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문헌★
김욱동, 『미국소설의 이해』, 조합공동체 소나무
(ISBN 9788971396063)
- p.313-323에서 맘에 드는 부분~ ⓐ글이 이탈자(?)에 관한 해설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15번 전화했다는 둥 소통의 문제에서 다뤘다. 마치 누군가가 호밀밭의 파수꾼으로쓴 논문을 보는 듯했는데, 뭐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는 거지 꼭 이렇다는건 아니니까... 곧 ⓒ에서 쓸 해설은 '순수'에 관한 건데, 나는 그게더 마음에 든다.


J. D. 샐린저: 『호밀 밭의 파수꾼』

  (앞에 많이 생략) 주인공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위선과 기만과 가식이 없는 정직하고 성실한 세계이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은 겉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에 괴리가 없는 세계를 갈구 한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위선과 기만과 가식을 발견하게 되며, 그럴 때마다 적잖이 메스꺼움과 구토를 느낀다. 홀든은 어른들의 세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위선과 기만의 세계를 두고 '사이비'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이 '사이비' 세계를 끔찍이 싫어하는 그는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홀든이 메스꺼움을 느끼는 이 '사이비' 세계는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인간 관계에서 잘 나타난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말로 상대방을 속이기 일쑤이다. 예를 들어 홀든이 염증을 느끼는 표현은 '행운을 빕니다!'라든지, '만나서 반갑습니다!'라든지 하는 겉치레 인사말이다.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행운을 빌기는커녕 오히려 저주를 빌면서도, 또는 상대방을 만난 것이 전혀 반갑지 않으면서도 내용이 텅 빈 이러한 인사말을 입버릇처럼 서로 주고받는다. 예를 들어 펜시 예비학교의 역사 선생 스펜서 씨가 이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모르는 홀든에게 "행운을 빈다!"라고 말할 때 그는 적잖이 구토증을 느낀다. 우연히 어느 술집에서 만난 형 D. B.의 옛 애인 릴리언 시먼스가 그에게 "만나서 반갑구나!"라고 인사를 할 때에도, 그리고 옛날 학교의 영어 선생인 안톨로니 씨 부인이 전혀 마음에 없으면서도 어머니의 안부를 물어올 때에도 그는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러한 겉치레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사실이다.
  (중략)
  인간의 위선과 기만이 가득 차 있는 이 '사이비' 세계는 인간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종교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홀든은 장의사 사업으로 성공한 펜시 예비학교의 한 졸업생이 모교로 돌아와 후배들에게 강연하는 것을 듣고는 적잖이 메스꺼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고 있지만 홀든이 보기에는 위선자 가운데서도 위선자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형식적이고 제도화된 기독교에 대한 주인공의 혐오감은 그가 호텔 침대에 누워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가롯 유다를 두고 퀘이커 교도인 옛 친구와 논쟁을 벌이던 일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 자신의 부모는 서로 종교가 다르며 자신은 아예 무신론자라고 드러내 놓고 밝히는 홀든은 목사가 설교할 때 본래의 목소리를 버리고 이상한 목소리로 바꾸어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태도에 대해서도 적잖이 메스꺼움을 느낀다.
  홀든이 느끼는 인간의 위선과 기만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는 서머셋 몸과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인간의 굴레』(1915)와 『무기여 잘 있거라』(1929)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이 삶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그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은 기만하거나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런데 위선과 기만과 가짜가 가져다주는 피치 못할 결과는 바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신뢰감의 상실과 정신적 교섭이나 교감의 실패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통하여 작가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문제는 바로 현대인이 맞부딪혀 있는 의사소통의 어려움이다. (중략)
  주인공 홀든은 학교 친구들은 물론이고 교사 그리고 심지어는 부모와도 참다운 의미의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남동생 앨리와 여동생 피비와 어느 정도의 정신적 교섭을 맺고 있을 뿐이다. 주인공이 사회 곳곳에서 발견하고 또한 그것으로부터 크게 절망하는 의사 소통의 상실이나 부재는 전화를 걸려고 하지만 제대로 걸리지 않는다든지, 어쩌다 전화가 연결되어도 도중에 자주 끊긴다든지, 또는 메시지를 보내지만 좀처럼 수신인에게 배달되지 않는다든지 하는 상징적인 사건을 통하여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누구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끼는 홀든은 이 작품 전체를 통하여 무려 열다섯 번이나 전화를 건다. 그러나 이 가운데에서 오직 네 번밖에 성공하지 못하며, 그것마저도 대개의 경우 불발로 끝난다. 마찬가지로 그는 여러 번 입으로나 편지로 남에게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찬찬히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나마 의사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사람은 하나같이 나이 어린 소녀이거나 소년이라는 점이다. 어른들과는 좀처럼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나이 어린 소녀나 소년과 의사 소통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아직 성인 세계의 허위나 기만에 물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어른들의 세계에서 크게 실망을 느끼는 홀든은 차라리 뉴욕 같은 대도시를 벗어나 서부 지방의 시골로 도피하기로 결심한다. '양지 바른' 곳에 조그만 오두막을 짓고 귀머거리와 벙어리로 행세하며 외부세계와 모든 교통을 차단한 채 홀로 조용히 살고 싶어한다. 그가 그토록 갈구하는 이 '양지 바른' 세계는 위선과 기만이 그리고 가식이 없는 곳, 즉 개인이 사회의 그릇된 가치관에서 벗어나 참다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다. 결국 홀든은 '아름답고 평화스런' 이러한 이상향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그 이상향에 대한 향수를 끝내 버리지 못한다.
  (중략)샐린저의 대부분의 작중인물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사랑마저도 인간이 아니라 사물에 쏟는다. 물질주의가 사랑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용 가치보다는 교환 가치가, 본질적이고 내재적인 가치보다는 상품 가치가 오히려 잣대가 된다. 이것이 1950년대에 널리 퍼져 있는 미국 중산층의 가치관이었고, 홀든 코울필드는 바로 이러한 기성 세대의 가치관에 가차없는 조롱과 경멸을 보낸다.
  기성 세대에게는 누가 더 좋은 집과 직장과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성공의 척도가 된다. (중략) 자동차보다는 차라리 말을 갖고 싶다는 홀든의 절규는 물질주의 가치관으로 잃어버린 인간애에 대한 뜨거운 정열과 신뢰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하 생략)
Posted by Hy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