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문헌★
빌헬름 엠리히, 『카프카를 읽다1』, 유도
-p.176-195

해방하는 자아로서의 동물
단편 「변신」의 갑충
(생략)
  잠자의 운명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그의 변신이 아니라, 이 변신에 접한 모든 인간이 품는 착각이다. 잠자는 변신을 승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곧 옷을 입고 견본을 꾸려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부모와 누이동생은 변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아는 업무 세계에서 뿐 아니라, 가족세계에서도 절대적으로 낯선 것, 중요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감동적인 방법으로 그의 상황을 개선하고, 해충의 모습을 참아내고, 그를 돌보며, 지키고, 그를 안락하게 해주고, 그녀들이 그의 인간적인 것과 그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보존하고 다시 불러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무서운 진실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애정이 넘치는 인간관계조차 착가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통찰이다. 그 자신과 다른 사람의 본래 모습이 무엇인지 누구도 모르고, 예감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부모는 그레고르의 갈등, 그가 부모를 위해 치렀던 희생을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부모는 모든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여러 해가 지나가는 동안 그들은 그레고르가 그 회사에서 평생토록 신분이 보장돼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부모는 변신의 형태로 이 내적인 질병이 폭발하기 오래전에 그레고르의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모반을 일으켰고,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음을 예감하지 못했다. 그들은 인간의 본질적인 것이 단순한 부양으로 말미암아 은폐되고, 왜곡되고,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왜곡이 뚜렷한 특징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찌할바를 모르고 자기 아들을 이물(異物)로 느낀다.
  반대로 그레고르 역시 자신과 가족과의 관계를 오해했다. "'식구들이 무척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구나'하고 그레고르는 혼잣말을 했다. 그의 어둠 속을 응시하며, 부모와 누이동생을 이런 좋은 집에서 이렇게 생활해 나가도록 뒷받침해 왔다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혹시 이 편안과 윤택한 생활과 만족스러움이 끔찍스럽게 끝장나면 어떡하지?'" 그는 자신을 희생하고 회사에 몸을 팔면서 가족에게 아름답고, 만족스럽고, 안정된 생활을 마련해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상호관계는 은밀한 계산과 타협에 기초하고 있다. 아무도 이 계산과 타협의 영향력을 예감하지 못한다. 질서의 가상, 만족스러운 세계의 가상이 완성된다. 그러나 그레고르의 불안한 꿈속에서 이 가상은 찢기고 찢긴 틈에서 흉측한 해충의 형태로 진실이 나타난다. 그레고르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자신을 왜곡시켰다. 이제 희생당한 동물은 무자비할 정도로 왜곡된다.
  기만은 계속된다. 사실 부모는 그의 희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레고르가 알고 있던 것 보다 더 많은 돈을 갖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일을 할 수 있었고, 겉으로 보이듯이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그레고르 역시 속았다. 그의 희생은 무의미했다. 가족의 모든 행복과 모든 만족은 착각과 은밀한 타산에 기초하고 있었다. 업무세계가 실제로 사적인 생활 속으로 침입했다. 모든 것은 소유에 기초하고 있지, 존재에 기초하고 있지 않았다.(「죄, 고통, 희망 그리고 진실의 길에 대한 성찰」35번을 참고하시오) 가족의 목가적 생활 전체가 허위였다. 어느 곳에도 진실은 없었다. 그레고르가 가족에게 돈을 더 많이 벌어다 주면 줄수록, 가족관계는 그만큼 더 냉담해진다: "식구들이나 그레고르나 그것에 습관이 되고 만 것이었다. 식구들은 고맙게 돈을 받고 그는 기꺼이 돈을 대주었지만, 거기에 특별한 온정 같은 것은 두 번 다시 없었다." 이제 비로소 그레고르의 왜곡으로 말미암아 희생당한 동물이 눈에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동물은 쫓기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괴물은 사라져야만 한다. "옆방의 물건은 치워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허위에 의해서만 이 세계는 존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레고르 자신이 이것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식구들에 대해서 그는 감동과 사랑으로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자기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은 아마도 누이동생의 생각보다 더 확고한 것 같았다." 그레고르가 뒈졌을 때, 이 목가적인 허위는 한층 고양된 형태로 방해를 받지 않고 계속 전진한다. 세 명의 하숙생이 눈짓을 한다. 결혼 적령기의 딸은 젊은 육체를 쭉 편다. 공포의 종말이 오직 그레고르만 덮친다. 바로 그가 가족만 생각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동물로의 변신은 긍정적인 의미도 갖고 있다. 갑충인 그레고르가 누이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을 때 결정적인 문장이 나타난다: "음악에 이렇게 감동을 하는데도 내가 동물이란 말인가? 마치 그리워하던, 미지의 양식에 이르는 길이 그에게 나타난 것만 같았다." 여기에서 비로소 이 동물변신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지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양식'이다. 동물인 그는 동시에 동물 이상이다. 그의 소외는 그안에 있는 이 양식에 대한 동경을 일깨우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음악은 카프카에게 사실 언제나 인간을 모든 지상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어느 개의 연구」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음악과 영양학을 결합하고, 음악의 도움을 받아 땅에서 생산되지 않는 양식을 위에서 아래로 유인하고, '영양분을 불러내리는 노래에관한 학설'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학설은 "자유를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높이 평가하는 궁극적인 학문"에 도달한다. 그레고르의 갑충변신의 최종 의도는 자유를 향한 탈출이고, 인간의 미지의 양식을 향한 동경이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변신의 동물 혹은 괴물은 오히려 결코 표현할 수 없고, 결코 볼 수 없는 하나의 영역을 표시한다. 왜냐하면 관계된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실제로 그 동물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동물을 이해하고, 관찰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실타래인 오드라덱 등과 같은 카프카 문학의 사물들과 꼭 마찬가지로 동물은 인간의 모든 경험적인 이해능력을 뛰어넘는다. 갑충 잠자를 실재하는 갑충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다. 카프카 자신이 이점을 명확하게 말한적이 있다. 쿠르트 볼프 출판사가 오토마르 슈타르케더러 「변신」에 들어갈 삽화를 그리게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때, 1915년 10월 25일에 카프카는 출판인에게 편지를 쓴다: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그(슈타르케)가 어쩌면 곤충을 그려보고 싶어할 거라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가 그의 힘을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제가 당연히 제 작품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힘을 요청하려는 것입니다. 곤충 그 가체를 그려넣어서는 안 됩니다. 어렴풋하게 곤충을 암시하는 것조차 결코 안 됩니다."
  그레고르의 물화된 꿈은 동시에 꿈 이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꿈의 형상들 역시 어쩌면 모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이야기는 하지만 아무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밀이다. 그런데 비유 속에서 그러한 비밀이 폭로된다. "너희들 자신이 비유가 되면"(「비유에 대하여」) 진실은 드러난다. 잠자의 변신은 자아의 비유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비유에서 비로소 자아는 현실적이 되고, 인간 세계의 허위를 파괴한다.
  그렇다면 갑충 잠자는 무엇인가? 그것은 명백하게 모든 사람이, 잠자 조차 참을 수 없는 것, 낯선 것, 무서운 것으로 느끼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그도 자신을 이 갑충과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갑충이 되고, 갑충의 생활방식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지만, 처음에는 그는 종래의 생활의 사고, 표상과 감정에 사로잡혀서 더 이상 자기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한다. 갑충이라는 실존은 그를 익숙한 모든 것에서 쫓아내고, 그를 모든 사람들에게 낯설고 무섭게 만든다. 그러나 옛날에 숨겨진 실제의 금전관계가 이제 밝혀졌다고 해서 주변세계에 대한 그의 애착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는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갑충의 실존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폭력 때문에 그 소망은 방해를 받는다. 그 때문에 잠자를 아주 좋아하고 돌보아온 누이동생이 결국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없어져야 해요. 아버지  그리고 오직 그와 같은 것으로서만 갑충은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진실의 바탕에서 비롯한 것은 다시금 설명하기 어려운 것으로 끝나야만"(「프로메테우스」)하기 때문이다. 진실과 자아는 동일하다. 자아는 정말 설명하기 어렵다. 자아는 우리의 자아에 대한 모든 표상을 뛰어넘는다. 갑충은 우리의 의식적, 무의식적 표상의 피안을 구현한다. 다름 아닌 인간 그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동물은 이른바 인간세계의 절대적 파기를 의미한다. 잠자의 삶의 세계와 잠자의 갑충형상과의 분열은 표상과 존재와의 분열이다. 카프카의 경우 표상의 피안이 인간 자신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외부에 피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피안의 형상, 이 피안의 비유는 필연적으로 현세의 형상이다. 동시에 이것은 비현세의 형상이며, 묘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사정은 카프카가 그런 피안을 사물들 혹은 동물들의 형상으로 묘사한 이유이다. 사물들과 동물들은 혼란에 빠트리면서, 놀라게 하면서, 모든 장애를 제거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일상세계 안으로 침입한다. 라반의 갑충에서 잠자의 해충으로의 왜곡은 단지 시각의 역전에 불과하다.
  라반은 움직이지 않고 휴식하고 있는 자아와 진실의 바탕에서 세계를 보았다. 그에게 세계는 왜곡되고, 참을 수 없고, 혐오스러운 것의 모습으로 나타나야만 했다.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그에게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잠자는 세계 안에 머무르려고 한다. 그 때문에 휴식하는 자아는 그를 익숙한 생활권에서 끌어내는 끔찍한 괴물로 그와 그의 주변세계에게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 이 두 입장은 보호받아야만 한다. 이 두 입장이 합쳐져서 비로소 인간의 삶이 구성된다. 카프카는 두 입장을 비판하기도 하고 긍정하기도 한다. 단지 라반의 은둔의 생활방식 아니면 잠자의 가족과 직업에 대한 근심의 견지에서 카프카를 해석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라반과 잠자, 이 둘의 이름이 카프카 자신의 이름에 대한 별명이듯(「카프카와의 대화」, 『일기』), 이 두 가지가 카프카 안에서 교차하고 있다. 이 두 갑충환상을 해석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의미가 밝혀진다., 그 방법밖에 없어요. 저것이 그레고르 오빠라는 생각은 집어치우세요."
  그러나 이미 그의 음악과 미지의 양식에 대한 동경이 보여주듯이, 결국 그레고르는 포로상태에서 풀려나 경험세계로 들어간다. 그의 죽음은 무의미한 멸망일 뿐 아니라, 해방하는 인식이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죽음을 긍정한다. 그는 자신과 세계와 화해하고 죽는다: "식구들에 대해서 그는 감동과 사랑으로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자기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은 아마도 누이동생의 생각보다 더 확고한 것 같았다. 교회의 탑시계가 세시를 칠 때까지 그는 이렇게 공허하고 평화로운 명상에 잠겨있었다. 그는 창 밖에서 세상이 환해지기 시작하는 것도 느꼈다."
  물론 작품 어디에서도 이 인식의 내용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또한 여기에서 어떤 이미지의 양식이 문제되고 있는지, 그 것이 정신적인 의미의 양식인지, 종교적 의미의 양식인지, 심적인 의미의 양식인지, 아니면 단순히 물리적 의미의 양식인지 작품 어디에도 암시되어 있지 않다. (중략)
  이 자아는 예컨대 직업과의 갈등 속에서 노동세계와 가족세계에 맞서 이제 말하자면 지금까지 억눌려왔던 잠자의 본래의 자아를 대표하는 일련의 내적인 감정과 이상과 목표가 활동한다는 의미에서 영혼으로, 여전히 감정과 소망과 희망의 꿈과 노력 등의 영역에서 해명할 수 있는 특정한 정신 상태로 심리학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이와 같은 해석은 논외이다. 또 이런 내면세계가 하필이면 어떻게 구역질나는 해충의 형상을 지닐 수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잠자의 자아가 억눌리거나 굴복당하고 그 때문에 부정적인 특징을 띠어야만 하기 때문에 라반-환상과는 달리 자아의 왜곡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견해를 전개했지만, 이 경우에도 심리학적 해석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만약 심리학적 해석이 가능하다면, 이 억눌린 자아와 잠자와의 내적 대결이 벌어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자아는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이든 상관없이 그에게 호소하는, 태도결정을 강요하는, 그를 내적으로 변신시키는 내용을 전개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심적인 변화와 변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다. 변신은 심적인 변신, 정신적인 변신, 성격적인 변신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이것이 이 작품이 지닌 전대미문의 것, 불가해한 것이다. 이것이 이 작품을 종래의 심리문학과 구별한다.
  따라서 갑충-동물이 인간에 내재한 꿈처럼 무의식적인 본능영역, 동물적이며 인간이전의 본능영역을 대표한다는 주장 역시 결정적 제한이 필요했다. 이 동물이 말하자면 꿈의 소산인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신은 이미 눈을 뜨기 전, 잠을 자고 꿈을 꾸는 상태에서 일어났다. 꿈 즉 낮의 인식으로부터의 해방이 변신의 전제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꿈의 세계에서 변신된 것의 세계 속으로 이행하지 않는다. 잠자의 갑충이라는 실존은 꿈속의 상태와는 관계가 없고, 꿈속의 자유롭고 본능적인 감정, 반응, 체험의 직접성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잠자의 합리적인 낮은 표상을 위협적으로 좌절시키는 악몽 혹은 직접적인 반응의 형태로 직접성이 전도됐다는 의미에서는 잠자의 갑충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제로 잠자는 갑충이라는 실존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낮은 표상들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해하기 쉬운 모든 해석들은 무용지물이다. 갑충은 인간의 표상세계에 들어맞을 수 없는 이물이다. 이것이 유일하게 갑충이 지니고 있는 의미이다. 갑충은 전혀 다른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감각과 표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갑충은 미숙의 의미에서 뿐 아니라, 갑충의 실존을 모사하는 해석의 의미에서도 결코 암시적으로 묘사될 수 없다. 갑충은 오직 해석하기 어려운 것으로서만 해석이 가능하다.
Posted by Hy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