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림

2008. 8. 14. 21:54 from 서재/접어둔 페이지

  그때 창밖에 연붉은 스웨터를 입은 누나가 어른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시집을 덮고 누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모르고 있었으나 누나는 책을 읽고 있는 나를 한참동안이나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책 읽노?"
  창이 닫혀 있어 무슨말인지는 잘 들리지 않았으나 누나의 입모양으로 봐서 그런말인 것 같았다.
  "시집 읽는다."
  나도 소리를 내지 않고 입만 벙긋거리는 말을 했다.
... 정호승 <나의 첫키스> p.12



  사람에겐 누구나 도저히 객관화되지 않는 자기만의 열등감이나 외로움이 있을 것이다. 홀로 있는 시간, 정신이 아파 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리라. 그것은 가진 게 부족하여 욕심에 겨운 비명도 아니요, 진짜 불행이 뭔지도 모르는 배부른 투정도 아닐 것이며, 말 그대로 정신이 아파 죽고 싶을 만큼 꺽꺽 우는 울음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쁨과 위안이 되길 늘 소원의 첫째 자리에서 기도해왔으면서도 어찌 보면 나는 내게 기쁨이 되고 위안이 되는 사람을 기다려온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중략)
  나이가 드는 건지 이제야 철이 드는 건지 내가 가진 그릇이 너무 작고도 가볍다는 사실이 문득문득 깨달아지고 그럴 때마다 아직도 그걸 인정하기 싫어 마음으로 비명을 질러보기도 한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내게 주어진 시간과 사람을 사랑하며 살았다고 내가 나에게 큰소리로 또박또박 말해보기도 하지만 이 거대한 세상 속에서 나는 무엇을 얼마만큼 이루어냈을까? 내 체온으로 한 사람의 어깨라도 데웠을까?
  바늘 같은 감정은 하루에도 수천 번씩 나를 찌르고 그 속에서 악악대며 내 아픔만 누구에게 호소하진 않았는지, 그러면서 나를 쉬게 해줄 그 어떤 포근함과 너그러움만 자꾸자꾸 달라고 조르진 않았는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절대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기도가 결국은 내 얇은 허영은 아니었는지.
... 서석화 <그 사람은 내 귀 안에 산다> p.137-138



-김용택 정호승 도종환 안도현 외, 『떨림』, 랜덤하우스
Posted by Hy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