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문헌★
유숙자, 『자화상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 (인생에 대한 친밀한 고백의 기록)』, 살림

- ~p.98 '인간실격'에 연관된 부분이나 작가의 유년시절에 된해서 적었다. 분홍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책속의 인용문!



1부다자이 오사무의 문학과 삶
고향을 찾아서

아오모리현 기타쓰가루군 가나기촌
  나는 시골의 소위 부잣집에서 태어났습니다. 형과 누나가 많았고, 막내로서 무엇하나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막내로서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이 때문에 세상 물정 모르는 지독한 부끄럼쟁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런 부끄럼이 자칫 남 보기에 스스로 자랑삼고 있는 듯 보이지는 않을까 신경이 쓰입니다.
  나는 남한테 제대로 말도 거의 못 붙일 정도의 여린 성격으로, 따라서 생활력도 제로에 가깝다고 자각하면서 어린시절부터 지금껏 지내왔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염세주의라 부를 만도 하고, 산다는 것에 별로 흥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저 한시라도 어서 이 생활의 공포에서 도망치고 싶다. 이 세상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만, 어릴 적부터 늘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성격이 나를 문학에 뜻을 품게 한 동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성장한 가정이나 가족, 혹은 고향이라는 개념, 그런 것이 아주 깊게 뿌리박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나의 반생을 이야기한다」)

  (이하생략)

유년시절
  (윗부분 생략)
  내가 태어났을 때 가장 출세해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귀족원 의원이었다. 아버지는 우유로 세수를 했다.(「솔로몬왕과 천민」)
  '오즈카스'. 가부장제가 엄격했던 당시, 쓰가루 지방에서는 삼남이나 사남을 업신여겨 이렇게 불렀다 합니다. 특권층 계급 출신, 그리고 집안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오즈카스'로서의 위치는 작가에게 '세상 물정에 어둡고' '제로에 가까운 생활력'을 허용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해타산을 밝히는 현실적 문제와 생활로부터 무풍지대에 놓인 작가는 이로써 초현실적인 절대성이나 순수에 대한 갈망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굉장히 바쁜 사람으로 집에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집에 있어도 아이들과 같이 있지 않았다. 나는 이런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머니와도 나는 친해질 수 없었다. 유모의 젖으로 자라 숙모의 품에서 성장한 나는 초등학교 2,3학년 때까지 어머니를 알지 못했다. (중략)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쓸쓸한 것이 많다.

  인용한 문장은 다자이의 초기 단편 「추억」에 나오는 글입니다. 「추억」은 작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거의 사실그대로 묘사한 작품으로, 작가의 내면세계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텍스트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공포, 어머니의 부재는 작가의 기독교 이해, 신(神)을 받아들이는 자세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용서하는 신이기보다 벌하는 신.
  병약한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다자이를 돌본 사람은 숙모 기에와 유모 다케입니다. 오랫동안 다자이는 숙모를 생모인줄 알았는가 하면, 자신에게 독서와 도덕을 가르쳐준 다케의 존재가 자신에게 그 누구보다 큰 의미를 띠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1944년, 쓰가루를 방문하고 나서 발표한 기행문 소설 『쓰가루』에는 고향을 떠난 이래, 극적으로 이루어진 다케와의 재회가 클라이 막스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케의 이렇듯 진하고 거침없는 애정의 표현방식을 접하고, 아아, 나는 다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형제 중에서 나 혼자 촌스럽고 거친 구석이 있는 것은, 이 슬픈 키워준 부모의 영향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때 비로소, 내 성장의 본질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는 결코 고상하게 자란 남자가 못된다. 자연히, 부잣집 자식답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부잣집 자식답지 않은 구석'. 이는 강한 자보다 약한 자, 승리자보다 패배자, 권력자보다 고뇌하는 자에게 더 관심과 애착을 보인 작가의 특징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하 생략)


작가로의 길
- 쓰시마 슈지에서 다자이 오사무로


습작시절
  드디어 나는 어떤 쓸쓸한 배출구를 발견했다. 창작이었다. 여기에는 많은 동류가 있어서 모두들 나와 똑같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떨림을 응시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작가가 되자, 작가가 되자, 나는 남몰래 소망했다.(「추억」)
  아오모리 중학교 시절 『교우회지』에 소설을 발표하면서 다자이는 작가가 되기를 열망했습니다. 급우들과 동인지 『신기루』를 창간해, 적극적으로 편집도 맡으면서 잇달아 단편과 에세이 등을 발표합니다(통권 제 12호로 폐간).  히로사키(弘前)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자이는 평소 흠모하던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의 자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으로 어느덧 우리에게도 그 이름이 낯설지 않은 이 작가는 스스로 죽음의 이유를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라 했습니다. 다자이는 후에, 당시 문단에서 '문학의 신(神)'으로 까지 존경받던 작가 시야 나오야(志賀直哉, 1883-1971)를 향해 "당신이 지긋지긋한 까닭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아쿠타가와의 고뇌를 전혀 이해 못한다는 점이다."〔『여시아문(如是我聞)』〕라고 쏘아붙입니다.
  아무튼 이로 인한 심리적 우울을 치유하기 위해서였을까. 이때부터 다자이는 기다유〔義太夫, 음곡에 맞추어 낭창하는 옛이야기로 전통 악기 샤미센(三味線)을 이용〕연습에 열을 올리기도 하고, 게이샤가 있는 요릿집을 드나들게 됩니다. 요즘과 달리 당시 풍속으로는 부잣집 출신 고교생의 이런 도락이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는데, 다만 쓰시마 집안의 '수재'로 기대받던 다자이의 갑작스런 변모에는 어떤 심상찮은 전조가 분명 엿보입니다. 게이샤 오야마 하쓰요(小山初代, 당시 17세)와의 만남. 그녀는 다자이의 첫 아내가 됩니다.
  고교 때 창간한 동인잡지 『세포문예』창간호에 다자이는 장편소설 『무간나락』의 「서편 아버지의 첩댁」을 쓰시무 슈지라는 필명으로 발표합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소설에는 호색한 아버지와 그의 방탕한 피를 물려받은 소년의 조숙한 성의식이 노골적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소년이 지닌 용모의 추악성, 굴절된 성의식에 대한 과장된 표현은 작가의 자학적 자화상에 가깝습니다. 용모로 인한 열등감, 소외 체험, 자신의 출생에 대한 망상, 과도한 자존심 등 유년시절 작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습작 『무간나락』은 집안의 치부를 드러낸 만큼 결국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하 생략)

자살의 시대
  도쿄생활의 시작과 더불어 다자이에게는 여러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진 듯한 느낌입니다. 일본공산당 재건을 위해 활동하던 고향 선배의 권유로 매달 십 엔씩 자금 원조를 승작하면서 비합법운동에 관여하게 된 것. 유독 우애가 두터웠던, 도쿄미술학교 조소과에 다니던 셋째형의 죽음. 오야마 하쓰요와의 결혼 문제로 인해 생가로부터 분가(分家) 절연. 긴자의 바(bar)에서 만난 여급(다나베 아쓰미)과 칼모틴 동반자살 기도, 여자만 사망……. 
  다자이와 공산당 운동에 관해서는, 그가 사상으로서의 코뮤니즘 그 자체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따른 행동이었다기보다, '부르주아'로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죄의식, 약자에 대한 공감 등 다분히 윤리적, 양심적인 측면이 앞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남에게 부탁을 좀체 거절하기 힘든 그의 연약한 심성도 미루어 짐작하게 됩니다. 활동 참가를 권유하면서 내세운 두 가지 조건은, 직접 운동에 가담 않고 생가에는 비밀에 부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다자이는 2년 뒤 공산당 활동과의 절연을 서약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부친의 뒤를 이어 정치에 입문한 큰형의 입지를 고려한 생가의 강권이 크게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전향을 한 셈으로, 비합법 운동과 전향 체험이 다자이의 문학정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라는 필명으로, 유년시절의 자신을 찾아 '역행'해가는 「추억」을 쓰기 시작합니다.
  여자와 동반자살을 기도했다가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사실 또한, 평생토록 '생애의 흑점'〔『도쿄팔경』〕으로 다자이의 내면에 아픈 흔적을 남깁니다. 아오모리에서 도쿄로 자신을 좇아 가출해 온 하쓰요와의 결혼 부담, 생가와의 절연이라는 중압감에서 막다른 도피처로 선택한 죽음. 이때의 사건을 소재로 쓴 소설이 『만년』에 실린 「광대의 꽃」입니다.
  나는 이 손으로 소노를 물에 빠뜨렸다. 나는 악마의 오만함으로, 나 살아나도 소노는 죽어버려 하고 바랐다. 더 얘기할까. 아아, 그렇지만 친구는 그저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중략)
  다자이는 고교시절(1929)에 이미 칼모틴 음용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아쓰미와의 가마쿠라 동반자살 미수(1930) 이후 서른아홉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두 차례나 더 비슷한 사건이 되풀이됩니다. 혼자 가마쿠라로 가서 산에서 목 맨 자살 미수(1935), 그리고 아내 하쓰요의 불륜을 알고나서 그녀와 동반자살 미수(1937).
  원래 보통사람과는 달리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가 결핍되었다고는 하나, 다자이의 거듭되는 자살 기도와 미수를 보노라면, 마지막의 경우를 제외하고 네 번씩이나 죽음의 가능성을 절묘하게 피해나간 그 우연에 대해 참으로 기이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듭니다. 못다 한 문학에 대한 야망과 미련이 그의 몸과 정신세계를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저는 이렇게 추정해 봅니다. 혼자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의 장벽(고교 시험성적 부진 우려, 신문사 입사 시험 실패, 대학 졸업 가망 없음에 대한 절망 등)에 부딪힐 때마다 이를 해결, 극복하려 애쓰기보다는 순간적인 충동에 내맡겨 죽음으로 치닫는 그의 데카당적인 기질, 자기파멸적 성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짚어 두고 싶은 점은, 수차례에 걸친 다자이의 자살 미수가 모두 1938년 이전, 그러니까 그의 초기 문학시기까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등 시대적 정황이 작가의 순수 예술적 창작 활동을 크게 위협하던 시기에, 놀랍게도 다자이의 생활과 문학은 오히려 건강성을 유지하는 저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절망과 방황의 계절

(윗부분 생략)
『HUMAN LOST』 체험과 성서
  당시 병원에서 '자살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그를 어둑한 감금병동에 강제 수용했는데, 이때의 절망으로 다자이 스스로 자신에게 내린 선언-인간실격. 이듬해(1937) 발표한 『HUMAN LOST』는 이 입원 체험을 소설화한 것입니다.
  쇠창살과, 철망, 그리고, 육중한 문, 여닫을 때마다 쩔거덕쩔거덕 열쇠소리. 불침번 서는 간수, 어슬렁어슬렁.
  다자이와 성서(聖書). 약 한 달간의 입원 생활은 비록 굴욕과 절망의 시간이 분명했으나, 오히려 이러한 조건이 다자이에게는 '성경만 읽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이 작가의 내면 깊숙이 흡수되는 중요한 계기를 부여했습니다. 성서는 다자이의 사상적 근간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는 책입니다. 그렇다면 다자이는 성서,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요.
  우리가 알고 잇는 요짱은, 무척 얌전하고 아주 눈치 빠르고, 그냥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 하나님처럼 착한 아이 였습니다.
  다자이의 대표작 『인간실격』은 마담의 대사로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인간실격자 , 오바 요조 - 그를 마담은 '하나님처럼 착한 아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실격자가 '신격화'되는 자리, 여기에 일본적 풍토의 문제를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우치무라 간조 수필집』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치무라의 제자인 쓰카모토 도라지의 「성서지식」강독을 들 수 있습니다. 알려진 바대로 우치무라는 무교회주의라는 일본의 독특한 기독교적 정신을 주창한 인물입니다. 우치무라의 글에 보이는 신(神)인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상(像), 그리고 이에 동화되어 스스로 그리스도가 되려 노력해야 한다는 점 등은 다자이의 시점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형성된 그리스도상이 일본의 패전을 거침으로써, 현실적 위기 상황을 맞아 일종의 파멸적 저항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는 측면도 충분히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나는 그 사람의 고뇌만을 생각했다.(『고뇌의 연감』)
  지금까지 다자이 연구에 있어서 특히 성서와의 연관성은 여러 논의가 진행되어 왔으나, 신앙보다는 자기인식의 수단 으로서 기독교의 의미가 강조되는 것이 일반적인 듯합니다. 비록 다자이와는 그 시대나 입장이 상이하긴 해도, 기타무라 도코쿠, 시마자키 도손, 아리시마 다케오 등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작가들이 기독교 신앙의 세례를 받은 후에 결국은 종교로부터 멀어지는 전말을 함께 떠올려도 봅니다. 공교롭게도 기타무라, 아리시마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아내 하쓰요와의 결별
  그런데 무사시노 병원을 퇴원하고 난 뒤, 몇가지 사실이 다시 다자이를 충격으로 몰아넣습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아내 하쓰요의 '슬픈 실수'.
  H는 이제, 죽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을 때, 나도 죽는 걸 생각한다. 둘이서 함께 죽자. 신(神)인들, 용서해 주겠지. 우리는 사이좋은 형제처럼 여행을 떠났다. 미나카미 온천, 그날 밤, 두 사람은 산에서 자살을 시도했다. H를, 죽게해선 안 돼, 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애썼다. H는, 살았다. 나도 멋지게 실패했다. 약품을 사용했다.(『도쿄팔경』)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사람은 충분히 세상앞에 면목이 설 터'이니 '나만, 혼자서 죽자'라고 결심한 다자이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아, 이로써 네 번째 자살 미수라는 기록을 남깁니다.
  되풀이되는 다자이의 자살 충동과 미수에 그치는 사건들을 보면서, 자칫 우리는 그의 전 생애가 어둡고 무거운 막에 휘덮여 잇는 게 아닌가 단정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다자이=절망, 자살한 작가'라는 단선적인 이미지에 구속되어 다자이 문학의 명(明)과 암(暗)을 균형 있게 감상하지 못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하 생략)


새로운 출발
- 전시하(戰時下)의 수확기

(윗부분 생략)
여성 독백체
  다자이 문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특징이면서 중기 이후 현저해진 점으로는, '여성 독백체'문장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집대성이라 할 소설이 『여학생』. (이하 생략)

순수를 위한 동경
  단편 『직소』는 그리스도를 은화 30냥에 팔아넘긴 배신자 유다의 고백으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자신의 배신 행위에 대한 정당화를 이리저리 둘러대며 비굴하게, 또는 나름대로의 간절한 진실성을 담아 다급하게 호소하는 유다의 어투는, 작가의 '구술 필기'라는 방식과 어우러져 생동감 잇는 극적 효과를 전달해 줍니다.
  다자이와 성서의 관련을 언급할 때 자주 거론되는 이 소설은, 어째서 작가가 유다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는가, 하는 문제를 던져보게 합니다. 가령 "나는 나쁜 짓을, 언젠가 저질렀다, 난 지저분한 녀석이다라는 의식이지요, 그 의식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어, 나는 언제나 비굴합니다."(「갈매기」)라는 문장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과거 자신의 행위-특히, 동반자살 미수와 전향 체험-에 대한 잠재된 죄의식에 기인되었다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또한 작가에게는 전지전능한 그리스도보다 유다의 배신과 그의 고뇌가, 순수를 동경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나약한 인간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순수에 대한 동경은, 인간의 마음속에 지닌 사랑, 신뢰, 명예에 대한 기원을 담은 『달려라 메로스』에서도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메로스의 순수와 대비해, 폭군 디오니스 왕의 인간 불신이 서로 상극을 이루며 이야기의 긴장을 유발한다는 점에 주목할 만합니다.


『인간실격』
- '고뇌'하는 인간

신에게 묻습니다
  일본 근대 작가 가운데 다자이만큼 극단적인 호(好)·불호(不好)의 취향으로 나뉘는 독자를 가진 이도 아마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숭배, 아니면 혐오. 짐작하건데, 그 취향은 다자이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인간실격』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결정적으로 좌우될 여지가 많아 보입니다.
  『인간실격』은 '인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노라고, 그래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노라고 호소하면서 '실격'을 자처한 한 '인간'의 고백서입니다. 그의 참담한 고백이 당신의 내면에, 영혼에 어느 정도의 진정성과 파장을 확보할 수 있는가. 이 점이 다자이와의 거리를 좌우하게 됩니다.
  흔히 다자이 문학은 '청춘의 문학'이라 일컬어집니다. 청춘 - 감수성 예민하고 자기 정체성에 눈뜨기 시작해 주면과의 불가피한 마찰에 직면하는 이 시기에, 다자이는 '나의 다자이'로서 독자에게 거의 절대적인 대변자로 화려하게 등장하지만, 이는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일 뿐 언제까지나 다자이 팬으로 남는다는 것은 '미성숙'의 표출이다,라는 암묵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지 오래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문학은 시들지 않는 생명력으로 새로운 세대와의 호흡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다자이 연구가로 잘 알려진 오쿠노 다케오는 『만년』『신(新)햄릿』『옛이야기』『사양』등 다자이의 그 어떤 걸작들이 잊혀진다 해도 『인간실격』만은 오래오래 사람들에게 거듭 읽히면서 남게 되리라 확신한다(『太宰治論』)고 썼습니다. 반면에 이런 평자도 있습니다. 『인간실격』은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의 걸작으로도, 또한 다자이 오사무적인 훌륭한 작품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의 자신이건 현재의 자신이건, 보기 드문 뛰어난 인간 이해자이면서도 그저 실용적인 측면에만 유독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고 연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자신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정신의 귀족인 양 과시하는 듯하여, 참으로 역겹다〔하나다 도시노리〕라고.
  『인간실격』의 구성을 보면 '첫 번째 수기' '두 번째 수기' '세 번째 수기'를 사이에 끼고, 앞뒤로 '서문'과 '후기'를 각각 나눠 싣고 있습니다. '수기'의 주인공은 오바 요조(다자이의 첫 단편집 『만년』에 실린 「광대의 꽃」주인공 이름과 동일). '서문'과 '후기'는 소설가인 '나'가 쓴 것입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사소설 작가로서의 면모를 부정할 수 없는 만큼, 독자들은 아무래도 소설가 '나'보다는 오바 요조를 작가 다자이의 자화상으로서 추출해 읽으려는 경향으로 쏠리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실격』이 단지 오바 요조의 수기만으로 성립되지 않고, '나'에 의한 '서문'과 '후기'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점은 새삼 강조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작가 다자이는 오바 요조를 '나'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시각과 의견 표명을 하고 있으므로.
  이건은 『인간실격』 이후, 다자이가 아사히 신문에 연재될 예정으로 집필한 소설 『굿바이』의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분위기로의 급변에 대한 낯설음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는 게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오바 요조의 '인간실격'은 현실세계에 내재하는 선과 악, 미와 추(醜), 그 양면성을 꿰뚫은 지(知)에 기인된 이해 불가, 소통의 부재라는 지점에 그 불행이 놓여 있습니다. 자포자기의 막다른 길목에서 오바 요조는 신(神)에게 물음을 던집니다. "신에게 묻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신에게 묻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조차도 두려워하는' 요조, '하나님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벌만을' 믿는 요조에게 신앙이란 '단지 하나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입니다. 폐인이 된 요조는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비어 더 이상 '고뇌할 능력'조차 상실하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아버지라는 '그립고도 무서운 존재'의 죽음(부재)이 있습니다. 요조의 '인간실격'은 신과의 관계 단절로 인한 '고뇌'의 상실이 핵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Posted by Hy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