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문헌★
안진태, 『카프카 문학론』, 열린책들
- 전범위에 걸쳐 「변신」에 관련된 내용만 추려낸 것이다. 전체적인 설명은 많이 적지 못했다.


제1장 카프카의 인물적 배경
3. 카프카의 민족성과 종교성
1) 카프카와 프라하
(생략)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태어나서 일생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죽어서도 그곳에 묻히게 되어 카프카와 프라하는 영원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가 증오하고 또 사랑했으며 언제나 떠나려 했는데도 그를 꽉 붙들어 두었던 도시, 그 세계를 그가 뒤로 물러서서, 그러나 정확하게 하나하나 기록해 놓은 도시, 그 위험스러운 다양성과 생소함이 현대적인 소외의 면모들을 지니는 듯한 도시의 준엄한 진실이라는 도구로 카프카는 <자신의> 상황이 낳은 결과들을 기록하려고 노력했다.
  카프카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주위 세계에 부정적 판단을 내렸음에도 이 주변 세계가 카프카의 작품의 주제나 문체에 결정적인 몫을 차지하고 있다. 주제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으로는 프라하에 사는 독일인들의 섬사람 같은 폐쇄성을 들 수 있다.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그곳에 생활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체코어도 히브리어도 모르는 유대인으로 체코적 토속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일률적으로 독일 교육을 받아 독일 정신으로 성장했다. 물론 이것은 프라하의 상류 유대인의 생활 태도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생의 뿌리를 박은 카프카의 대지는 체코이면서도, 공간의 위치를 점하는 육체는 유대인이고, 무한대로 하늘을 나는 정신 세계는 독일이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 독일적이기 때문에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체코인으로부터 배척되고, 오스트리아인에 의해서는 보헤미아인으로 기피되고, 독일인으로부터 유대인으로 경멸되고, 자식으로 부친의 지배 하에 있는 가정에서 소외되고, 유대인으로 기독교에서 단절되고, 무신론자로서 종교적 유대인에게 외면당하고, 예술인으로 일반 대중에게서 이해되지 못한 카프카는 유대인이기에 너무나 독일인이며, 독일인으로서 너무나 체코인이고, 체코인이기에는 너무나 유대인이라는 이율 배반의 화신이다.
(생략)


4)카프카의 종교성
(생략)
  카프카는 1917년 9월에서 1918년 4월에 걸쳐 씌어진 취라우 잠언에서 신학적 물음들과 집중적으로 담판을 벌였다. 특히 『8절지 노트의 기록』중 세번 째와 네 번째에는 신의 창조의 원죄, 실낙원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단상들이 여러 개 발견된다. 카프카의 시각에서 볼 때 인류 역사는 추락과 원죄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원죄에 관한 카프카의 잠언을 살펴보자.
-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은 그 주요 부분에 있어서 영원하다(시간외적인 영원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은 최종적이고 이 세상에서의 삶은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의 영원성은 (혹은 시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 과정의 영원한 반복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낙원 안에 머무를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곳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여기 이 세상에서 그 사실을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 없이.(H 69) -
  카프카는 여기서 실낙원의 상태, 즉 인간의 시간이 영원과 분리된 상태를 영원한 것으로 묘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실낙원의 영원한 반복이 오히려 인간을 낙원의 영원성 속에 머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역설적인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카프카는 이러한 실낙원 등 성서상의 모티프를 작품에 간접적으로 자주 차용했다. 예를 들어 「변신」에서 부친이 그레고르를 향해 던진 대상은 사과이다. 그런데 다른 과일이나 소도구일 수도 있을 텐데 카프카는 왜 구태여 사과를 등장시켰을가. 사과는 인식의 나무로 실낙원을 상징하며 원죄 의식과도 관련된다. 실낙원의 원인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해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한 선악과, 즉 사과인데 카프카는 이 사과를 작품에 자주 등장시키고 있다.  「변신」에서 부친이 던진 사과 조각이 몸에 박혀 생긴 그레고르의 상처는 <살 속에 박힌 가시적인 기념물>(E 90)로서 그레고르가 인간 이전의 동물적 단계로 퇴행에 대한 벌인 동시에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기억시키는 매체이기도 하여 신화와 현실의 양자적 개념을 암시한다. 인류의 조상이 사과를 따먹는 순간 자기 의식을 갖게 되고 원죄를 느껴 쫓겨나야 했듯이 그레고르는 자기를 의식하는 순간 변신한다. 사과의 형태는 원형(圓型)이며 원형은 종말이 없는 무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 파의 말도 있다. 마찬가지로 그레고르의 고독과 원죄의 짐은 끝이 없어 죽을 때까지 그 고독과 짐을 감내해야 했다. (홍경호, 「카프카의 『변신』연구」, 『카프카 문학론』, 한국카프카학회, 1987, 241면.) (중략)
  카프카는 창세기의 원죄 이야기를 읽은 후 1916년 6월 19일자 일기장에 <인류에 대한 신의 분노>(T 366)라는 말을 적었다. 그는 오래된 유대 전통에 따라 신에대한 논쟁을 벌이면서 신의 잔인함을 비난했다. 그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신의 금기 사항은 근거 없으며, 이를 어긴 뱀, 아담, 이브에 대한 신의 처벌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며 이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  우리 인간은 단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죄가 있는 것만이 아니라 아직도 생명 나무 열매를 따먹지 못한 데 죄가 있다. 그리하여 죄와는 상관없이 우리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이 죄가 된다.(H 48) -
(생략)


4. 카프카의 여성관
1) 부정적 여성상
(생략)
  심지어 「변신」에서는 근친상간의 면모도 보이고 있다. 폴리처는 평범한 인간 그레고르의 변신을 근친상간적 모티프로 해석하였다. 즉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 여동생을 소유하겠다는 그레고르의 죄악이 변신의 원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였다.(Heinz Politzer, Franz Kafka, Der K ünstler, Frankfurt/M., 1978, S. 128) 
  음악에 대하여 특별한 재능이나 취미가 없으면서도 여동생의 연주를 듣고 감동하였으며 그 여동생을 자기 방으로 데려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그 방 안에 가두어 두고 싶어한 그레고르는 그녀를 음악학교에 보내겠다는 결심을 한다. 따라서 음악이 그의 동경을 나타낸 것이라면, 동생은 소유욕을 상징한다. <그러면 그(그레고르)는 여동생의 어깨 위까지 기어올라가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어 주리라. 직장에 다닌 후부터 여동생은 리본이나 깃을 달지 않고 목을 드러내 놓고 다녔으니까.>(E 99)
  심지어는 여동생 그레테 자신도 약간의 애욕성을 보이고 있다. 그레테가 집안의 하숙생을 위해서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벌레가 된 그레고르가 출현하자 불쾌감을 느낀 하숙인들이 이것을 구실로 하숙 계약을 취소하겠노라고 그의 가족들을 위협하자, 이들 하숙인들의 교만에 비분강개해야 할 여동생은 오히려 하숙인들에게 잘못을 빌고 아양을 부린다. 즉 음악에 무관심한 하숙인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교태 같은 행위를 하자 그레고르는 실망과 분노의 눈초리를 보낸다.
  이렇게 대부분의 카프카 문학의 여성들은 육감적 사랑에 치우쳐 있다. 카프카에게 여성들이란 말하자면 <유혹의 올가미>이며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G 178)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카프카의 독신의 남자 주인공들이나 카프카 자신의 공통적 심적 상태인 고독, 불안, 우울, 방만, 유아적 특징, 자질구레한 성찰 따위가 일으키는 강박 관념의 소산으로 여성상도 들 수 있다.
  따라서 카프카 작품의 주인공들의 정신적 갈등 과정에는 언제나 애욕적인 여성들이 등장하여 이러한 갈등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러한 애욕은 인간이 아닌 그림에서도 등장한다. 예를 들어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기어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동생이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의 방에 놓여 있던 가구를 치우는 과정에서 그레고르는 액자 속의 여인과 관련되어 있는 성적(性的) 모티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애호하던 가구와 물건이 거의 들려 나가고 방이 텅 비게 되었을 때 소파 밑에 있던 그레고르는 어린 시절부터 사용해 온 책상마저 들려 나갈 기미가 보이자 무엇 하나라도 붙들어 두고 싶은 마음에서 가족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세심한 배려도 잊어버린 채 소파 밑에서 기어나온다. 이때 그레고르의 눈에 띈 것은 바로 텅 빈 벽에 걸려 있는 털제품을 두른 여인의 그림이 들어 있는 액자이다. 그는 급히 벽으로 기어 올라가서 액자의 유리에 들러붙는다. 뜨거운 하체가 차가운 유리에 닿자 그레고르는 쾌감을 느낀다. 이 느낌이 바로 그레고르가 느끼는 애욕의 정점이다. 그가 지금 전신을 감싸고 있는 이 액자만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방어 태세를 취한다.
(생략)


제2장 카프카 문학의 구성 분석
(생략)
-  카프카에서 무엇인가 습득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상황도 최종적이지 못하다. 긍정이든 부정적이든 세상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더 많이 아는 자를 찾아야한다.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Martin Walser, Beschreibung einer Form, Versuch Franz Kafka, München, 1961, 30.) -
  이렇게 시간적 지형적으로 서구의 계몽적 세계와 거리가 먼 카프카 작품은 바로 그의 시대의 비판의 결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카프카에게 있어서 외적 현실은 보편성이 상실된 체험인데, 이는 그 당시의 시대 상황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페터 지마에 따르면 카프카 텍스트의 다의성은 주체의 위기에서 새로운 주체성을 찾으려는 세기 전환기 소설의 기본적인 특징에 해당된다. 즉 <세기 전환기의 소설들은 모든 일회적인 것과 특수한 것을 의문시하는 매개의 중의성을 그 정반대의 차원 - 텍스트와 그 기호의 다의미성 - 으로 변화시키려는 변증법적 시도>인 것이다. (페터지마(서영상, 김창주 공역), 『소설과 이데올로기, 현대 소설의 사회사』, 문예출판사, 1996, 301면 이하.) 따라서 카프카의 불확정적인 서술 전력의 배경에는 세계 대전 이후의 20세기의 상황, 즉 소외 의식과 불안이 팽배했던 당시 사회적 혼란과 무관하지 않다.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로 전환하면서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야기된 계층간의 갈등, 제국주의 경쟁 하에서의 국가간의 대립, 전통적인 기독교 이념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서 비롯된 종교관의 분열 현상 등이 이 시대 상황을 대변한다. 외적 현실은 이미 절대 규범과 보편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뿌리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으며, 각 개인은 저마다의 세계 속에 파묻혀 공동의 이해를 이룰 수 없다. 기존 가치들은 절대성을 상실하고, 개인이 지금까지 삶을 규정하고, 해석하고, 밝혀 왔던 모든 관념들은 보편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현대 문명이 낳은 비인간화와 부조리한 사회의 현실이 결과적으로 계몽주의 이래로 과학적인 이성으로 극복했다고 믿어온 또 다른 현실에 불과했다는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떠한 판단도 확신할 수 없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렇듯 인간 상호 간의 관계가 절대 규범과 보편적 가치를 상실하고, 정상적인 사고 행위에서 보편 이념이 표출될 수 없으며, 보편성을 창출하고 매개해야 할 언어가 그 기능을 상실한 상황에서 외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꼼꼼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요구는 시대를 초월한 초석을 형상화하려는 카프카의 창작의지와 상반될 수밖에 없었다.(G 185) 따라서 카프카는 작품에서 자신의 독특한 보편성을 전개시킨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서로 모순되거나 이질적인 요소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긴장상태로 양립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카프카는 소재의 변형을 통해 자신과 더불어 문제시함으로써 인류의 발자취를 반성한 것이다.
  결국 카프카의 작품은 서구 모던의 합리성의 위기를 확인해 준 셈이다. 따라서 소위 새로운 시대적-계몽주의적 인식 능력이 그의 작품의 여러 곳에서 언급되어 있다. 그러한 형상은 종종 전근대적 혹은 고대적인 모티프와 상황의 형태로 나타나 우리의 존재와 존재의 의의를 보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파악시킨다.
  이런 배경에서 카프카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카프카 문학을 우연히 대하면 그것은 기괴하고 무의미한 유희, 그저 자기 자신에 몰두하고 있는 황당무계한 행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프카의 기술된 언어만 살펴보아도 이러한 해석은 타당치가 않는다고 인식하게 된다. 논증의 혼란 속에 내재적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이다.
  카프카의 작품에 기술된 것은 깊이 분석해 보면, 냉철하고 명확한 조서처럼 즉물적인 언어이며, 어떠한 요술도 또 어떠한 <순수한> 추상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황당무계한 행위처럼 생각되었던 것이 사실은 참된 현실이며 우리 자신의 아주 구체적인 운명이 된다. 이와 반대로 지금까지 현실이라 생각되었던 것이 가상(假象)의 모습을 띠게 된다. 환영이 진리가 되어 나타나고, 여태까지 참된 현실이라고 믿어 왔던 것이 허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중략)
  한편으로 기울지 않는 공평한 곳에서 인간은 구제된다. 따라서 카프카의 문학을 인간 전체의 실존적 묘사로 여겨, 즉 삶에서 거리를 두는 전체성으로 여겨 끊임없는 현실 압박에서 벗어나는 구제를 얻을 수 있다. 이 내용을 요약해 볼 때, 카프카는 우리를 현실과 거리가 먼 꿈의세계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절실하게 체험시키고 있다. 


1. 카프카의 언어
2)시각적 서술
(생략) 카프카는 무대 장면적인 묘사를 선호한다. 그는 일단 그의 의식 속에 단락적으로 들어온 사상(事象)을 정지시켜 집중적으로 집요하게 묘사함으로써 가시적(可視的) 인지(認知)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형상 세계로 시각화 경향은 현실의 탈개념화 과정과 맞물린다. 추상적인 개념이나 논증적 담론보다는 구체적으로 시각화된 형상 기호는 텍스트 체험 과정에서 수용자 직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는 논증적 담론에서의 개념적 현실 인식이 아니라 체험적 미적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유선, 「디지털 다매체 시대의 글쓰기 전략」, 『카프카 연구』, 제12집, 한국카프카학회, 2004, 252면 이하.)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변신한 갑충은 사실상 표현될 수 없고, 결코 볼 수 없는 상상적 동물인데도 우리에게 친숙한 시각적 동물로 이해되어 <부당함>과 <당연함>의 당혹스런 동시성을 갖게 한다. 따라서 본 적이 없는 신비스런 동물에서 아무런 놀라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기괴한 일상성>이 놀랄 만하다. 갑충이란 명백한 동물로 극히 시각적으로 표현되었기만 관계된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실제로 그 동물을 본 사람이 없다. 따라서 이 동물을 이해하고 관찰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갑충 그레고르를 실재하는 갑충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다.
  카프카 자신이 이 점을 명확하게 말한 적이 있다. 쿠르트 볼프 출판사가 슈타르케에게 「변신」에 들어갈 삽화를 그리게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때, 카프카는 출판인에게 보낸 1915년 10월 25일자 편지에 <슈타르케가 어쩌면 곤충을 그려보고 싶어할 거라고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가 그의 힘을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제가 당연히 제 작품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요청하려는 것입니다. 곤충 그자체를 그려 넣어서는 안 됩니다. 어렴풋하게 곤충을 암시하는 것조차 결코 안 됩니다>(F. Kafka, Briefe 1902~1924, hg. v. Max Brod, Frankfurt/M, 1986, S. 136.)라고 쓰고 있다. 갑충을 실재하는 동물로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의미다. 이렇게 갑충은 인간의 표상 세계에 들어맞을 수 없는 이물(異物)로 전혀 다른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감각과 표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인데도 작품에서는 시각적으로 당연한 동물로 등장하고 있다.


2. 비유와 상징
2)상징
(생략)  이러한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볼 때 카프카 문학이 지닌 <전체로서의 상징성>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그의 문학의 올바른 해석이 불가능하다.
(중략)
  넷째는 시대와 장소를 떠난 보편적 인간 상황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부유한 유대인이 내일 아침에 개처럼 비참히 학살당할 후도 있다. 오늘의 도둑이 내일 아침에 영웅이 되고, 오늘의 매국노가 내일 아침에 애국자가 되는 변신의 시대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양심에 따라 변신을 거부하고 끝까지 고려 왕실에 충절을 지키다가 선죽교에서 살해당한 정몽주와 몰살당한 그의 가족들, 한편 그를 죽여 변신한 뒤 왕권을 약탈하고 500년 동안 자손을 많이도 번식한 이방원. 어느 쪽이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6.25전쟁 때에도 한 동네에서 나름대로 똑똑하고 꼿꼿했던 탓에 공산주의자 혹은 국군에게 학살당한 사람이있는 반면 머리가 부족했거나 실리에 약삭빨라 변신한 덕분에 살아남아 면장 군수 국회의원이 되어 자손을 번식하고 출세시킨 이들도 있다. 생존 경쟁의 승리자로서 크나큰 긍지를 느낄 수 있지만 살아남은 자신에 대해서는 어쩐지 거북하고 계면쩍은 감정이 될 수 있는 것이 변신이다. 치열한 생존 경쟁의 시대, 강하게 살아남는 것이 미덕인 시대에 인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 변신이다.
  이러한 인간 상황의 변신이 카프카 작품에도 반영되어 이미지나 용모까지도 의도적으로 변신시키는 동기가 나타난다. (중략)
  앞에서 카프카의 상징적 성격을 작품 「변신」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았다. 그런데 우의(寓意)를 나타내는 알레고리와 상징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알레고리란 추상적인 개념이나 사상재(思想財)와 사유(思惟)된 복합체를 상징적으로 지각(知覺)되는 구체적 실체의 현상으로 옮겨놓는 화법을 말한다. 즉 이념적인 것이 의인화로 물질화된 것이다. 여기서는 어느 것 대신에 어느 <다른 것>을 말하지만, 이 <다른 것>이란 그 자체로서의 뜻이 없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난데없이 한 마리의 커다란 갑충이자 독충이라는 딱정벌레로 변해 버림으로써 자기의 인간으로서의 실체를 은폐한다. 인간이 벌레로 변신함으로써 자기 실체를 은폐한다는 기만 행위는 카프카 나름의 알레고리 수법이다.
  카프카의 알레고리는 비본질적인 언어 양식이 아니라, 본질적인 언어 양식으로 이해된다. 각각의 형상은 자체적으로 의미되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언어 형태, 형상과 사고 가능성 등은 항상 스스로의 세계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 뒤에는 매우 깊은 인식이 담겨 있다. 자기 형상적 의미 배후의 본질적 의미는 잘 해명되지 않는다. 특히 이 본질적 의미가 우리 삶에 관련된 일반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에 관련될 때 더욱 해독되지 앉는다. 그리고 알레고리는 이렇게 추구된 일반적인 것에는 삽화되지 못하는데, 이렇게 추구된 일반성은 우리 인식의 고유 법칙으로 다른 존재가 되거나, 인간 자신의 인식이 변하기 때문이다. 본질성은 형상으로 고정되어야 마땅한데 본질적 영역과 비본질적 영역의 혼돈으로 인해서 독자는 본질성의 정확한 규정이 어렵다.
 

제3장 카프카 문학의 내용분석
3. 꿈같은 초현실적 문학

1)꿈같은 초현실적 작가
(생략)
  조겔도 카프카의 작품이 서술구조상 꿈의 원리를 철저히 견지한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천재성을 인정하였다.(Vgl. Walter H. Sokel, Franz Kafka, Tragik und Ironie, Frankfurt/M., 1976, S. 9 f.) 카프카 스스로도 자신을 <잠자며 꿈꾸는 자>로서 또한 <깨어 있으면서 꿈꾸는 자>(S. Freud, Der Dichter und das Phantasieren, in: Ders. Bildende Kunst and Literatur, Frankfurt/M., 1969, S. 177.)처럼 글을 쓰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뜬 눈으로 꿈을 꿀 줄 아는, 낮에도 꿈꿀 수 있는 자인 카프카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완전히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T 291, 468)할 수도 있고, 또한 종종 <몰아의 상태>(F. Kafka, Briefe 1902~1924), Frankfurt/M., 1958, S. 385.)에 도달하곤 했다. 따라서 카프카는 자신의 글쓰기를 <보다 깊은 잠>으로 또는 <꿈같은 내면적 삶>(T 306)의 묘사로 이해한다.
  이런 맥락에서 꿈과 같은 서술이 카프카 문학의 공식으로 볼 수 있다. 카프카가 언급하는 모든 것은 정신적인 의미로 수렴된다. 형상들의 상호 연관성 상실, 주인공들의 불확실한 전망, 불안의 기본 정서, 꿈과 현실의 결합에서 카프카와 초현실주의자들 사이의 유사성이 나타난다. 예컨대 현대 회화의 연상(聯想) 묘사, 몽환적 환상 등이 상기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카프카에 의해서 묘사된 현실은 꿈 속처럼 비현실적이며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다. 카프카는 자신의 이야기가 <형상들>일 뿐이며, 이 형상은 <바라봄>이 아닌 <눈감음>의 결과라고 말했다.(G 51 f.) 이 눈감음은 외부 현실 세계의 사실적인 묘사를 포기하고 현실적인 사건들을 꿈같이 비현실화 시킨다.
  따라서 인습적인 시간 개념의 상실, 재빠른 공간 변화, 원근의 급박한 뒤바뀜, 순간적인 등장인물들의 배열, 감각적으로 불가능한 시점 인식의 변화, 모든 사건들의 뒤엉클어짐 등에서 우리는 꿈의 기교로서 몽환과 같은 내면 세계를 표출하려는 카프카의 의도를 직감할 수 있다. 카프카는 고정되고 인습적인 삶에 얽매인 관념의 세계로부터 탈피하여 보다 포괄적인 인식을 위한 불가결한 <거리>를 창출해 내기 위하여 세상의 잡다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요구한 것이다.
(중략)
  그러나 카프카 특유의 방식인 꿈같은 초자연적 현상은 작품의 끝까지 재전환이나 해명되지 않아 독자를 혼란 속에 빠뜨린다. 카프카가 쓴 내용은 끊임없이 의문만 제기시키는 것이다. 카프카의 서술자가 묘사한 것이 자체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이유는 항상 발생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을 상대했기 때문이다.(Vgl. Hartmut Binder, Motiv und Gestalrung bei Franz Kafka, Bonn, 1966, S. 360.) 대체로 처음에 꿈같이 낯선 상황이 묘사되어 독자는 이에 대한 해명을 기대하며 계속 읽어가지만 후속되는 대목에서도 앞서의 내용에 대한 설명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미국에 빠져들어 독자는 논리적 연결을 위해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보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에 따라 인물들이 자아의 분열로 말미암아 출구 부재의 허구 공간에서 자체내의회전 운동을 하는 텍스트의 구조는 독자들에게 불가능한 논리를 쫓는 원 운동을 강요한다.
  이렇게 꿈의 형태는 분석적 방법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논리적 시각으로 접근해들어가다가 미로에 빠지는 원인 또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혼란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카프카의 개별적인 형상과 서술 자체를 모조리 음미 검토하여 작품의 우주적인 뜻을 이해해야만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카프카의 소설은 느낌으로서 공유체험으로 먼저 접근해야 한다. 분석적 시각으로서가 아닌, 종합적 이미지로 파악되면 카프카의 소설이 안고 있는 난해한 다의성이 일원론적 세계관으로 드러난다. 즉 카프카의 작품을 느낌으로서 공유 체험으로 접근하면 작품의 몽환적 내용이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예를 들어 사람이 동물로 변하는 모티프로 시작되는 「변신」의 이상한 특징은 꿈같은 현상에 대한 사실적 차원의 해석이다. 「변신」에서 그레고르의 변신도 분석적 시각이 아닌 종합적 이미지로 파악되면 서술자에게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부득이한 자연 현상으로 수용된다. 심지어 작품을 읽어 가노라면 독자도 서술자와 동일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Vgl. Benno von Wiese, Die deutsche Novelle, Von Goethe bis Kafka, Interpretationen II, Düsseldorf, 1962, S. 322.) 이는 카프카의 불확실성이 확실성으로 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변신의 사건은 매우 중대하기는 하지만 인간이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이 유효하게 되는 것이다.
  나겔은 작품의 내용이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쓰여져서 독자는 자기 눈앞에 전개되는 사실이 있을 수 있는 일인지, 혹은 있을 수 없는 꿈인지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으며, 결국에 가서는 처음에 도저히 믿어지지 않던 꿈같은 사실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바로 카프카 작품의 특징이라고 말했다.(Bert Nagel, Franz Kafka, Aspekte zur Interpretation und Wertung, Berlin, 1974, S. 89.) 따라서 그레고르가 갑충으로 변신하여 잠에서 깨어나는 것보다 그것에서 아무런 놀라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기괴한 일상성>이 발생한다. 놀라운 대상이나 사건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거나 당혹케 하지 않고 그것들을 정상적인 것처럼 아무런 동요 없이 천진무구(天眞無垢)하게 서술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카프카의 소설에서는 환상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가 서술상의 특수한 관점에 의하여 결합하게 된다. 독자는 <불신의 유예(猶預)>나 <잠정적인 불신의 지양>(Erich Heller, Franz Kafka, München, 1976, S. 69.)을 거듭하면서 카프카의 작품을 <읽고, 경악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다.>(Bert Nagel, Franz Kafka, Aspekte zur Interpretation und Wertung, Berlin,1974, S, 11.) 경악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상반된 감정은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높여준다.(김용익, 『프란츠 카프카 연구』, 삼영사, 1984, 9면.)
(생략)


2)꿈같은 초현실적 작품
  카프카의 작품들은 우리들을 꿈같은 세계 속으로 불러들인다. 이 꿈같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나 사건은 시간과 공간으로 규정된 현상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져 시간과 공간, 원인과 결과와 같은 경험적 질서는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카프카의 작품 세계의 <시도 동기>는 꿈의 원리와 꿈의 구조로, 즉 <정신적인 것을 투사하고 주관적인 것을 구상화시키는 문체 의지와 형식 의지> (Walter H. Sokel, Franz Kafka, Tragik und Ironie, Frankfurt/M., 1976, S. 10.)로 표출된다.
  <어느 아침 어수선한 꿈에서 깨어, 자기가 한 마리의 거대한 갑충으로 변신하여 침대 위에 누워 있음을 발견한다>(E 57)는 시작 부분처럼 「변신」은 <어수선한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시작된다. 이러한 시작 부분과 마찬가지로 「변신」의 마지막 부분, 즉 그레고르가 죽은 후에 계속해서 서술된 에필로그에서도 갑충으로의 변신이 꿈의 세계를 대변하고 있다. 동일 시점적 소설이 중심 인물이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그의 시각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하나의 꿈에서 또 다른 국면의 꿈으로 변전되는 것이다. 이렇게 카프카의 기법은 인간을 기상천외의 갑충의 모습을 변신킴으로써 꿈과 같은 초현실의 세계를 일상적인 현실 세계에 대치시킨다.
  흔히 카프카의 소설을 난해하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환상적인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진지하게 다뤄지기 때문이다. 「변신」에서도 사람의 형태를 가진 생물이 하급 곤충으로 변하고도 역시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지속하고 있다. 사람이 별안간 벌레로 변해도 정신 기능을 잃지 않고 있음이 사실이라면 그 사실은 인과성을 벗어난 것으로서 그 이유를 꿈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레고르는 이미 변신했으면서도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다. 그는 인간으로서 자기 속에 숨겨진, 보다 높은 곳에 이르려는 인간적인 충돌을 발견하면서 현실과 꿈같은 세계를 끊임없이 내왕하는 이중의 역을 하고 있다. 즉 그는 완전히 자기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자기 밖 꿈속에 있는 이중의 실존 상태에 있다. 사고와 존재를 일치시키는 상황이 조성되어 현실과 꿈같은 상황이 융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꿈같은 사건이 점차 진짜 현실로 하나씩 입증되는 사실이 카프카 문학의 특징이다. 「변신」의 첫 구절의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E 57)라는 주인공의 꿈에 잠긴 듯한 독백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실제의 현실로 전개된다. 꿈같은 방식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자연적인 양상을 띠게되는 것이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변신을 이상하지만 있을 수 있다고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생각을 집중한 결과 모든 망설임과 불확실성은 사라진다. 카프카는 묘사의 정밀성으로 꿈같은 것을 현실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카프카 문학에서 꿈같으면서도 줄거리는 매우 현실에 근거하여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 카프카 자신도 「화부」를 <어떤 꿈에 대한 회상>(G 53)으로 그리고 「변신」을 <표상이 배후로 물러나 있는 현실을 드러내는 꿈>(G 55)으로 보고 있다. 또 카프카는 「변신」과 관련하여 <꿈은 심상이 숨겨져 있는 현실을 드러낸다. 이것은 삶의 끔찍스러움이며 예술은 충격적인 성격이다>(G 55 f.)라고 말한 바 있다. 카프카는 야노우흐와의 대담에서 <변신은 무서운 꿈입니다. 소름이 끼치는 표상입니다. 꿈은 현실을 폭로하는데, 그 현실의 배후에는 표상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공포입니다. 예술이 주는 충격이지요>(G 55 f.)라고 말하고, 이어서 <변신은 결코 나의 고백은 아닙니다. - 어느 의미에서는 - 비밀 누설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겁니다. 물론 암호 따위는 아닙니다. 그저 그것뿐입니다>(G 55) 라고 말하고 있다.
(생략)


5.실존주의적 개념
1)존재를 위한 문학
(생략)
  실존주의적 방법은 전후 실존주의 사상적 경향과 더불어 키르케고르의 영향과 베르그송, 후설의 철학 사상을 발판으로 하여 독일에서는 신화, 환상, 꿈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현실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밝히려는 데서 대두되었다. 실존주의는 존재와 실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과 인간이 이 세계에 어떻게 존재하며 무엇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일상의 현실로 복귀함으로써 그 해답을 얻으려는 철학의 한 방향이다.  따라서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가 실존주의의 첫 번째 전형적인 문제로 나타난다.  실존주의의 또 다른 측면은 존재의 부조리성이다. 욕망하는 정신과 실망만 안겨 주는 세계 사이의 절연, 통일에의 향수, 지리멸렬의 우주 그리고 그 양자를 한데 비끄러 매놓은 모순이 바로 부조리이다. 실존주의자들은 표현주의 시대에서 성립된 카프카의 작품에서 실존의 문제가 예증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실존주의는 실존의 관계 상실과 결속 상실을 주장한다. 인간이 발견한 세계에는 자연 법칙이 있을지언정 보편타당성을 지닌 인간적 법칙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기존의 행동 법칙에서 볼 때나 스스로가 설정한 일의 선택에서도 그러하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을 위하여 <구상>한다. 이러한 구상은 누구에게나 자유롭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결을 받은 이유는 그가 그 자신을 창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유롭지 못한데 그 까닭은 일단 세계에 던져진 그는 자기가 행하는 모든 것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니므로 존재에 책임이 없다. 즉 이 세상에 원해서 태어나지 않았고 또 원해서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허무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존재>이다.
  실존주의 내용대로 카프카 작품의 주인공들은 허무 속으로 내동댕이쳐져 있다. (중략)
  중편 「변신」에서도 주인공 그레고르가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보니 자신이 커다란 갑충으로 변신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변신」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본질적으로 변해 버린 부조리의 주인공들에게는 삶이 고역일 수밖에 없다. 그레고르는 부친이 던진 사과가 등에 박히는 중상을 입고 사랑하는 여동생이 밖에서 잠가 버린 방 안에서 죽는다. 그레고르는 죽고자 하는 의도가 없어도 세상에 의해 허무 속으로 내동댕이쳐져 불가항력적으로 죽임을 당한다. 그것은 그가 대결하고 있는 부조리한 운명이다.
  이렇게 카프카가 그리는 세계는 실존과 결속을 상실한 부조리한 세계로 나타난다. 인간은 예기치 못한 완전히 변화된 현실과 대립하고 새로운 상황에 의해 고통을 당한다. 결국 문학 작품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들 주인공들이 당하는 부조리한 사건은 실제로 우리 모두에게 닥치는 상황이다. (생략)


제4장 카프카 문학의 소외 개념
2. 이념적 배경
1) 카프카의 이데올로기적 분석
(생략)
  카프카는 사회주의 경향의 <클럽 믈라디취>와 노동자 계급에 대항한 정치 경제적 억압에 대항하여 투쟁한 정치 단체 <빌렘 쾨르버>의 집회에도 참가했다. 클럽 믈라디취는 <자유학교>의 설립자인 프란시스코 페러의 처형에 반대하는 집회를 개최하였다. 카프카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카차라는 사람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카프카는 1909년 10월 13일에 있었던 이 시위에 참가했다. <군국주의와 애국심>이라는 주제로 모임을 개최한 후 이 클럽은 반군국주의와 기타 반국가적인 이념을 유포했다는 이유로 프라하 총독령에 의거하여 해체되었다.
  카프카는 야노우흐에게 <자본주의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상부에서 하부로, 하부에서 상부로 향하는 종속 체계이다. 모든 것이 종속적이며 얽매어 있다. 자본주의는 세계와 영혼을 지배하는 상태다>(G 102)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비판이 카프카의 작품에 자주 반영되고 있다.
  카프카는 작품 「변신」에서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신한 주인공의 개인적인 삶을 통해 다가오는 후기 자본주의의 물신화되고 기능화 된 인간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그레고르는 가족 구조 내에서 뿐만 아니라 산업 경영 구조 내에서도 오직 그의 기능 역할로 필요한 존재가 된다. 그는 절대로 인격으로서 필수적이 아니라 일정한 기능의 수행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는 후에 <도대체 아침에 두서너 시간만 일을 하지 않아도 양심의 가책을 받아 멍하게 되어서 곧 침대에서 빠져 나오게 되고 마는 그런 충실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E 62 f.) 하고 의문을 표시한다. 자신의 기능 역할을 수행해야만 비로소 사회적 유기체의 건강이 가능해지는데 이는 가족과 경영에 대한 <효용성>을 의미하며, 이런 경우 자신의 인격은 병들게 되는 것이다.(Vgl. Wilhelm Bernsdorf, Wörterbuch der Soziologie, Frankfurt/M., 1972, S. 836.)
(생략) 


3. 주체의 객체화
  마르크스에 의하면 개인의 사회적 역할은 물질의 관계로 규정된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은 소비 형태의 관점에서 파악되고, 이 소비 형태가 그 신분을 결정한다. 이렇게 인간이 소비 형태로 파악되는 내용이 카프카 작품에 자주 암시된다. 예를들어 「양동이를 탄 사나이」에서 여자 석탄 장수는 곧장 값을 지불할 수 없는 고객에게 <아무것도 아니에요>(B 92) 혹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B 93)라고 말한다. 고객은 인간적인 관계에 기초해야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즉시 지불이냐 아니면 사후 지불이냐 하는 지불 방식에 따라 고객 접대의 기준이 결정되므로 곧장 가격을 지불하지 못하는 옛 고객은 석탄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작별>(B 94)로 사라져 버린다. 「양동이를 탄 사나이」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객체에 대한 인간의 사물화를 볼 수 있다.(Joachim Isreal, Der Begriff Entfremdung, Reinbeck bei Hamburg, 1972, S. 380.) 즉 인간의 관계는 오직 객체의 교환 가치를 통해서 결정되고 있음을 본다. 이 작품에서는 <사물 숭배> 때문에 옛 고객에 대한 인간적 관계가 무시되어 버린다.(한석종, 「카프카의 난해성과 그 구성 요소」, 『카프카 연구』, 범우사 1984, 47면.)
  이러한 인간의 사물화가 「변신」의 에필로그에 해당되는 그레고르의 사후에 보인 가족들의 태도에서 정점으로 나타난다. 갑충으로 변신한 후 처음 얼마 동안은 가계 수입에 공헌하는 인간의 흔적을 아직도 느껴서인지 가족들은 그레고르를 계속 인간으로 취급한다. 인간 그레고르와 갑충으로서의 존재 사이에는 그 어떤 상응점이 있어 실질적으로는 그 어떤 변신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변신 이전과 이후의 생활은 너무나 일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레고르는 5년이나 직장에 근무하는 동안 한 번도 병을 앓아 본 적이 없고, 아침 기차 시간에 지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회사로부터 신임도가 높았다. 매일같이 여행을 해야 하고, 기차 연결에 대한 걱정, 불규칙하고 좋지 못한 식사, 언제나 바뀌는 고객들과 사무적인 교제를 해야 하는 등 너무나도 증오스러운 외판원 생활은 자신의 경제적 노력 없이는 도저히 살아 나갈 수 없는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계속되어야 했다.
  이렇게 그레고르는 세일즈라는 직업이 싫지만 가족 부양을 위해 온갖 희생을 다해 온 것처럼 앞으로도 자신의 회사 사장에게 싫지만 가족 부양을 위해 온갖 희생을 다해 온 것처럼 앞으로도 자신의 회사 사장에게 부친이 진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아마 5~6년은 더 그 노릇을 해야한다. <나는 내 부모 때문만이 아니라면 벌써 오래전에 해약을 하고 회사를 그만 두엇을 것이다. 나는 사장 앞으로 걸어가서 솔직하게 나의 생각을 말했을 것이다. 그러면 사장은 책상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졌을 것이 틀림없어.>(E 58)
  (중략) 의무와 혐오감, 이 양자의 어느 것도 자의로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레고르는 자신의 실체가 은폐되는 벌레로 변신한다.
  그레고르가 갑충으로 변한 이후 그의 가족에 대한 헌신은 망각되고 계속 (가계 재정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동물로 조재하자 마침내 가족들은 짜증을 느껴 그를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하게 된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그가 죽자 가족들은 벌레와 그레고르를 동일시할 것인가를 놓고 곤혹해 하던 갈등을 버리고 벌레로 죽은 그레고르의 시체를 단순한 사물로 간주한다. 시중드는 할멈이 옆방에 있는 <물건>(E 106)을 치워 버릴 걱정은 말라고 하며 집을 떠났을 때 가족 가운데 어느 누구도 섭섭하다는 눈치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그레고르 자신으로 볼 때는 벌레가 되어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완전히 무의미한 작업 생활의 실체, 인간적 따뜻함의 결여를 보게 되어 메마른 일상생활 그리고 특히 자신의 육체와 욕구로부터 철저히 소외된다.
  심지어 「변신」에서는 순수 예술도 기업 세계의 결정체인 상품화, 즉 사물화에 좌우된다. 그레고르는 비록 생계 유지를 위해 자신의 내면 생활을 포기하더라도 여동생만은 아무런 걱정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에 정력을 쏟도록 하고 싶었고, 이러한 뜻은 곧 그레고르의 유일한 정신적 힘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레고르가 아끼던 여동생의 음악성은 어느 날 저녁, 그의 부모가 하숙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간소한 연주회를 베풂으로써 상품으로, 오락으로 전락된다. 딸의 연주회를 마련하는 부모의 행위는 딸의 음악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음악이라는 수단을 통해 딸을 혹사하고 착취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그 음악을 감상하는 하숙인들은 음악에 심취하여, 음악성의 깊이를 추구하기 보다는 호기심으로 식사 후의 무료와 권태를 달래며, 또한 경제력으로 그레고르의 가정을 지배하는 권력 의식을 충족시킨다.
  「변신」에서처럼 인간에서 벌레를 거쳐 하나의 사물로 이어지는 한 인간의 운명은 사회주의에서 인간의 사물화로 암시된다. 이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에 의하면 상품의 경제적 품질이 아니라 교환 가치에 의해서 개인의 사회적 지위가 상징되고 그다음에 인간의 물질화가 시작된다고 한다.
  (중략) 카프카 작품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의지에 어긋난 일방적이고 기능적인 직업속에 머물고 있다. 직접성과 전문성에 수렴(收斂)된 직업은 개인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무의미한 일로 느껴질 수박에 없다. 따라서 「변신」에서 그레고르는 이러한 직업에 대한 처지를 저주하면서 <악마여, 이 모두를 쓸어가 버려라!>(E 58)라고 외친다. 개인은 거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손에 조종당해 사물화되면서 자신의 결정이 환상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물질적인 발달만을 추구한 나머지 인간을 비참 속으로 몰아넣는 산업 사회의 능률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해서 카프카는 다음과 같이 극단적인 공격을 하고 있다. <산업에 있어서의 테일러 시스템과 분업은 끔찍스럽다. 거기에는 인간의 노예화 이상의 것이 들어있다. [......] 모든 창조의 가장 숭고하고 가장 범해서는 안되는 부분, 즉 시간이 불순한 기업적 이해(利害)의 그물 속에 빠져 버리게 된다. [......] 이처럼 심하게 능률화된 삶이란, 바라던 부와 이득 대신에 굶주림과 비참만이 자라날 수 있는 소름끼치는 저주로 가득 차게 된다. [......] 인간은 생물이라기보다 오히려 사물, 물건인 것이다.>(G 105)
  (중략)
  이런 식으로 카프카의 세계에서 기계화된 산업 사회에서의 천재성은 상실되고 모두가 일반화된 현대 인간의 처지가 된다. (중략)
  결국 산업 사회에서 개개인을 평가하는 규준은 천재성 등 인격이 아니라 이용가능성, 즉 기능적 업적 등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실존적 가치를 지녀야 할 어느 개체가 자신에 대응하는 집단 혹은 전체에 대해 소기의 값어치를 지니지 못할 때 그 개체의 배제가 현대 사회의 통념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개인적으로 천재성보다는 기능적인 직업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사회는 기술 진보 이외의 다른 생활 목적을 알지 못하고 이데올로기, 즉 마르크시즘, 파시즘, 종교 정신 등을 이용하여 인간을 동화시킨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사회, 즉 마르크시즘, 파시즘, 종교 정신 등에 의한 인간 동화의 결과는 인간의 착취이다.  (중략)
  카프카의 「변신」에 이러한 사상이 잘 암시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그레고르는 스스로의 가족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회사와 가정의 톱니바퀴가 되려고 영혼을 희생적으로 직장에 팔아 버린다. 「변신」에서 지배인은 아주 경멸적인 언사로 회사의 피고용인이 점점 능률이 떨어지면서 쓸모없이 되어 가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이때가 실은 대단한 이익을 남기는 시기는 못 된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을 하기는 하네. 그러나 잠자 군, 전혀 이익을 남기지 못하는 시기란 없는 것이며, 또 있어서도 안 되네.>(E 65) 이 진술에서 지배인이 그레고르의 직업적 처지를 혹독히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레고르의 판매고는 떨어지고 있어서 회사에서의 그의 처지가 위태롭다.
  그레고르는 엄청난 업무량, 진실되지 못한 대인 관계 등 직업에 대한 많은 불만에도 불구하고 5년 동안 성실히 일해 왔으므로 직장에서 자기 위치는 확고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레고르가 변신한 수 업무적 수단으로서의 이용 가치를 잃게 되자 나오는 회사 지배인의 태도는, 개인과 직업 사회는 상호간에 유용한 경제 수단으로서만 관계를 맺고 있음을 드러낸다. 선량하고 사심 없는 행동은 기업 세계의 눈에는 악하게 비쳐지는 것이다. 지배인의 언급에서 카프카는 거의 냉소적으로 인간이 얼마나 철저하게 시민 사회의 엄격한 기능주의와 노동 이데올로기에 얽혀있는 가를 보여준다. 고용주는 피고용인에게 직접적이고 외부적인 권력을 통해서 피고용인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둔다. 그 때문에 그들 피고용인은 <외적 권력의 연관 속에서 변형된 정신에 의해 간접적으로 지배된다. 즉 외적 제재가 내적 통제로 대치되는 결과를 초래한다.>(Wilhelm Arnold, Hans Eysenek, Richard Meili, Lexikon der Psychologie, Bd. 3, Freiburg, Basel, Wien, 1972, S. 376.) 달리 표현하면 기업 세계가 개적인 삶 속으로 침입하게 된 것이다.
  「변신」에서 인간이 직업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상황이 그레고르의 부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는 한 은행의 말단 수위직을 얻고난 후 가장(家長)으로서의 태도보다는 오히려 수위 직책이 가정에서도 그에게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심지어 부친은 잠을 자면서까지 제복을 벗으려 하지 않으며 상관이 부를 때는 언제나 뛰어나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가족이나 그레고르에 대해서만은 이성을 잃고 지배자가 되려 한다. 이러한 직업 사회화 때문에 그레고르 가족에게 개인적 삶이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생략)


4. 개인과 조직의 대립
(생략) 카프카 문학에서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목표의 제한이냐 아니면 조직으로서의 개혁이냐의 어려운 선택이 제시된다. 그런데 사회의 발전은 오직 조직이나 집단을 이루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그 사회에서 개인은 이탈되어 말살되고 있다.
  결국 카프카의 작품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망각되고 상실된 생의 의미를 새로이 모색하려는 시도로서 허위적인 사회 질서, 법의 질서, 종교 질서에 대한 풍자 이상의 힘을 소유한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모색을 시도한 결과 토지 측량사 K 등 주인공들은 좌절만 당할 뿐이다.(김용익, 『프란츠 카프카 연구』, 삼영사, 1984, 88면.)
  이러한 좌절의 체험이 특히 <카프카에스크>란 단어에 잘 암시되어 있다. 카프카에스크는 전율, 불안, 소외, 좌절을 나타내는 표제어이다. 이것은 불투명하고 의미 엇는 운명에 어쩔 수 없이 내맡겨져 있는 상태에 대한 상념이며, 테러, 죄, 절망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무가치함과 무력함을 느끼게 하는 관료주의 조직 및 익명의 권력 구조에 의한 위협을 상기시킨다. (중략)
  현대의 유행어가 된 <카프카에스크>란 단어가 온갖 악몽.미망(迷妄).유령적인 것, 인간의 사고와 행동과 꿈의 부조리, 그리고 현대의 관료주의 메커니즘, 인간을 노예화하는 제도의 부조리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문학의 본질을 가늠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카프카에스크는 물론 우리 인식의 전형으로 카프카 작품에서는 주로 조직에 의한 개체 상실의 상념으로 묘사되고 있다.
  예를 들어 「변신」에서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었을 때 자신이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E 57)는 작품 처음의 문장처럼 젊은 외판원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서 벌레로의 <변신>은 집단에 제대로 융화되지 못한 사람이 느끼는 소외감을 의미한다. <소외>의 근본적인 의미는 <이질성(異質性)>에 있으며,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억압하고 죄어 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다르게 갑충이 된 그레고르는 고립된 상황에 수동적으로 지배를 당하는 처지가 된다.
  그레고르는 여러 차례 가족 공동 사회의 영역에 도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결코 <만남>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갈 것을 강요받으며, 그때마다 상처를 입는다. 따라서 한 개인이 동물로 변신하는 상상을 하거나 그 상상이 현실로 나타나는 상태는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자신이 소속되기를 원하는 공동체로부터 소외를 반영하는 것이다. 엠리히는 이러한 그레고르의 실존 상황을 가리쳐 <이 벌레의 가상적 환상적 비실재성은 바로 그레고르의 의식 속에 숨은 자아의 실제가 현실 생활에 침투된 현상으로 써 그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최고의 실재성>이라고 했는데, 이는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내용과 유사하다.
  카뮈의 시지프는 자신의 불행을 의식으로써 극복해 나간다. 즉 그의 시지프는 불가해한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분명한 의식으로 항거하며, 그 운명을 대범하게 무시함으로써 극복한다. 카프카도 임의적 행위에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 지각을 잃은 - 대담한 것을 결단력 있게 지속시킨다.(W. Emrich, Kafka und der literarische Nihilismus, 119, in: Maria L. Caputo-Mayr(Hg.), Franz Kafka, Karmstadt, 1978, S. 115.) 그러나 이렇게 주인공이 강한 의식으로 자신의 상황을 개척할 만큼 그는 고립에 빠져들게 된다. 결국 카프카의 인물들은 현실의 고립에 대해 맹목적인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5. 세계 상실의 비극
1) 가정에서 소외
  삶의 가장 본질적인 단위는 가정이다. 외부에서의 갈등을 풀 수 있는 가장 본질적 장소가 가정인 것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소외는 먼저 가정 생활에서 파생되어 역설적이다. 사회가 가정으로 침투할 때 가정에서도 지속적인 진실한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사회처럼 가족에서도 금전이 개재되어야 행복이 수반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생계비라는 명목으로 벌어 들인 돈을 탁자 위에 놓을 때마다 고마운 마음으로 가족들은 돈을 받을 수 있었고 그레고르도 이에 대한 기쁨으로 돈을 내놓았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가족들이나 그레고르는 익숙해져 그것을 예사로 생각해 버리고, 그렇다고 서로 각별히 따듯한 마음이 오고 가지도 않는다. 오직 여동생만이 아직도 그레고르와 친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결론적으로 가정에서 어느 개체의 실존적 가치란 전체, 다시 말해서 전 가족에 대한 부양 의무를 충실히 지킬 때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그레고르는 가족의 부양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을 때 전 가족의 환심을 샀지만 갑충으로 변신된 뒤에는 이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즉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모해 버린 뒤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노동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의 부모와 여동생도 이미 그레고르의 실제 가족이 아니다. 결국 그레고르의 존재는 단지 가정을 위한 것이었고, 가족들에게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명종 쪽을 바라보았다. 6시 30분이었다. [......] 다음 기차는 7기에 출발한다.>(E 58 f.)라는 내용이 보여 주듯이 그레고르의 생활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직업 생활로 철저히 짜여 있었다. 그러다가 몽매간에 돌아온 영혼, 즉 본래의 자기 자신이 가족의 생활을 위협하는 갑충이라는 엽기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자 그는 가정에서도 소외된다.
  그레고르를 다시 인간으로 변신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모티프는 아마도 가족의 관심일 것이다. 그러나 가족은 그를 철저히 외면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레고르의 방에서 물건을 치우는 장면에서 단적으로 예시된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가 방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는 것을 발견한 여동생은 어머니를 동원해 그레고르의 방에서 물건을 치우려고 한다. 물론 외견상으로는 그레고르가 자유로이 방을 기어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고 주장하지만, 그레고르를 기억나게 하는 옷장과 책상을 치우는 것을 그의 과거의 주체성, 즉 가족의 일원으로서 아들과 오빠로서의 주체성을 부인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오직 어머니만이 그레고르의 방에서 그를 연상시키는 옷장을 치우려는 딸에게 가구를 치워버린다는 것이 <그레고르의 회복에 대한 모든 희망>(E 84)을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방을 예전 그대로 놓아 두자고 제안한다. 그래야만 그레고르가 다시 가족의 일원인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 갑충으로서의 과거를 쉽게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어머니가 그레고르의 회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음이 드러나지만, 그것은 어떤 실천적 행동도 수반하지 않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희망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가정에 얽매이다가 벌레로 변해 버린 그레고르의 고뇌는 자기 신앙에 일어난 육체적인 변화보다도 먼저 생계 부양자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된, 이른바 한 가정에 예속된 윤리적인 실존자로서의 죄의식이다. 그에게 주어진 이러한 죄의식은 무엇보다 자기 한 사람을 오인해서 지금까지 환희와 행복에 차 있던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온다. 이렇게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감이 몸에 밴 그레고르는 빨리 갑충의 벌레에서 벗어나 출근해야겠다는 생각에 다급하지만, 가족은 오히려 그가 변신한 상황에 차츰 적응하며 자구책을 마련해 간다. 그러므로 더 이상 돈을 벌어 오지 못하는 <벌레>가 된 그가 생활에 불편까지 주게 되자 가족들은 그를 죽이려 든다. 결국 그레고르는 부친이 던진 사과가 등에 박히는 중상을 입고 사랑하는 동생이 밖에서 잠가 버린 방 안에서 죽는다.
  가족은 거대한 곤충으로 변한 그레고르를 방에 가두고, 그의 외양을 견디지 못하고 악의를 두려워한 결과 그의 죽음에 기쁨의 기색까지 나타낸다. 말라 비틀어진 갑충의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처럼 빗자루로 쓸어버리고 부친은 비정하게도 비애가 아니라 해방과 구제의 안도감이 곁들인 십자(十字)를 그은 다음 가족들과 더불어 이른 봄날의 햇빛을 받으면서 교외로 소풍을 가며 그동안 몰라보게 성숙한 딸의 새로운 삶에 희망을 건다.
  여기서부터 무수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린다. 사회학적 관점에선 시민 가족 이데올로기가 허상이라는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 소설이 밝혀 주는 무서운 진실은 가장 아름답고 애정어린 인간 관계가 미망(迷妄)에 근거한 것이라는 통찰이다>(W. Emrich, Franz Kafka, Frankfurt/M., 1957, S. 122.)는 엠리히의 말처럼 그레고르의 변신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보여 준 가족들의 태도는 현대의 가족 사회에 진정한 애정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개인은 결국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아서 산업 사회에서 극한의 소외 상황에 놓인다. 기계의 한 부품처럼 되어 버린 개인이 벌레같이 느껴지는 감정을 「변신」은 아예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해버린 인간이 결국 비참하게 죽는 모습으로 덤덤하게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변신」에서 독자는 작품의 전개를 따라가는 동안 주인공 그레고르가 한 마리의 갑충이 될 수밖에 없는 참담한 상황을 스스로 읽어 내게 된다.
  이렇게 그레고르의 가족이 그를 버리는 내용에서 변신이 되면 주체성이 상실되어 같은 가족이나 종족도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는 오랜 병을 앓다가 죽은 아들의 유골을 화장하고 온 직후에 맛있는 음식을 찾고 내일 걱정하는 오늘날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레고르의 죽음은 고통스런 슬픔이 아니라 오히려 무거운 짐으로부터 가족을 해방시킨 것이다.
 

제6장 카프카 문학의 신화적 분석
3. 작품의 신화적 분석
3) 동물의 인간으로 변신
  「변신」에서 그레고르처럼 인간이 동물로 변신하는 것을 <격하 변신>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동물로의 변신은 가치 하락이나 치욕스런 비인간성으로 생각되어 발전사(發展史)에서 비인간적으로 좋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개념에서 동물은 예속되는 존재로 여겨져, 인간의 동물로의 변신은 엄청난 불명예로 생각되는 것이다. 민담의 기념비적인 상징성을 저술한 바이트와 프란츠는 동물로의 변신을 <동물 단계로의 역행>이라고 부르거나 <인간이 더욱더 무의식으로 되돌아감, 즉 인간 개성으의 필요한 무의식>으로 해석했다.(Max Lüthi, So leben sie noch heute, Betrachtungen sum Bolksmärchen, 2. Aufl, Gttingen, 1976, S. 51.)
  (중략) 동물로의 변신이 가치 하락으로 여겨지므로, 여기에서 구원의 염원인 인간으로의 변신이 요구된다. 카프카 작품에서 동물로 치환(置換)된 주인공들은 고전적인 우화나 낭만주의 동화의 그것들과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이들 우화나 동화에서 동물 주인공은 일종의 인간으로 이해되며 위기가 극복되면 다시 인간으로 바뀐다. 여기에서 동물들은 위험한 일에 직면한 어린 아이들을 도와 구원한다. 이것은 그림 동화에서 동물들이 젊은 왕자들 혹은 바보들이 위험한 시험과 모험을 극복하도록 도와주거나, 그들을 위해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 주는 것과 동일하다. 이렇게 우화나 동화에서 동물로 변신된 주인공이 위기 등이 극복되면 다시 인간으로 되는 만면, 카프카의 변신된 동물은 사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어 그 이상 인간 회복이 불가능하다. 일종의 <인간은 사물이 된다>는 명제의 출발로 격하 변신이 되는 것이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동물로 변신된 주인공이 다시 인간으로 변신 되는 내용은 희망으로만 전개될 뿐이다. 예를 들어 「변신」에서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가 방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는 것을 발견한 여동생은 어머니를 동원해 그레고르의 방에서 물건을 치우려고 한다. 물론 외견상으로는 그레고르가 자유로이 방을 기어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고 주장하지만, 그레고르를 기억나게 하는 옷장과 책상을 치우는 것은 그의 과거의 주체성, 즉 가족의 일원으로서 아들과 오빠로서의 주체성을 부인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레고르의 방에서 그를 연상시키는 옷장을 치우려는 딸에게 가구를 치워 버린다는 것이 <그레고르의 (인간으로의) 회복에 대한 모든 희망>(E 84)을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방을 예전 그대로 놓아 두자고 제안한다. 그래야만 그레고르가 다시 가족의 일원인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 갑충으로서의 과거를 쉽게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렇게 어머니는 그레고르의 인간으로 변신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희망일 뿐이지 카프카 작품에서 실제로 인간에서 동물로 된 존재가 다시 인간으로의 변신되는 일은 없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윤리적 존재>다. 중요한 것은 <동물처럼 번식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영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존재하느냐>이다. 살아 있는 한 인간은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지나칠 수 없다. 따라서 가치 하락적 동물은 인간으로 변신은 격상 변신이라고 불린다.
(생략)


4) 창조적 해방
  카프카 작품에서 인간이 동물로 되거나 동물이 인간이 되는 신화적 기능은 미학적 유희의 가능성으로 현실에 대한 압력으로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카프카가 볼 때 세상에는 미학적 요소가 끊임없이 작용한다. 그러나 의미 부여로 생긴 미학적 거리감이나 인간이 동물 되기나 동물의 인간 뒤기는 신화적 변신이 <현실적 부담을 경감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쿼드는 공포의 이야기에서 그 공포를 피하는 시도를 한다.(Vgl. Odo Marquard, in: Manfred Fuhrmann(Hg.), Lob des Polytheismus, Über Monomythie und Polymythie, S. 107 f. in: Ders., Abschied vom Prinzipiellen, Stuttgart, 1984, S. 528 (Kap. Erste Diskussion: Mythos und Dogma)) 이러한 신화이론은 몇몇 문제성을 제외하고, 특히 마쿼드가 현실의 압박을 덜어 주는 신화의 기능을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의 합리화 전략을 사용한 예(Odo Marquard, a.a.O., S. 91~116.) 외에 카프카에서는 현실의 압박을 덜어 주는 기능이 있다. (중략) 따라서 신화적 기능이라 할 수 있는 카프카의 변신도 한편으로는 현실적 압박을 경감하는 신화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동물이나 인간의 변신은 또 다른 형태의 삶으로 구제를 의미한다. 이러한 변신은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 현실의 압박을 경감시켜주어 현실에 대한 미학적 의미를 지닌다. 신화옹호론자에게 신화는 사고와 표현 형식으로 삶과 행동의 형태라고 케레니는 주장한다. 그에 주장에 의하면 사고와 삶 사이에는 어떤 틈이 있을 수 없다. (Karl Kerényi, Was ist Mythologie? S. 219, in: Ders.(Hg.), Die Eröffnung des Zugangs zum Mythos, ein Lesebuch, Darmstadt, 1982, 212~233.)
  이러한 동기에서 「변신」에서 그레고르의 동물로의 변신은 해방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변신」에서 그레고르의 신화적 변신은 일종의 구원적 모티프를 강하게 암시한다. 어느 날 아침 동물로의 깨어남은 의식의 깨어남, 즉 자기 인식의 행위이다. 모름지기 물질적인 가족 구조가 지니고 있는 힘, 모든 부조리한 인간의 모순된 힘으로부터 재창조되는 것이다.
  출근하기 싫고 그대로 빈둥거리고 싶은 유혹적 소망은 갑충 변신으로 표출되어 실제로 출근을 하지 않게 된다. 직업으로부터 일탈하여 자유로운 자아를 찾고 싶은 소망이 역설적으로 흉물스런 갑충의 변신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변신」에서 그레고르의 갑충으로 변신은 <이른바 인간 세계의 절대적 파기>를 뜻한다. 외판사원 직업에 나름대로 충실몰 그레고르의 벌레로의 변신은 자본주의적 직업 세계에서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정체성에서 해방을 의미한다. 한 집안의 경제적 지주인 선량한 그레고르의 머리에 어느 날 문득 책임을 저버리고 싶다는 저주스런 생각이 번득이고 바로 이때 갑충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엠리히는 카프카의 이렇게 변신된 동물을 인간의 <해방적 자아>(W. Emrich, Franz Kafka, Frankfurt/M., 1960, S. 115.)라고 언급한다. 조켈은 <자아의 분열>이 변신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변신은 결과적으로 가정에 대한 책임과 일과 의무로부터 도피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Walter H. Sokel, Franz Kafka, Tragik und Ironie, Frankfurt/M., 1976, S. 82.)
  이렇게 그레고르는 변신을 통해 가정의 경제적인 억압으로부터 도피하여 그의 변신은 일종의 <자신의 재창조>(R. Lachmann, Erzählte Phantastik, Frankfurt/M., 2002, S. 370.)로도 볼 수 있다. 재창조란 그대로 자신으로 머무는 지속 반복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여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중략)
  그대로 머묾과 반복은 폐쇄적이며 제한되고 갇혀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재창조로 카프카는 이를 변신으로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그레고르처럼 갑충으로 변신하여 파멸이 구원이라는 <역설적 관계>가 성립된다. 죄를 의식하는 자가 가장 구제에 가깝고, 반대로 죄를 의식하지 못하는 자는 언제까지나 현세의 권력에 예속해 있는 것이다. (W. Emrich, Franz Kafka, Frnkfurt/M., 1960, S. 122 f.)
  여기에서 카프카 특유의 역설적 사상을 느낄 수 있다. 즉 신이 창조한 세계에 악이 없었다면 자유가 설 여지가 없는, 선택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계가 되어 버렷을 것이다. 상응하는 악덕이 없다면 미덕을 인식할 수 없으며, 빗나가도록 유혹받지 않는다면 미덕을 수행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신은 선과 악을 구분하고 둘 간에 거리를 두어 우리가 악의 본질과 대비해 보도록 함으로써 선의 본질을 파악케 하였다. 악의 배제는 선을 없애는 것이다. 종교 개혁가 루터는 개혁가답게 <용감하게 죄를 지어라, 그리고 투철하게 회개하라!>고 가르쳤다. 죄를 지을 수 있는 자만이 회개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성 바오로는 그렇게 혹독하게 기독교인을 학대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토록 투철한 신앙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러한 역설적 관계가 카프카 문학의 본질이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사유 과은 어떤 때는 직접적으로 부정에 의해 제거되고, 어떤 때는 그 궤도의 반대 방햐으로 전향을 통해 밀려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놀랄 정도로 전도된 근본 상황에 속한다.>(Gerhart Neumann, Umkehrung und Ablenkung: Franz Kafka, Gleitendes Paradox, in : Richard Brinkmann und Hugo Kuhn(Hg.), Deutsche Bierteljagrsschrift für Literaturwissenschaft und Geistesgeschichte, 42. Jahrgang, Stuttgart, 1968, S. 704.) 이러한 역설적 상황은 <신화의 재난에 무엇으로 대비할 수 있을까? 찾는 사람은 발견하지 못한다. 찾지 않는 사람이 발견하는 법이다>(F. Kafka, Hochzeitsvorbereitungen auf dem Lande. hg. v. Max Brod, Frankfurt/M., 1986.)라는 카프카의 잠언에 신화의 내용으로 잘 나타나 있다.
(생략)


5) 변신에서 인간적 주체성
  민간 동화에서는 어린이들 혹은 연인들이 동물 혹은 사물로 변신을 통해 마녀나 악한 마술사의 추적을 피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들 주인공들은 격하 변신을 의미하지 않으며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명제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는다. 이들에게 가끔 적용되는 <비인간적>이라는 말도 인간의 마음에 도사린 칸트적 야수성(野獸性)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에게서 소외나 이화감(異化感)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카프카의 작품에서도 변신된 동물에서 격하 변신을 느끼지 못하며 <동물도 인간이다>라는 명제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변신」에서 인간인가 하면 인간 아닌 벌레요, 벌레인가 하면 벌레 아닌 인간인 그레고르의 존재는 매우 역설적이다. 변신은 그레고르의 외면에 전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외면은 그를 동물의 자태로 바꿔 놓았으나 그의 내면에는 그 같은 변화가 없다. 그의 내면은 인간의 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의식은 변신 이전의 그와 변신 이후의 그가 동일인임을 알게 한다. 변신한 그레고르는 변신 이전에 겪었던 일들을 회상하고, 또 그것에 기초하여 현재와 미래의 일들을 생각한다. 변신한 자신을 현실적 상황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그레고르는 육체적으로 동물적 존재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인간저인 식사나 쾌락을 거부한다. 반면 정신척인 추구는 여전히 인간적으로 음악에 대한 동경이나 인간의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그레고르가 겉은 동물이고 속은 인간이라는 이중성의 존재인 데서 가족들의 인식도 서로 다르게 발생한다. 그레고르는 너무나 징그럽고 <끔찍한 자태>(E 99)로 변했다. 가족들은 그런 벌레의 자태와 동작을 접할 때, 또 그런 것을 의식할 때 자신들을 그레고르와 동일시 않는다. 따라서 가족들은 그런 벌레의 존재로서의 그레고르와 일치감을 갖지 않고 거리를 갖게 된다. 반면에 가족들은 내면적인 인간적 존재로서는 그레고르와 일치감을 갖고, 그의 입장에 서게 된다. 가족들이 그레고르에 대해서 이렇게 이중적인 입장을 갖게 된 결과, 한편으로는 그레고르에게 공감과 동정을 갖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시각을 벗어나 제3자의 안목에서 그의 이야기를 관찰하고 그 전체의 의미 관계를 파악하게 된다.
  「변신」의 끝 부분에서 여동생 그레테는 그레고르와 동인성(同人性)을 부정한다. 그레고르의 취업이 그의 가족 전체의 생계를 감당한다는 생각에서 그레고르의 인간성이 연상되다가, 약 한 달 동안 직장 활동을 하지 못하는 오빠 치다꺼리에 짜증이 날 대로 난 그레고르의 여동생은 갑충 오빠의 사람 취급을 거절하기 시작하는 태도를 보이며 <저것이 그레고르 오빠란 생각을 버리면 돼요. 저 갑충이 그렇게 오랫동안 오빠인 줄로 믿었던 것이 불행의 씨였어요. 어떻게 저것을 그레고르 오빠라고 믿을 수 있단 말이에요. 만일 저것이 그레고르 오빠라면, 사람들이 이런 동물과 함께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벌써 알아차렸을 게 아니에요>(E 101)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오직 그녀의 이기주의적인 심사(心思)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도 처음에 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갑충 그레고르가 오빠임을 의심치 않았고, 그녀가 태도를 바꾸게 된 마지막에도 갑충 그레고르 오빠의 형태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신한 그레고르는 여전히 인간 의식과 양심을 갖고 직장과 가족의 생계를 염려한다. 그 기괴한 갑충의 생활은 가족들의 일상적 평범성과 병존하여 양자간의 단절에서 불가사의한 교섭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갑충으로 변해서 방안을 기어다니지만 그레고르는 역시 전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인간 그레고르로 자아가 분해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가 존재하고 있는 곳인 <방>의 낱말이 당연히 인간의 사용 공간을 의미함에도 새삼스럽게 <인간의 방>으로 강조된다. 작품의 시작에서 이미 벌레의 몸이 되었지만 그레고르는 죽을 때까지 이 인간의 방에서 지내게 되어 그에 대한 인간의 주체성의 본질에 대한 의심이 없다. 그것은 그레고르의 주체성은 외면적 육체적 형태에 있기 않고 그레고르의 자아라고 불리는 정신력에 있다는 믿음이다.
  따라서 갑충이 되었지만 그레고르는 여느 인간 못지않게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예민하게 느낀다. 그 자신이 벌레로 변한 것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여타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의해서 확인받은 이후 그의 가족들 간의 대화를 통해서 변신 이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가정 경제 상황은 물론 가족들의 일 거수 일 투족을 모두 알게된다. 즉 벌레로 변한 그의 육신과는 대조적으로 정신 세계, 의식 세계는 완전히 인간인 것이다. 그러기에 변신이 됐으면서도 그레고르의 죄의식, 즉 의무감에서 오는 죄책감은 지워지지 못한다.
  따라서 그레고르는 폐쇄된 자기 방에서 벌레가 됐지만 부모와 여동생의 모습을 연연히 그리워하는 인간적인 면을 여전히 지녀, 다시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다정스런 가족의 일원이기를 갈구하면서 온갖 수단을 강구한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자기가 부모나 여동생에게 이런 훌륭한 집에서 살림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는 것을 자랑으러 생각하지만, 이제 그 모든 평화와 행복과 만족이 공포감으로 끝을 맺어야 한단느 생각에 몸서리친다. 벌레로 변신한 자기 처지로 인해서 점점 가세가 기울어지게 되고, 이미 5년 전에 사업에서 실패하여 은퇴한 부친이 다시 어느 은행 수위복을 입어야 하는 궁지도 염려한다. 또 더 이상 바이올린 교습을 받을 수 없게된 여동생을 위해서 그레고르는 서글픈 비애감을 되씹는다. 육체적으로는 벌레지만 정신적으로는 인간의 본질로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레고르는 <어서 일어나야지>(E 58), <어서 기차를 타야 할 텐데>(E 58) 그리고 <전처럼 부모님에게 돈을 가져다 드리고 집안의 평화를 깨뜨리지 말아야 할 텐데>(E 58)라는 논리적인 죄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변신되었으면서도 그레고르의 내심에서 부모와 여동생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자기의 가정을 구하기 위해서 <상반신을 침대 밖으로 끌어 내려고 시도>(E 61)도 해보고 <조심해서 머리를 침대가로 돌려>(E 61) 보다가 여의치 않자 <몸 전체의 균형을 잡고 몸부림을 치면서>(E 61) 방 안에서 <큰소리가 나면 온 집안을 놀라게 하진 않더라도 집안 사람들이 걱정할 것이라고 생각>(E 62)하여 아무도 문조차 열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전력을 다해 침대에서 뛰어내린다.>(E 63) 이렇게 간신히 뛰어내리는 순간에도 그레고르는 회사와 가족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족에 대한 인간애가 예술적으로도 영감을 받는다.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한 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음식이 없어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단식 예술가』의 단식 광대가 경이적인 단식을 하면서 <저는 입에 맞는 맛있는 음식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을 찾아냈다면, 저는 결코 세인의 이목을 끌지 못했을 테고, 당신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배가 부르게 먹었을 것입니다>(E 199 f.)라는 말과 같다. 그러다가 그레고르는 벌레가 된 이후에 자신에게 알맞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음식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육신의 생명 연장을 위한 음식이 아니고 그의 정신이 강렬히 갈망했던 정신적 양식인 예수르 즉 여동생 그레테의 바이올린 연주라는 음아기었다. 즉 그레고르는 하숙생들의 요청에 의하여 우연히 듣게 된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그것이야말로 자기가 찾던 음식이라고 여긴다. 결국 갈망했던 음식을 마침내 찾은 것으로 여긴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잠깐 잊고 방에서 기어나와 인간 세계에 들어가는 것에서 분해되거나 파괴될 수 없는 인간적 본질을 볼 수 있다.
-  음악에 감동되는데도 짐승이란 말인가? 자기도 몰랐던 양식으로의 길이 열리는가 싶었다. 그는 여동생이 있는 데까지 나가려고 결심했다. 그녀의 스커트를 잡아당겨 바이올린을 가지고 자기 방으로 가자고 의사 표시를 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연주에 보담할 자는 자기 말고 이곳에서는 업기 때문이다. 적어도 생존하고 있는 동안 그녀를 방 밖에 내보내지 않으리라. 흉측한 이 모습도 도움이 되겠지. 문 옆에 있다가 침입자에게 덤벼들리라.(E 98 f.)-
  여기에서 동물 변신의 긍정적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동물로 변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여겨져 <격하 변신>이라 불리는 것과 반대로 여기서는 인간이 동물로 변신하는 것이 긍정적 의미를 가져 <격상 변신>으로 되는 것이다. 문제가되는 것은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양식>이다. 동물인 그레고르는 동시에 동물 이상으로 동물 속에 인간적 주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변신은 동물 안에 있는 인간적 존재에 대한 동경을 일깨우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음악은 카프카에게 사실 인간을 모든 지상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다.
  물론 카프카 문학 고유의 애매성 때문인지 그레고르에 미친 음악의 영향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폴리처는 그레고르가 갈망하던 미지의 양식이 음악과 동일한지 그리고 음악 속에서 구원을 발견했는지에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작품에서 우리는 음악 그 자체가 그레고르가 갈망하던 천상의 양식이 아니라 단지 그 양식에 이르는 길에 지나지 않음도 알 수 있다. 여동생이 연주하고 있는 동안 그레고르는 가족과의 화해, 특히 여동생과의 화해를 꿈꾼다. 그러나 갑충을 본 하숙생의 공포에 찬 비명 때문에 그레고르는 이 꿈에서 깨어나고 바이올린 소리는 갑자기 중단된다. 이를 두고볼 때 여기서 음악이라는 수단 때문에 일순간 소음으로 가득찬 세계가 정지되고 보다 나은 세계로의 돌파가 가능한 것으로 보였을 따름이라는 이론도 있다. (Heinz Politzer, Franz Kafka, Der Künstler, Frankfurt/M., 1978, 128 f.)
  그러나 이러한 일부 이론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내용을 종합해 볼 때 결국 그레고르는 여동생 그레테가 연주하는 음악을 통해서 인간으로 동물적 속박 상태를 초월했다고 볼 수 있다.

(생략)
Posted by Hy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