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앨리시어가 말한다.

이야기해줄까.

...

야.

...

네꼬가 있었다.

...

뭐냐 하면.

...

둥근 생물이었다. 옆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앞에서 보나 어느 모로나 네꼬란 둥근 생물이었다. 지느러미 같은 것도 없이 네꼬는 오랜 세월 떠다니며 살았다. 그러다보니 문득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지는 일도 있지 않았겠냐. 뒤집히는 일도 있고 뭔가 달라붙거나, 하물며 뭔가 떨어져나가는 일도 있지 않았겠냐.

...

네꼬의 심부에는 고래 한 마리가 살았는데, 오래전에 네꼬는 고래를 그런 식으로 잃은 거다.

고래를?

멋진 생물이었는데, 하고 네꼬는 생각했던 거다.

형.

어.

네꼬는 저거라는 뜻이다.

뭐.

고양이라는 뜻이야.

그 네꼬하고 그 네꼬는 다르다.

고양이야.

다르다고 새끼야.

그래서 네꼬는 울었어?

뭐?

고래를 잃고, 울었어?

울지는 않고, 네꼬니까, 계속 아, 하면서 떠다녔던 거다.

아.



(중략)




낚시도 가고 집도 짓고 돈도 벌고... 얌들은 말이지, 조개라는 것을 만들어서 돈처럼 주고받았는데.

조개?

조개.

그 조개?

그 조개처럼 생겼지만 얌들이 만들어낸 조개니까 결국은 다른 조개겠지. 하여간 조개라는 것이었는데, 조개가 생겼으니까 조개를 벌어야 하지 않았겠냐. 조개 많이 벌고 있니, 조개 많이 벌어와, 이런 인사가 오가지 않았겟냐. 조개 사정은 어떠니, 조개 갚아, 조개가 부족해서, 더 많은 조개, 조개 땜에 죽겠어, 이런 이야기도 오가지 않았겠냐. 그러다 마침 내 조개가 뭐야, 생각한 얌도 생기지 않았겠냐. (이하생략)




- 황정은, 『야만적인 엘리스씨』, 문학동네, 2013



전자책이어서 쪽수는 모르는게 단점 하핳

재미있다.

Posted by Hyos :

  사실상 1996년의 참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전례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건이었다. 12명이라는 숫자는 에베레스트 봄 시즌의 사망자 숫자로는 기록적인 숫자이긴 하나 그 시즌에 베이스 캠프 위로 올라간 398명 중에서 3퍼센트에 불과하고 그런 비율은 역대 평균 사망율인 3.3퍼센트보다도 낮다. 그 사건을 또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1921년에서 1996년 5월 사이에 총인원 630명이 정상을 밟았는데 그 중에서 144명이 사망했으니 대략 정상을 정복한 네 명에 한 명 꼴로 사망한 셈이다. 그런데 지난 봄에는 정상을 밟은 총인원이 84명이고 사망자는 12명이니 일곱명에 한 명 꼴로 사망한 셈이다. 이런 역사적인 기준에 비춰볼 때 1996년은 평균적인 해보다 훨씬 더 안전한 해였다고도 할 수 있다.


- 존 크라카우어, 『희박한 공기 속으로』, 김훈 옮김, 황금가지, p.387-388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책, 고로 책 속에서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은 진짜로 그때 괴롭게 죽었으리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에베레스트 정상 외에서도 하루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에 관해서는 왜 괴로워 하지 않나)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저자가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비슷한 행동했을 것이다. 다만 그가 
한 자리에서 대부분의 동료를 잃은 것은 지독히도 운이 나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운이 나빴다. 결과가 너무 참혹했다. 정상에 폭풍이 일때 올라갔던 것 뿐이다.

  이런데서 위안을 얻을 줄이야..
Posted by Hyos :

  "왜 그렇게 SM이 대중화된 거지?"라는 말을 혼자 중얼거렸더니, 누군가가 "무라카미 씨가 《토파즈》를 썼기 때문아닌가요?"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거짓말이고, SM의 일반화는 분명 나의 작품 탓은 아니다.

- 무라카미 류,『무라카미 류, 젊은 여성을 위한 성공연애특강』, 랜덤하우스, p.115-116 


이 사람 이 말투 재밌다 ㅋㅋ히히 sixty nine읽고 나서부터 이 무라카미 류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우히히
하지만 지침서는 아니더라 이 책.ㅋㅋ 칫
 
나 왜 자꾸 목적어가 뒤로가지? 
Posted by Hyos :

  버스를 타거나 담배를 사려면 천 원짜리 지폐를 흔히 쓰는데, 그 돈에는 이퇴계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동양의 성인답게 부드럽고도 날카로운 위엄이 있다. 후인들이 그 어른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돈에 초상을 그려 놓았겠지만, 그분은 본래 돈에 별 마음이 없이 안동 청샹산 밑에 숨어서 공부만 하신 분이었고, 또 세상의 소란이나 명리와는 담을 쌓고 지내신 분이었다. 아마도 그분은 때 묻은 돈에 그 얼굴이 그려져서 온 세상을 분주히 흘러다니게 되는 소란을 원치 않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천 원짜리를 내밀고 담배를 살 때마다 나는 내가 감히 그 그림자 언저리도 밟을 수 없는 그 어른께 민망하였다.
  돈에 그려진 퇴계의 초상을 민망히 여길진대, 당신은 큰 돈 벌기는 다 틀렸다고 마누라는 슬픈 표정으로 결론지었다.


- 김 훈, 『밥벌이의 지겨움』, 생각의 나무, p.83



지하철에서 읽다가 뿜을뻔했다. 흐흐헤헤
베껴적고 싶다. 이 책
어떤 부분은 참 따뜻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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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구나. 결국 내가 그가 되었어.'
  그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향해 암세포가 퍼진 폐를 찍은 엑스레이 사진을 흔들어댔다. 그런 다음 지금도 시간을 뛰어넘어 시간여행자에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목 메인 소리로 외쳤다.
  "잘도 감췄어. 이 빌어먹을 자식!"

- 기욤 뮈소,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전미연 옮김, 밝은세상,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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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2010. 11. 27. 15:33 from 서재/접어둔 페이지

  밖에 나온 다이스케는 휘청거리며 100미터 정도 걸었다. 적당한 선에서 접어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법한데, 그의 마음에는 그런 만족감이 조금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치요와 더 오래 마주 앉아서 자연이 명하는 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도 없었다. 그는 거기서 그만두었어도, 오 분이나 십 분 후에 그만두었어도 결국 마찬가지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과 미치요의 현재의 관계는 요전에 만났을 때 이미 진전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보다도 더 이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이스케는 둘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보며 그 어느 시점에서나 둘 사이에 타고 있는 사랑의 불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침내 미치요가 히라오카와 결혼하기 이전에 이미 자기와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자, 그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한 것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무게 때문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 나쓰메 소세키, 『그 후』, 윤상인 옮김, 민음사,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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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계의 역사는 다소 갈피 잡기가 힘들다. 이유는 많다. 부분적으로는 그 역사의 궤적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다소 갈피를 잡지 못해서이지만,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일들이 늘 일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 Douglas Adams,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김선형 권진아 옮김, 책세상, p.13


드디어 다 읽었다. 이 책, 참 마음에 든다. 결론도 그렇고 긴 농담도 그렇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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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아지면
:달라진다

(중략)
  개미군단을 이해하고 싶다고해서 개미 개체를 공부할 필요는 없다. 개미 개체를 통해서는 군단을 알 수 없으므로 군단을 공부해야 한다.
  문제는 복잡적응계의 불가사의한 특성 이상이다. 사람들은 그 인과관계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그것으로 진화론적인 이득을 사람에게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과관계를 이해할 수 있기를 몹시 갈망한다. 복잡적응계에는 부분을 연구함으로써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없다. 그래서 구조 차원의 결과를 놓고 개별적인 차원의 단ㄴ순한 원인을 탐색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우리의 지성은 설명하기 힘든 결과를 규명하고자 그 원인을 찾아내려 한다 이 때 인과관계를 탐색하는 우리의 지성이 그것을 감추고 있는 구조와 부딪치게 되면, 사고가 발생할 것이다.
  집단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부적합하게 개체의 행동을 끌어들이는 것은, 내가 취업 초창기 때 저질렀던 실수이기도 하다. 월 스트리트에서 일을 시작하던 순간부터 나는 회사의 주당순이익이 주가의 핵심이라고 들었다. 투자자와 이사진 그리고 매스컴은 여전히 그쪽에 장단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 후에 나는 주당순이익이 아니라 현금의 유출입이 주가를 이끈다고 주장하는 금융경제학자들의 연구를 보았다.
  그제야 나는 주당순이익과 현금 유출입의 진영이 두 가지의 매우 다른 접근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당순이익을 주장하는 진영은 <월 스트리트 저널>에 난 기사가 무엇인지 등 일상에 관심을 갖는다. 이와는 반대로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본다. 한 그룹은 구성물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쪽은 전체 집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실험경제학자들은 설사 개개인이 매우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있다해도 시장이 매우 효율적인 가격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한 마리의 벌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벌떼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 투자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시장을 통찰력 있게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하생략)


p.145~146, 『왜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까?(의사결정에 관한 행동경제학의 놀라운 진실)』, 마이클 모부신, 청림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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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어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그분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았다. 실로 대단히 넓고, 대단히 하얗다.


위에 보이는 대륙이 남아메리카대륙의 맨 아래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남부이고,
맨 아래 노랗게 표시한 곳이 인듀어런스호가 잠든(?) 곳. 그 바로 위쪽이 22명의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던 엘리펀트 섬,
바로 위가 섀클턴 선장이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끝까지 찾아갔던 사우스조지아섬이다.

아...... 이 감동을 이 전율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마음이 아프다.ㅠㅠ


후기:
라디오북클럽에서 엄홍길대장님이 소개했던 책이었다.
이루말할수없이 감동적인,
피가 끓고 눈물이 나는 책이다.
너무추워서 상상조차할수없는 곳에서
그야말로 처절한 사투를 버렸던 캡틴 섀클턴과 27명의 대원들.
실화여서 더 감동했다. 고작 '감동'이라는 두글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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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0. 5. 19. 14:07 from 서재/접어둔 페이지



  창문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딱 한 두 권이 부족했다. 그녀는 장롱 서랍 속에 넣어 둔 『파르마의 수도원』과 『카르밀라』를 떠올렸다. 그렇게 해서 책의 탑은 필요한 높이에 도달했다.
  <자, 이제 만약 이 탑이 무너진다면 그건 문학에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야.>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 아멜리 노통브, 『머큐리』, 열린책들,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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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하루에 열두 시간도 넘게 잠을 잤다. 마치 지난 십 년간 한 숨도 못 잔 것처럼,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잠으로 하루를 보내다시피 했다. 잠을 자지 않는 시간엔 거실 소파에 기대 텔레비전을 보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기찻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조각난 단상들 이어서 서로간에 아무런 연계가 없었다. 나에게 닥친 문제나 미래의 계획에 대해 잠깐씩 생각해본 적도 있지만 잠을 자고 나면 머리는 물에 헹궈낸 듯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 천명관, 『고령화 가족』, 문학동네 p.24

세상에.. 내가 이렇다. 공감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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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의 예를 들어보자. <연결>이라는 기능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도움말을 참조하면 이런 대답이 나온다. <개체를 연결시켜주는 기능입니다. 《접속》참조.> <접속>기능이란 또 무엇인가 하고 찾아보면, <연결 문서에 접속하는 기능입니다>라는 설명을 만나게 된다. <에러125> 같은 유형의 긴급성을 띤 메시지가 나타났을 때도 도움말은 대단히 유용하다. 도움말은 당신에게 이렇게 일러줄 것이다. 당신은 <에러125>를 범했으며, 작업을 계속하기 전에 그 에러를 제거해야 한다라고.
  그런 도움말 작성자를 양성하자면 아주 어릴 적부터 특수한 학교에서 준비 교육을 시켜야 할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의 명제를 꾸미면서 논리 훈련을 하는 학교에서 말이다. <모든 독신자들은 독신자이다>, 또는 <에파미메니데스는 뜀박질을 하거나 뜀박질을 하지 않는다>, <모든 동물은 동물이다>, <오늘 날씨는 비가 내리거나 비가 내리지 않는다>, <코르불리데스가 배중률(排中律)을 진술한다면, 코르불리데스는 배중률을 진술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등등.


-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열린책들 p.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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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2009. 5. 26. 19:45 from 서재/접어둔 페이지

  그들은 '산속'이 평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했지만 산속에 떨어진다는 '큰 물고기'의 해석을 두고 다시 의견이 엇갈렸다. 일사학파는 불기둥이 치솟아 하늘에 닿는다는 따져볼것 없이 남성의 발기된 성기를 가리키며, 이로 미루어 큰 물고기는 여성의 성기를 의미한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따라서 노파의 공수는 저주가 아니라 생전의 노파를 사로잡았던 반편이의 거대한 성기를 찬양하는 동시에, 남녀간의 운우지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자 이사학파에선 불기둥을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모든 범주에 기계적으로 무리하게 적용함으로써 해석상의 전반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큰 물고기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은 지난 전쟁에서 등장한 신무기, 즉 미사일을 가리킨다는 거였다. 미사일이 마치 물고기처럼 유선형으로 생긴데다 뒤에 나오는 불기둥이란 말과 정확하게 호응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곧 미사일론에 대한 반박이 뒤따랐다.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은 노파가 어떻게 미사일을 아느냐는 거였다. 귀신이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다는 해명에 대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말라는 반박이 나왔으며, 뒤이어 어따 대고 선배 앞에서 그따위 개소리를 하느냐는 성명이 발표되자, 너 대학 어디 나왔냐는 질문이 나왔고, 이 씹쌔야, 어딜 나온 게 무슨 상관이냐는 반론이 제기되자, 저 새끼, 싸가지 없는 건 학교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는 인물평과, 저 새끼는 학계에서 완전히 매장시켜버려야 된다는 매장론이 뒤따랐으며, 선배 무시하다 뒈지게 맞고 피똥 싼 놈 많다는 협박과, 누군 씹팔, 고스톱 쳐서 학위 딴지 아냐는 고스톱 학위론, 그럼 씹쌕꺄, 미사일이 아니면 도대체 뭐냐, 뭐긴 뭐야, 섁꺄, 니 애비 좆이라니까, 라는 식으로 반박이 줄줄이 이어지며 논쟁은 점점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어갔다. 이후에도 불기둥 논쟁, 남쪽 논쟁, 검불 논쟁 등 논쟁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며 공수논쟁은 그해가 다 가도록 끝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 천명관, 『고래』, 문학동네 p.242-243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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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

2009. 4. 15. 00:32 from 서재/접어둔 페이지


  그 여자의 서성거림은 번번이 그런 식으로 끝나곤 하였다. 차츰 그 여자는 깨달았다. 사내들이 탈출하고 싶어 하는 욕구는 거의 모두가 조건부라는 것을. 다시 말해서 사내들은 영원히 '이곳'을 떠날 의도는 없어 보였다. 그들은 잠깐 울타리를 뚫고 밖으로 나가 본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얼른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니 미처 그것도 아니다. 울타리 안에서 울타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만 한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자기의 욕구는 반드시 사내들이 자기네의 욕구를 과감히 실천할 때 함께 성취 될 수 있음을. 그렇다, 사내가 그 여자의 내부에 공포와 혼란을 일으켜 놓지 않는다면 그 여자는 어떻게 자기의 더러움을 자백할 수 있을 것인가!
  (중략)
  그리하여 최근에 와서 그 여자의 욕구는 비틀거렸다. 이따금 그 여자는 그 공포와 혼란이 없이도 사내의 손에 이끌려 갈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곤 하였다. 창녀들처럼 아니 절실하게 기도해야 할 것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들처럼.


- 김승옥, 『무진기행』中「야행」, (주)민음사 p.346-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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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이게 저승이 아니란 말이야?" 아서가 말했다.
  웨이터가 웨이터답게 예의 바르면서도 조용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예의 바르고 조용조용한 웨이터용 레퍼토리를 거의 다 써버렸고, 이제 곧 말수 적고 냉소적인 웨이터 역할로 들어갈 것이다.
  "저승이라고요? 아닙니다, 손님." 그가 말했다.
  "그럼 우린 안 죽은 건가요?" 아서가 말했다.
  웨이터가 입술을 깨물었다.
  "으음, 음," 그가 말했다. "손님은 분명 살아 계십니다. 안그러면 제가 어떻게 주문을 받겠습니까?"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동작으로, 자포드 비블브락스가 팔 두개로는 자기 이마 두개를, 나머지 팔 하나로는 자기의 넓적 다리를 철썩 갈겼다.
  "이봐, 친구들, 이거 정말 대단해. 우리가 해낸거야. 우린 마침내 우리가 오고자 했던 곳에 온 거라고. 여기가 바로 밀리웨이스야." 그가 말했다.
  "밀리웨이스!" 포드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손님." 흙삽으로 인내심을 꾹꾹 누르며 웨이터가 말했다. "여기가 바로 밀리웨이스,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이죠."


- 더글라스 애덤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 - 우주 끝에 있는 레스토랑』, 김선형 권진아 옮김, 책세상 p.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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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나무인 나에게는 시간을 주고 인간에게는 공간을 맡겼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속에 질투심의 씨가 싹트게 된 것은 아닐까? 움직일 수 없다는 내 약점을 이용해서 인간은 자신의 키를 내 키에 맞추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인간에게 주어진 몇 십년 정도의 수명과 내게 주어진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의 평균 수명을 비교해 보면, 인간은 아찔한 느낌이 들 테지. 나무와 인간 사이에 무엇인가 끊어진 것이 있다면 아마도 바로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 미셸 뤼노, 『시인을 꿈꾸는 나무』, 창작시대사 p.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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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

2009. 1. 10. 00:35 from 서재/접어둔 페이지


  기만이는 영신이가 초면이었지만 M대학 정경과의 졸업 논문을 쓰다가, 신경 쇠약에 걸려서 나왔다는 것과, 별안간 궁졸한 이 시골서 지내려니 갑갑해서 죽겠다는 것과, 그러나 이러한 동지들이 있어서 함께 일을 하니깐 여간 의미 깊은 생활이 아니라고, 일본말 조선말 반죽으로 건배의 다음 결은 갈만큼 씩둑꺽둑 늘어놓는다.


- 심훈, 『상록수』, 한국뉴턴, p.81
씩둑꺽둑이라니... 흐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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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정작 에르네스토의 흥미를 끈 것은 그 거대한 기계장치보다는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들이 자기가 속한 구역에서 하고 있는 일밖에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이들은 이곳에서 10년 넘게 일하고 있었으면서도 다른 구역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노동력을 쉽사리 착취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문화적, 정치적 의식을 낮은 단계로 묶어둘 필요가 있는 회사로서는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물론 몇몇 용감한 노조 지도자들이 에르네스토에게 설명했듯, 사용자측에서 제시하는 계약조건을 노동자들에게 깨우쳐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모습들도 없진 않았다.


- 장 코르미에, 『체 게바라 평전』, 김미선 옮김, 실천문학사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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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출신 아니죠?" 하고 드디어 내가 물었다. 그것이 내가 고작 생각해낸 화제였다.
  "할리우드."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일어서서 아까 자기 옷을 내려놓은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옷걸이 있어요? 옷을 구기기 싫으니까. 이건 새로 드라이 클리닝한 거예요."
  "물론 있어요." 하고 나는 바로 대답했다. 일어서서 무슨 일을 하게 된 것이 기쁘기만 했다. 나는 그녀의 옷을 가져다 옷장 안에 걸어주었다.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옷을 걸어줄 때 좀 서글퍼졌다. 그녀가 옷가게에 들어가 그 옷을 사는 장면을 상상했던 것이다. 옷가게에서는 누구도 그녀가 창녀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이덕형 옮김, 문예출판사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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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림

2008. 8. 14. 21:54 from 서재/접어둔 페이지

  그때 창밖에 연붉은 스웨터를 입은 누나가 어른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시집을 덮고 누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모르고 있었으나 누나는 책을 읽고 있는 나를 한참동안이나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책 읽노?"
  창이 닫혀 있어 무슨말인지는 잘 들리지 않았으나 누나의 입모양으로 봐서 그런말인 것 같았다.
  "시집 읽는다."
  나도 소리를 내지 않고 입만 벙긋거리는 말을 했다.
... 정호승 <나의 첫키스> p.12



  사람에겐 누구나 도저히 객관화되지 않는 자기만의 열등감이나 외로움이 있을 것이다. 홀로 있는 시간, 정신이 아파 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리라. 그것은 가진 게 부족하여 욕심에 겨운 비명도 아니요, 진짜 불행이 뭔지도 모르는 배부른 투정도 아닐 것이며, 말 그대로 정신이 아파 죽고 싶을 만큼 꺽꺽 우는 울음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쁨과 위안이 되길 늘 소원의 첫째 자리에서 기도해왔으면서도 어찌 보면 나는 내게 기쁨이 되고 위안이 되는 사람을 기다려온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중략)
  나이가 드는 건지 이제야 철이 드는 건지 내가 가진 그릇이 너무 작고도 가볍다는 사실이 문득문득 깨달아지고 그럴 때마다 아직도 그걸 인정하기 싫어 마음으로 비명을 질러보기도 한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내게 주어진 시간과 사람을 사랑하며 살았다고 내가 나에게 큰소리로 또박또박 말해보기도 하지만 이 거대한 세상 속에서 나는 무엇을 얼마만큼 이루어냈을까? 내 체온으로 한 사람의 어깨라도 데웠을까?
  바늘 같은 감정은 하루에도 수천 번씩 나를 찌르고 그 속에서 악악대며 내 아픔만 누구에게 호소하진 않았는지, 그러면서 나를 쉬게 해줄 그 어떤 포근함과 너그러움만 자꾸자꾸 달라고 조르진 않았는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절대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기도가 결국은 내 얇은 허영은 아니었는지.
... 서석화 <그 사람은 내 귀 안에 산다> p.137-138



-김용택 정호승 도종환 안도현 외, 『떨림』, 랜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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