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샐린저는 점차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그들이 자기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착취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점차 사람들을 피하게 되고, 그 결과 1954년에는 샐린저에 대한 기록이 아무것도 남아있기 않게 되었다.
  (중략)
  샐린저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로 릴케, 카프카, 프루스트, 플로베르, 랭보, 도스토예프스키, 체홉, 톨스토이, 제인 오스틴, 에밀리 브론테, 윌리엄 블레이크, 콜리지, 헨리 제임스 등을 꼽았다. 미국작가로는 피츠제럴드와 링 라드너를 특히 좋아해서, 샐린저의 작품 속에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와 라드너의 소설들을 자주 칭찬하곤 했다. 그는 또 「두이노의 비가(悲歌」를 쓸 때 칩거했던 릴케의 성(城)을 본받아 자신도 일종의 성채에 칩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은둔한 후의 샐린저
  샐린저 vs. 해밀턴 저작권 법정사건
  (생략)해밀턴은 자신이 그렇게 존경했고 관심을 가졌던 작가가 자신의 전기를 쓰는 전기 작가를 고발해 서로 적이 되었고, 앞으로 법전과 문학사에 '샐린저 대 해밀턴 사건'이라는 영원히 바람직하지 않은 사례로 남게 된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손실이자 유감이라고 자신의 소감을 밝히고 있다.
  (생략)


『호밀밭의 파수꾼』은 어떤 작품인가

  (생략) 홀든은 서부로 갈 생각을 하게 되고, 피비의 학교로 가서 떠나기 전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며 오후에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으로 나오라는 메모를 남겨놓는다. 피비의 학교의 벽에 외설스러운 욕이 써 있는 것을 본 홀든은 그걸 쓴 자를 붙잡아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그 낙서를 지운다. 그러나 홀든은 곧 다른 곳에도 그런 상스러운 욕이 씌어 있으며, 어떤 것들은 칼로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절망하게 된다.
  (중략)
  오후에 박물관에서 피비를 기다리는 동안, 홀든은 이집트 무덤을 구경다가 다시 거기에서도 외설스러운 낙서를 발견하고 경악한다. 이는 비단 현대문명뿐 아니라, 인류역사 내내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저급한 요소들이 상존해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서른 다섯 살쯤 되면 돌아올는지도 모르지, 누군가가 병에 걸려서, 죽기 전에 나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을 경우에 말이야. 하지만 그런 일이 없는 한, 나는 오두막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단다.
  서른다섯 살이라는 나이가 미국에서는 중년의 시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홀든ㅇ은 청년기의 순수성을 간직한 채 현실 세계에서 멀리 떠나 살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략)
  이윽고 나타난 피비는 짐을 들고 와서 자기도 같이 서부로 가겠다고 조르지만 홀든은 거절한다. 두 남매는 동물원으로 들어가 잠시 곰을 보다가 피비는 회전목마를 탄다. 그녀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홀든은 이름 모를 행복감 속에서 서부로 달아나지 않고 남아야겠다고 결심한다. 홀든은 다시 한번 이 거친 세상에 순진한 아이들을 지키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기로 결심한다.
  (중략)
  홀든은 자연사 박물관을 특히 좋아하는데, 그 이유를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그대로 보존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자연의 역사는 유리로 된 창 안에 오염되지 않고 순수를 간직하며, 언제 찾아오더라도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순수의 보존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마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처럼, 시간이 흐르면 피비도 순수성을 잃게 될 것이고 타락한 어른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속하는 순수란 없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순수를 상실하고 타락하며,결국 허위와 가식 속에 살게 된다. 홀든의 고뇌는 바로 그러한 필연적 사실의 슬픔을 인식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중략)
  홀든 콜필드가 정신적 편력을 선택하는 두 번째 이유는, 사회제도 속에서 길들여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ㅣ 기성세대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서다. 우선 홀든은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도 기성세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속물들을 발견하고 좌절한다. (중략)
  홀든의 방랑과 탐색의 또 다른 목적은 자신의 정체성 탐색이다. (중략)사실 그가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밤거리의 방황을 통해 추구하고탐색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다. 정체성은 물론 타자와의 만남과 연관 속에서 형성되고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한 타자와의 만남에는 언제나 진정한 교류와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문제는 홀든과 그가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교류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래서 홀든은 늘 외롭고 고독하다. 그가 보는 성인들의 세상은 모두 허위와 가짜(phony)로 되어 있고, 그는 거기에 혐오감을 느낀다. 홀든이 자주 현기증과 구토증을 느끼는 이유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중략)
『호밀밭의 파수꾼』은 겨울인 크리스마스에 시작된다. 겨울은 모든 것이 죽어가는 계절의 종말이지만, 크리스마스는 새롭게 태어나는 재생을 상징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계절적 배경은 순수의 종말과 경험의 탄생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순수성을 지키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비전은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홀든은 지나간 것들을 그리워하며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어린시절 피비의 환영을 본다. 작품의 마지막에 홀든은 예전에 알고 지냈고 한대는 경멸했던 속물들까지도 보고 싶다고 말하며 그들을 포용하는 제스처를 보여준다.


홀든 콜필드를 위한 변명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비판과 옹호
  (생략)
  비판자들은 『호밀밭의 파수꾼』의 언어가 "거칠고 세속적이고 외설적이며, 세상을 가짜라고 비난하는 홀든이야말로 가짜"라고 비난한다. (중략) 그러나 『호밀밭의 파수꾼』의 비판자들이 화를 내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 소설이 기성세대의 치부를 과감히 드러내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그렇게 인기 있었던 이유는, 당시 전후 젊은 세대가 느꼈던 좌절과 분노를 이 소설이 정확하고도 시원하게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은 그런 '가짜' 세상으로부터 도망침으로써 현실을 개선하고 자신을 향상시키며 순수성을 보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잇었다. 홀든 역시 끊임없이 서부로 도망치려고 하지만, 결국 이 소설의 메시지는 "우리는 도망칠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휴 맥리언 같은 사람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출구가 없는 보수주의적 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조리한 사회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

  홀든 콜필드는 단순히 성장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성장에 수반되는 고통으로 인해 고뇌하는 젊은이라고 보는 편이 보다 더 정확할 것이다. 예리한 감각과 지각력을 가진 홀든은 진정한 교류와 상호이해가 불가능하며 위선과 허위로 점철되어 있는 성인세계와 기성사회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좌절하며, 구토증을 느끼고 고뇌하는 현대인의 전형이다. 홀든이 단순히 막나가는 반항아가 아니라, 비인간저깅고 허무주의적인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젊은이라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그러한 부조리한 상황을 블랙 유머로 시니컬하게 묘사해 독자들을 즐겁게 해준다.
  (중략)
  『호밀밭의 파수꾼』은 그래서 좌절과 부패로 오염되어 있는 어른 세계 속에서 유일한 보람 있는 일은 순수한 어린아이들을 붙잡아 그러한 파괴적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은 그러한 작업이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것, 어린이들의 성장은 멈출 수 없으며 결국 아이들은 순수성을 상실하고 성인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인식하고 슬퍼하고 있다. (중략)
  홀든이 뉴욕에서 만나는 옛 애인 샐리는 홀든이 혐오감을 느끼고 도망치려는 맨해튼과 브로드웨이와 록펠러 센터로 표상되는 동부의 상징이다. 비록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이끌려 홀든이 혼란을 느끼고 착각을 일으켜 청혼까지 하고 같이 서부로 도망가자고 제안하지만, 샐리는 홀든이 싫어하는 거의 모든 것을 갖춘 여자다. 그러므로 같이 도망가자는 홀든의 제안을 샐리가 거절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반면, 홀든의 여동생 피비는 속물적인 샐리와는 정반대의 인물로서 순수한 어린아이의 상징이고, 따라서 기꺼이 홀든과 같이 서부로 떠나겠다고 따라나선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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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욱동, 『미국소설의 이해』, 조합공동체 소나무
(ISBN 9788971396063)
- p.313-323에서 맘에 드는 부분~ ⓐ글이 이탈자(?)에 관한 해설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15번 전화했다는 둥 소통의 문제에서 다뤘다. 마치 누군가가 호밀밭의 파수꾼으로쓴 논문을 보는 듯했는데, 뭐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는 거지 꼭 이렇다는건 아니니까... 곧 ⓒ에서 쓸 해설은 '순수'에 관한 건데, 나는 그게더 마음에 든다.


J. D. 샐린저: 『호밀 밭의 파수꾼』

  (앞에 많이 생략) 주인공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위선과 기만과 가식이 없는 정직하고 성실한 세계이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은 겉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에 괴리가 없는 세계를 갈구 한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위선과 기만과 가식을 발견하게 되며, 그럴 때마다 적잖이 메스꺼움과 구토를 느낀다. 홀든은 어른들의 세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위선과 기만의 세계를 두고 '사이비'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이 '사이비' 세계를 끔찍이 싫어하는 그는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홀든이 메스꺼움을 느끼는 이 '사이비' 세계는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인간 관계에서 잘 나타난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말로 상대방을 속이기 일쑤이다. 예를 들어 홀든이 염증을 느끼는 표현은 '행운을 빕니다!'라든지, '만나서 반갑습니다!'라든지 하는 겉치레 인사말이다.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행운을 빌기는커녕 오히려 저주를 빌면서도, 또는 상대방을 만난 것이 전혀 반갑지 않으면서도 내용이 텅 빈 이러한 인사말을 입버릇처럼 서로 주고받는다. 예를 들어 펜시 예비학교의 역사 선생 스펜서 씨가 이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모르는 홀든에게 "행운을 빈다!"라고 말할 때 그는 적잖이 구토증을 느낀다. 우연히 어느 술집에서 만난 형 D. B.의 옛 애인 릴리언 시먼스가 그에게 "만나서 반갑구나!"라고 인사를 할 때에도, 그리고 옛날 학교의 영어 선생인 안톨로니 씨 부인이 전혀 마음에 없으면서도 어머니의 안부를 물어올 때에도 그는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러한 겉치레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사실이다.
  (중략)
  인간의 위선과 기만이 가득 차 있는 이 '사이비' 세계는 인간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종교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홀든은 장의사 사업으로 성공한 펜시 예비학교의 한 졸업생이 모교로 돌아와 후배들에게 강연하는 것을 듣고는 적잖이 메스꺼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고 있지만 홀든이 보기에는 위선자 가운데서도 위선자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형식적이고 제도화된 기독교에 대한 주인공의 혐오감은 그가 호텔 침대에 누워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가롯 유다를 두고 퀘이커 교도인 옛 친구와 논쟁을 벌이던 일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 자신의 부모는 서로 종교가 다르며 자신은 아예 무신론자라고 드러내 놓고 밝히는 홀든은 목사가 설교할 때 본래의 목소리를 버리고 이상한 목소리로 바꾸어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태도에 대해서도 적잖이 메스꺼움을 느낀다.
  홀든이 느끼는 인간의 위선과 기만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는 서머셋 몸과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인간의 굴레』(1915)와 『무기여 잘 있거라』(1929)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이 삶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그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은 기만하거나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런데 위선과 기만과 가짜가 가져다주는 피치 못할 결과는 바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신뢰감의 상실과 정신적 교섭이나 교감의 실패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통하여 작가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문제는 바로 현대인이 맞부딪혀 있는 의사소통의 어려움이다. (중략)
  주인공 홀든은 학교 친구들은 물론이고 교사 그리고 심지어는 부모와도 참다운 의미의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남동생 앨리와 여동생 피비와 어느 정도의 정신적 교섭을 맺고 있을 뿐이다. 주인공이 사회 곳곳에서 발견하고 또한 그것으로부터 크게 절망하는 의사 소통의 상실이나 부재는 전화를 걸려고 하지만 제대로 걸리지 않는다든지, 어쩌다 전화가 연결되어도 도중에 자주 끊긴다든지, 또는 메시지를 보내지만 좀처럼 수신인에게 배달되지 않는다든지 하는 상징적인 사건을 통하여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누구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끼는 홀든은 이 작품 전체를 통하여 무려 열다섯 번이나 전화를 건다. 그러나 이 가운데에서 오직 네 번밖에 성공하지 못하며, 그것마저도 대개의 경우 불발로 끝난다. 마찬가지로 그는 여러 번 입으로나 편지로 남에게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찬찬히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나마 의사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사람은 하나같이 나이 어린 소녀이거나 소년이라는 점이다. 어른들과는 좀처럼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나이 어린 소녀나 소년과 의사 소통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아직 성인 세계의 허위나 기만에 물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어른들의 세계에서 크게 실망을 느끼는 홀든은 차라리 뉴욕 같은 대도시를 벗어나 서부 지방의 시골로 도피하기로 결심한다. '양지 바른' 곳에 조그만 오두막을 짓고 귀머거리와 벙어리로 행세하며 외부세계와 모든 교통을 차단한 채 홀로 조용히 살고 싶어한다. 그가 그토록 갈구하는 이 '양지 바른' 세계는 위선과 기만이 그리고 가식이 없는 곳, 즉 개인이 사회의 그릇된 가치관에서 벗어나 참다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다. 결국 홀든은 '아름답고 평화스런' 이러한 이상향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그 이상향에 대한 향수를 끝내 버리지 못한다.
  (중략)샐린저의 대부분의 작중인물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사랑마저도 인간이 아니라 사물에 쏟는다. 물질주의가 사랑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용 가치보다는 교환 가치가, 본질적이고 내재적인 가치보다는 상품 가치가 오히려 잣대가 된다. 이것이 1950년대에 널리 퍼져 있는 미국 중산층의 가치관이었고, 홀든 코울필드는 바로 이러한 기성 세대의 가치관에 가차없는 조롱과 경멸을 보낸다.
  기성 세대에게는 누가 더 좋은 집과 직장과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성공의 척도가 된다. (중략) 자동차보다는 차라리 말을 갖고 싶다는 홀든의 절규는 물질주의 가치관으로 잃어버린 인간애에 대한 뜨거운 정열과 신뢰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하 생략)
Posted by Hyos :
출처,
MBC라디오, 남경태의 타박타박 세계사 (일요일 아침 8시 10분, FM 95.9MHz) 2008년 7월 6,13일자
이며 들리는 대로 적었다..;;
나중에 시간내서 쭉 따라서 읽어봐야지.ㅎㅎ 그리고 이름 잘못 적은거는 그때 수정해야겠다...;



베스트셀러는 시대상황을 반영하기도 한다고..

1950년대
- 전쟁이후 상황
심훈<상록수>, 이광수<무정>, 정비석<자유부인>, 김내숭<청춘극장>, 안병욱 에세이, 손창섭, 이호철, <오발탄>

1960년대- 여전히 가난함
박경리<김약국의 딸들>, 김승옥(천재 작가!)<무진기행>, 이어령<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등, 전혜린<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1970년대
최인호<별들의 고향>, 황석영<객지>등, 이청준, 조세희<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0년대- 70년대 작가들 계속 활동
이문열<세하곡><사람의 아들><젊은 날의 초상>, 조정래<태백산맥>, 김홍신<인간시장>...
시인으로는 이행인, 서정훈, 도종환<접시꽃 당신>

1990년대- pc통신의 발달
이후역<퇴마록>, 이은성<소설 동의보감>, 김진명<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등, 공지영<고등어>, 양귀자<원미동사람들><나는 소망한다 나에게 금지된 것을><천년의 사랑>

2000년대- 인터넷 보급, 소비자는 미디어로 가기도하고 자신이 주체가 되기도 하여서 많이 줄어듬
김훈<칼의 노래>
Posted by Hy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