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접어둔 페이지'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08.08.13 위대한 개츠비
  2. 2008.08.03 박사가 사랑한 수식
  3. 2008.07.26 자기 앞의 생
  4. 2008.07.18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p.38)
  지나가던 고양이 그림자가 달빛에 어른거리는 것이 눈에 띄자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50피트 떨어진 곳에 또 한사람의 모습이 이웃집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나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서서 은빛 후춧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별들을 바라보고 잇었다. 한가로워 보이는 동작과 잔디를 굳게 딛고 선 안정된 자세로 미뤄 보아, 바로 어디까지가 자기 몫의 하늘인지 살펴보려고 나온 개츠비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부르려고 마음먹었다. 베이커 양이 저녁을 먹으면서 그에 관해 얘기했던 것으로 소개는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러나 갑자기 그가 혼자 있고 싶다는 암시를 보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두 팔을 어두운 바다를 향해 뻗었는데, 나는 멀리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그가 부르르 몸을 떨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무의식중에 나도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조그맣게 반짝이는, 부두의 맨 끝자락에 있는 것이 틀림없는 단 하나의 초록색 불빛을 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다시 개츠비를 쳐다보았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없었고, 나는 어수선한 어둠 속에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p.133~134)
  집 안을 구경한 뒤 우리는 저택의 대지와 수영장 그리고 수상 비행기와 한여름의 꽃들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개츠비 저택의 창밖으로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우리는 나란히 서서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안개만 끼지 않았더라면 만 건너에 있는 당신 집이 보였을 겁니다." 개츠비가 말했다. "그곳의 부두 끝에는 항상 초록빛 불이 켜져 있더군요."
  데이지는 느닷없이 개츠비에게 팔짱을 끼었지만 그는 자기가 방금 한 말에 대해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았다. 아마 그 불빛이 지니고 있던 엄청난 의미가 이제 영원히 사라졌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를 데이지와 갈라놓았던 머나먼 거리와 비교해 보면 그 불빛은 그녀와 아주 가까이, 거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것 같았다. 달 가까이 있는 별처럼 그렇게 가깝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다시 부두에 켜져 있는 초록 불빛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게 마법을 부렸던 물건들 중 하나가 줄어든 것이다.




(p.255)
  나는 그곳에 앉아 그 오랜 미지의 세계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개츠비가 부두 끝에 있는 데이지의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 느꼈을 경이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는 이 푸른 잔디밭을 향해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그의 꿈은 너무 가까이 있어 금방이라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으리라. 그 꿈이 이미 그의 뒤쪽에, 공화국의 어두운 벌판이 밤 아래 두루마리처럼 펼쳐져 있는 도시 저쪽의 광막하고 어두운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김욱동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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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와 π와 i 를 곱한 수로 거듭제곱하여 1을 더하면 0이 된다.
  나는 다시 한 번 박사의 메모를 쳐다보았다. 한없이 순환하는 수와, 절대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수가 간결한 궤적을 그리며 한 점에 착지한다. 어디에도 원은 없는데 하늘에서 π가 e 곁으로 내려와 수줍음 많은 i 와 악수를 한다. 그들은 서로 몸을 마주 기대로 숨죽이고 있는데, 한 인간이 1을 더하는 순간 세계가 전환된다. 모든 것이 0으로 규합된다.
  오일러의 공식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한 줄기 유성의 빛이었다. 어둠의 동굴에 새겨진 시 한 줄이었다. 거기에 담긴 아름다움에 감동하면서 나는 메모지를 다시 정액권 지갑에 넣었다.


-오가와 요코, 『박사가 사랑한 수식』, 김난주 옮김, 이레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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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9-160)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할아버지에게 이 세상에는 아직도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할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또 할아버지에게도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한동안 할아버지와 함께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은 천천히 가고 있었고 프랑스 것이 아니었다. 하밀 할아버지는 때때로 시간이란 것은 사막에서부터 낙타 대상 무리와 함께 천천히 온 것이며, 또 시간은 영원이라는 짐을 운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두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매일 조금씩 조금씩 도둑맞고 있는 늙은이의 얼굴에서 시간을 보는 것보다는 그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보는 것이 언제나 훨씬 아름다웠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시간을 찾는 데 있어서는 도둑맞은 쪽에서가 아니라 도둑질 하는 쪽에서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KBS라디오 장진의 '라디오 북클럽'에서 낭독했던 부분, 이 부분이 맘에 들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또 따로 있다.
 

+
(p.121)

그리고 다음에 멋진 장면이 일어난다. 모두가 다 뒷걸음질하기 시작한다. 죽은 사람들도 다시 살아나서는 뒷걸음질해서 사회 속 제자리로 돌아간다. 어느 누가 단추를 누르자 모든 것이 달라진다. 자동차들은 뒤로 굴러가고, 개들도 뒤로 뛰어가고, 산산조각이 났던 짐들이 다시 모아져 대번에 눈앞에서 다시 지어지는 것이다. 시체에서는 총알들이 나와서 기관총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살인자들은 뒤로 물러서서는 창을 통해 뛰어서 물러가버린다. 그리고 쏟아진 물은 다시 일어나 잔을 채운다. 흐르던 피는 시체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리고 핏자국은 아무 데도 없고 상처는 아문다. 침을 뱉은 사람의 입에는 다시 침이 들어간다. 말들은 뒤로 달리고, 8층에서 떨어진 사람도 살아나서 창문으로 다시 들어온다. 그것은 정말로 거꾸로 된 세계였다. 그리고 그것은 내 거지 같은 생애에서 본 것 중 가장 멋진 것이었다. 한순간 나는 젊고 생기 있는 로자 아줌마의 튼튼한 다리를 보았다. 그리고 로자 아줌마를 보다 뒤로 가게 하여 더욱더 예쁘게 만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나왔다.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지정숙 옮김,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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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로테를 저에게 맡겨주소서!' 하고 기도할 수는 없네. 그러나 가끔 그녀가 내 사람인 듯한 생각이 드는 걸 어쩌겠나. 그렇다고 '그녀를 제게 돌려주소서' 하고 기도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의 사람이니까.
  나는 지금 너무도 가슴이 쓰라린 나머지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거라네. 이러다간, 명제와 대립명제의 끝없는 기도가 되풀이될 걸세.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도희서 옮김, 꿈꾸는 아이들 p.19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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