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문헌★
T.J. Reed, 『19세기 유럽 문학의 정상 괴테』, 이종인 옮김, 시공사
(ISBN 89-527-1636-1, ISBN 89-527-1111-9(세트))
→ p.11~40, 아래 <베르테르>이하부터 베르테르 관련 내용~~


<참조에 관한 주석>
텍스트 속의 참조는 아래 책을 따랐다.
H : 총 14권으로 된 함부르크판 괴테 전집. 에리히 프룬츠(Erich Trunz) 편집. 원판은 함부르크, 1948~60.
E : 만년의 괴테와 나눈 대화를 그대로 받아쓴 요한 피터 에커만(Johann peter Echermann)의 대화록.
D : 1786년 칼스바드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괴테의 일기(H에 들어 있지 않음).
(이하 생략)

<들어가는 글>
(앞부분 생략)
  겉으로 드러난 그의 삶은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eothe)는 1749년 자유 제국(帝國) 도시인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법률을 전공한 자문관으로 부르주아였다. 어머니는 아주 활기차고 이지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후일 유명해진 아들 덕분에 사귀게 된 작가와 왕자들로부터 폭넓게 존경받았다. 그녀의 편지에는 괴테를 연상시키는 자연스러운 개성이 넘쳐흐르는데, 괴테는 '낙관적인 성격'과 넘치는 상상력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고 말했다.(H I. 320). 또한 어머니의 사랑 넘치는 자상한 성격은 괴테에게 그대로 전해져서 그의 삶은 언제나 편안했으며, 그것은 또한 괴테의 저작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중략)
  괴테 생애의 전반기는 계몽주의 후기 시대와 일치한다. 그가 계몽주의의 가담자로 평가되지는 않지만, 그의 작품에는 이 사상의 여러 원칙들이 묵시적으로 등장한다. 경험주의, 감각적인 것에 대한 애착, 인간의 본성(혹은 자기 자신의 본성)에 대한 믿음, 사상의 명료성등이 그런 원칙이다. 그는 이런 원칙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런 것들을 언급하기보다는 직접 실천하고 또 개인적인 전망과 경험으로 그것들(원칙들)을 생기넘치게 하는 일에 바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 더하여 초기 괴테의 지적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준 또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요한 고트프리트 헤드러(Johann Gottfried Herder)와의 만남이었다. 헤르더의 문화철학은 젊은 시인(괴테)의 창조적 충동과 주제적 관심을 완벽하게 수용하고 또 확인시켜 주었다. (중략)
  그리고 중기에 실러를 만나게 된다. 실러는 위대한 시인이면서 비극 작가였고 또 탁월한 미학 이론가이면서 비평가였다. 이런 실러가 괴테의 시를 높이 평가하고 유럽 문학에서의 가치를 인정해 주자, 괴테의 문학 감각은 더욱 고양되었고 새로운 창조성의 활기를 띠게 되었다. 1794년에서 1895년(실러 사망 연도)까지 두 사람의 생산적인 우정은 독일에 때늦은 고전주의 붐을 일으켰고, 사상 처음으로 바이마르를 독일 문학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이하 생략)


1. 바이마르의 방랑자 시인
  - 괴테, 그 사람
<시가>
(앞부분 생략)
  괴테 이전의 18세기 시들은 사교 모임장이나 기존의 교설만 인정하는 교실 속에 갇혀 잇었다. 설혹 그런 갇힌 공간 밖을 내다본다 하더라도 아주 잘 가꾸어진 정원 속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순치된 자연이 고작이었다. 그 시들의 형태적인 양식도 마찬가지로 제약을 받고 있었다. '서정적' 연(聯)은 운율을 맞추고, 무언가 진지하게 탐구하는 듯하며, 사이사이 우화도 등장하지만, 그 시들은 이미 결론이 정해진 방향으로 내달렸다. 그런 중에도 초창기의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고틀리프 클롭슈토크(Friedrich Gottlieb Klopstock)는 장대한 언어·운율적 제스처로써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시들은 위대한 비평가 고흐홀트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이 지적한 것처럼 너무 감정이 충만해 있기 때문에, 막상 읽어보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다. 너무 노골적으로 정서를 유도하는 수사(修辭)가 읽는 이에게 부담을 주는 탓이다. 그 감정은 종종 종교 감정으로 바뀌는데, 아주 오랫동안 시적 표현에 한계를 부과해온 기독교 정통 교리의 '숭고한' 되풀이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클롭슈토크가 노리는 해방은 의심스러운 해방이 되고 말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괴테는 자기 주위의 실제 세계로 파고 들어갔다. (중략)
  괴테는 소심한 선배 시인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해냈다. 그는 '방랑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괴테 자신이 말했던 '자유로운 세상', '충만한 세상', '열린 세상'을 마음껏 거닐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억수 같은 빗줄기 속에서 진흙 위를 터벅터벅 걸어 가는 사람, 애인과 약속한 장소에 맞춰 가기 위해 알자스의 전원을 말 달리는 사람, 취리히 호반에서 노 젓는 사람등 자연스러운 사람들의 움직임이 직접 느껴진다. 괴테처럼 구체적인 경험을 제시하면서 정서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을 강력하게 융합한 시인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괴테는 자연 속에 놓여 있는 진실한 인간이다. (중략)
  괴테의 시는 엄청난 힘, 신선함, 시적 정밀성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독일 문학에서는 괴테의 선배는 물론 후배 중에서도 그에게 필적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괴테의 문학에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괴테가 스트라스부르 시절(1771)에 만났던 헤르더는 원시인들의 노래가 갖고 있는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면서 호메로스(Homeros), 오시안(Ossian), 셰익스피어의 원초적 힘을 칭찬했다.
  (중략) 괴테는 헤르더를 알기 오래 전부터 이미 셰익스피어를 읽고 있었다. 또 핀다로스(Pindaros)를 읽고 그의 복잡한 운율이 랩소디적 융합의 결과라고 오해하기도 했으며 당시로서는 신선하고 영감 넘치는 것으로 보였던 클롭슈토크도 읽고 있었다.
  (중략)
 
[감정의 오류는 영국의 문학비평가 존 러스킨이 『근대화가론』(1856)에서 처음 만들어낸 말이다. 시인이나 화가들은 자연에 인간의 감정을 투사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감정의 오류이다. 이러한 오류는 흥분된 느낌 때문에 발생하는데, 그 결과 인간은 잠시 비이성적으로 된다. 인간의 마음이 정서에 의해 크게 자극을 받으면 이런 '오류'가 발생한다. 말하자면 외부의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인상에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러스킨은 자신의 정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킹즐리의 시행을 인용한다.
  그들은 노호하는 포말(泡沫) 사이로 배를 저어갔다.
  저 잔인하고 기어가는 포말.
  "포말은 잔인하지도 기어가지도 않는다. 인간의 이러한 특성을 포말에 적용시킨 것은 인간의 마음 상태이며, 그 상태가 슬픔에 의해 잠시 이성을 잃은 것이다."(러스킨)
  그러면서 러스킨은 최상급의 창조적 시인들(호메로스, 단테, 셰익스피어)은 이런 감정상의 오류를 거의 저지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2류 시인들(워즈워스, 콜리지, 키츠, 테니슨 등)은 이런 오류를 많이 저지른다; 이상 프린스턴대학판 『시학대박과 사전』에서 인용: 역주]

<베르테르>
(앞부분 생략)
  괴테가 어떤 문학적 가능성 때문에 '인생은 비극이다'라는 주제를 탐구했던 것은 아니다. 카를 빌헬름 예루잘렘(Carl Wilhelm Jerusalem)이라는 젊은 변호사의 자살이 그에게 이 작품을 쓰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예루잘렘은 괴테가 라이프치히 시절과 베츨러의 제국(帝國) 상소법원 시절에 알았던 사람이었다. 자연사, 요절, 사고사 등은 인생의 의미를 정의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자살은 인생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의 자살은 괴테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 결과 이러한 절망의 깊이를 이해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예루잘렘의 사회적 실패, 불행한 사랑, 자살 후의 형편없는 사후 처리, 검소한 장례식 등으로 괴테는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는 18개월 동안 그 문제를 곰곰 생각하여 1774년 초 4주에 걸쳐 서한(書翰)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을 써냈다. 내적인 동요와 짝사랑의 괴로움 때문에 결국 어두운 종말을 맞게 되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였다.
  (중략) 베르테르가 편지를 쓰는 상황, 편지들의 길이와 어조, 서서히 일관성이 붕괴되어 나가는 과정 등은 정말 사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우리는 괴테의 시를 읽을 때와 똑같은 감정의 동요를 느끼게 된다. (중략) 
  괴테의 소설은 질병과 똑같은 위력으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심리 과정에 대해 깊은 통찰 혹은 공감을 제공해 준다. 베르테르 자신도 이러한 '심리적 원인도 죽음을 가져온다'는 논리를 원용하면서, 연적인 알베르트 앞에서 전통적인 자살 배척론에 맞서 자살을 옹호한다(그것은 베르테르가 자살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베르테르의 웅변은 기존의 경직된 법률과 도덕과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혁명적인 호소로, 흄의 논문 『자살론』(Of Suicide)과 나란히 세워놓을 만했다. 흄은 오래 전에 이 논문을 썼으나 파란을 우려해 발표하지 않다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나오고 3년이 지난 뒤에 출간했다. 흄은 추상적으로 인간의 자살 권리를 옹호하고 있는 데 반해, 괴테는 사람을 자살로 몰고 가는 고통을 구체적으로 재창조하고 있다. 철학은 일반적인 동의를 구하지만, 문학은 구체적인 공감을 강요한다. 문학은 이런 식으로 사회를 문명화시키는 작업을 해낸다.
  베르테르의 고통이 불행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물론 연애 감정이 표면적인 플롯을 지배하고 있고, 또 당시 기준으로 볼 때 그런 감정이 아주 감상적인 분위기로 강화되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베르테르는 좀더 급진적인 문제에 대한 답변 혹은 완화책으로 로테를 필요로 했다.
  베르테르의 마음은 그냥 저 혼자 내버려두면 덧없음과 죽음으로 내달리게 되는 그런 마음이었다. 로테에 대한 사랑은 이런 마음에 어느 정도 제동을 걸었다. 그는 인간의 모든 활동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보았고, 그래서 사회 바깥에 있는 우울한 관찰자인 자신은 그런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해방은 허무주의로 가득 찬 황야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는 그런 제약의 일부 형태를 동경한다. 전원 분위기가 가득한 소설의 도입부에서, 그는 농부가 되었으면 하는 동경을 내보인다. (중략) 그러나 이런 전원에 대한 동경은 산산조각나 버린다. 그런 전원생활에 딱 들어맞는 파트너 로테를 아내로 맞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인간의 마음과 정서는 이 세상과 충분한 타협을 이루어서, 이 세상의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을 자기의 집처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이 거듭하여 진지하게 제기되었기 때문에, 또 베르테르의 비극적 답변이 늘 옆에 대기하고 있기 때문에, 괴테가 "비극을 피해갔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니까 괴테가 자기 자신과 소설 속 인물들에게 그런 문제를 제기하기만 하고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허무맹랑하다. 괴테의 저작이 성공적인 해결책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극적 격언'(인생은 무의미하다: 역주)이 결코 상투어로 전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770년대 중반에 괴태는 인생의 비극적 견해를 상술하기는 했지만, 그런 견해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견해를 아주 동정감 넘치는 입장에서 기술했다. 하지만 시적 효과를 내기 위한 것이었을 뿐, 그런 주제에 탐닉하지는 않았다. 낭만적 개인주의의 애상(哀想)과 병리(病理)는 그의 규범이 될 수 없었다. 이것은 초창기의 그가 거둔 의미 있는 승리이다.

 (이하 생략)

Posted by Hy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