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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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브링클리,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 휴머니스트 (ISBN 978-89-5862-081-0, ISBN 978-89-5862-032-7(세트))
 - 세계 각국사 시리즈 미국사 p.262~273 적색, 미국 현대사 p.13~20 녹색, 주머니 속의 미국사 p.220~227 청색,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3 p.60~97 자색으로 표시하고 생략과 중략표시는 하지 않았다.


1920년대 번영기와 유산
  1920년에 대공황이 일어나기 전까지 미국은 근본적으로 자유방임주의 이론에 토대를 둔 자유기업(free enterprise) 체제의 나라였다.
  1920년대의 미국은 지상에 최초로 나타난 진정한 소비 사회(consumer society)였다. 그것은 부자들뿐만 아니라 평민들까지도 단순한 필요를 넘어 쾌락을 목적으로 물건을 살 수 있게 된 사회였다. 웬만한 중산계급 가정이면 냉장고, 세탁기, 진공청소기를 보유하였다. 새로운 소비지상주의(consumerism)는 자동차의 보급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
  이처럼 미국 사회를 번영시킨 데 대한 공로(功勞)는 기업가들과 기술자들의 천재성으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1920년대는 기업가와 기술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기술, 조직, 경제적 성장
  경제적 호황은 많은 요인들이 종합적으로 이루어낸 결과였으나,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기술력이었다. 일관 작업 라인(assembly line)과 그 외 기술이 발전한 결과, 자동차 산업은 이제 미국의 가장 중요한 산업 중 하나가 되었다. 자동차 산업이 발달하자 다른 관련 산업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철, 고무, 유리 제품과 공구 회사를 사들였다. 자동차 소유자는 정유 회사에서 가솔린을 구매했고, 도로 건설이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자동차로 인해 이동성이 증가하자 교외 주택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고, 이에 따라 건설업이 번성했다.
  기술 혁신의 혜택을 입은 또다른 산업들도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 라디오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초기 라디오는 펄스(pulses)를 통해서만 방송할 수 있었다. 모스 부호(Morse code)를 써야만 라디오 방송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캐나다의 과학자 레지널 페선든(Reginal Fessenden)이 최초로 변조(modulation) 이론을 발견함으로써 음성과 음악을 전파를 통해 전송할 수 있게 되었다. 1925년까지 미국 가정에 200만대의 라디오 세트가 보급되었고, 1920년대 말까지 거의 모든 가정이 라디오 세트 하나씩은 다 보유하게 되었다.
  비행기가 우편물을 배달하는 데 이용되면서, 1920년대에 상업 비행은 서서히 발전했다. 기차는 디젤-전기 엔진의 개발로 더욱 빨라지고 효율적이 되었다. 전자, 가전, 플라스틱, 나일론과 같은 인조 섬유, 알루미늄, 마그네슘, 석유, 전기, 그리고 다른 산업들이 기술의 진전에 힘입어 급속하게 성장했다. 전화도 계속 급격히 늘어갔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미래의 산업을 혁신시킬 싹이 보였다. 영국과 미국, 양국에서 과학자와 공학자들을 원시적인 계산기를 좀더 복잡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기구로 변환시키려는 연구를 계속했다. 1930년대 초, 베너바 부시(Vannervar Bush)가 이끌던 MIT의 연구자들은 다양한 복합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기구, 즉 최초의 아날로그 컴퓨터를 발명했다.

소비주의와 대중매체
  1920년대의 미국은 소비 사회였다.
  광고 산업계는 소비주의의 등장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광고 산업이 수비주의를 창조하는 데 큰 역할한 것일 수도 있다.) 1920년대에 들어와 광고의 시대가 도래했는데, 이는 전시(戰時) 선전술의 발달에 힘입은 면이 있다. 광고업자들은 단순히 정보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특정 생활 양식과 동일화하려 했다. 이들은 또한 대중이 광고와 세일즈맨의 가치를 알고, 효과적인 광고와 광고인을 높이 평가하도록 부추겼다. 1920년대에 가장 성공한 책 중 하나는 광고 회사의 간부 브루스 바튼(Bruce Barton)이 지은 『아무도 모르는 사람(The Man Nobody Knou's)』이었다. 이 책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종교적 선지자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세일즈맨(super salesman)'이라고 그리고 있다. 바튼의 메시지는 새로운 소비 문화 정신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예수는 현세에서 완전하고도 보상받는 삶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며, 20세기 인들은 예수처럼 현세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광고 산업은 다수의 청중에게 빠르고도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대중 매체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었을 것이다. 신문은 전국적 유통망을 통해 보급되었고, 잡지는 대량 유통되어 전국의 독자를 매혹시켰다. 영화는 좀더 대중적이며 강력한 대중 정보 전달의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대중 매체는 라디오였다.

심리학과 정신 의학
  1920년대에 점점 풍요해지고 소비주의가 성장하면서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새로운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소비 시대의 특징적 병증으로서 '불안'과 '소외'가 생겼고, 이와 동시에 심리학과 정신 의학에서 신이론이 등장했다. '불안'과 '소외' 두 가지 현상 공히 의학과 과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새로이 등장한 신이론은 강화시키고 확산시켰다.
  20세기 초 이래, 미국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Siegmund Freud)와 칼 융(Carl Jung)의 이론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데 일부 힘입어 정신 의학이 확산되고 있었다. 프로이트와 융은 여러 면에서 매우 이질적이었으나, 이들은 정신적 문제의 뿌리를 찾아 내는 한 방법으로 무의식의 탐구가 합리적인 것이 되도록 지원했다. 프로이트가 개척하고 융이 발전시킨 정신 분석은 1912년 초 미국의 동조자들을 매혹시켰고, 1920년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전후의 번영
  이 시기에는 경제발전과 더불어 기업운영과 체제에 있어서도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주식시장을 통한 주식의 분산, 소유와 경영의 분리 현상이 보편화되었다. 사주나 대주주가 아닌 전문경영인들이 실질적으로 기업을 이끌었고, 주식 배당금을 늘려 받기를 원하는 주주들과 배당금을 신규투자로 돌리려는 경영자들 사이에서 회사경영을 둘러싼 마찰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모든 면에서 좋은 결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빈부격차의 심화였다. 1920년대 절정을 이룬 자유시장경쟁의 경제성장의 과실이 기업가와 일부 부유층에 주로 돌아가도록 함으로써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낳았다. 연수입이 최저생계비인 1,500달러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 수가 전체의 40퍼센트나 되었다. 반면 소득면에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가구는 전체의 3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부품 표준화와 공장 자동화, 분업에 의한 조립라인의 일련 공정화 등으로 기업가들은 물건을 보다 싼 값에 대규모로 생산할 수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단순작업을 되풀이하는 '기계'로 전락했고 그나마도 기계에 밀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모든 분야에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거대기업이 들어서면서 소규모 자영업자들도 파산을 면할 도리가 없었다. 1920년대 말에 이르러 산업성장의 그늘진 구석에는 구조를 갈망하는 거대한 실업자군이 늘어갔다.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실업자들이 늘어나면서 당연히 사회적 구매력은 급속히 저하되었다. 대량생산으로 상점마다 물건이 넘쳐나는데 구경꾼들은 이를 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마르크스가 예언한 것처럼 과잉생산과 유효수요 부족이라는 자본주의의 병폐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경제성장과 풍요의 환상에 젖어 있을 때 미국의 경제는 조용히 파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개인주의와 번영의 약속
  1920년대의 기업 문명의 공식 철학은 자유방임주의, 즉 개인들 사이의 자유로운 경쟁의 원리였고, 바로 그 원리 위에 미국적인 체제(American System)가 놓여 있었다. 미국적 체제는 오랫동안 미국인의 국민적 특성이었던 개인주의 철학이 구현된 상태였다.
  그러므로 1920년대초에 공화당 행정부를 이끌었던 워렌 하딩(Warren Harding) 대통령은, "모든 인간의 문제가 법(法) 제정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전세계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창의력, 근면성, 도덕성을 가지고 있으면 재부(財富)와 명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개인주의자들의 근본생각이었다.
  이와 같은 자수성가인(self-made man)의 이상은 미국 역사에서 항상 존재해 왔다. 그리고 그러한 신화는 1920년대에도 상당한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거은 세 명의 시대적 영웅을 통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첫번째 영웅은 전등과 수많은 가전 제품들을 발명한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이었다. 두번째 영웅은 자동차 왕이며 이동조립 공정의 창시자인 헨리 포드(Henry Ford)였다. 그리고 세번째 영웅은 작은 비행기로 대서양을 단독 비행한 모험가 찰스 린드버그(Charles A. Lindbergh)였다.
  그들은 모두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수성가인이었다.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기술을 체득한 선각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 개긴으로 하여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고 싶은 대로 두라"는 자유방임주의의 신봉자들이었다.

공화당과 자유방임주의
  이러한 국민 철학을 정치적으로 표현한 정당이 공화당이었다. 그러므로 번영의 1920년대를 전후한 12년 동안 공화당이 집권했던 사실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공화당 행정부의 자유방임주의는 주로 빈민에 대한 정부 지원을 없애기 위해 정부 예산의 삭감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자나 농민과 같은 불만 세력을 억제함으로써 기업가의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보장하는 친기업(親企業)정책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재무 장관 앤드루 멜론(Andrew Mellon)은 부자에게 부과된 개인소득세와 상속세를 줄여 줌으로써 기업의 이윤을 크게 해주었다.
  대법원장 윌리암 태프트(William Howard Taft)가 이끄는 법원도 연방 정부의 친기업적 성향을 더욱더 강화해 주었다. 그리하여 대법원은 소년 노동을 규제하고 여성에게 최저 임금을 보장하려는 진보적인 법을 무효화시킴으로써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노동운동에 대한 적대감
  자유방임주의는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으로 나타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1919년의 대파업이 공산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기업가들은 노조 운동이 근본적으로 미국의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음모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그 자체가 비미국적(un-American)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미국적 체제를 유지하는 방법은 노동자의 노동조합 강제 가입이 허용되지 않은 개방 공장(open shop)제도의 확대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때문에 전국제조업자협회는 개방공장제도를 가리켜 "미국적 계획"(American Plan)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에 대한 복지는 고용주들의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루어져야만 했다. 실제로 1920년대에 기업가들은 국가를 대신해서 노동자들을 달래기 위한 복지 혜택을 마련하였다. 그것은 당근과 채찍(carrot and stick)의 방법에서 당근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후견주의적인 방법은 복지자본주의(welfare capitalism)라고 불리었다.
  따라서 헨리 포드와 같은 대담한 기업가들은 고용인의 작업 시간을 파격적으로 줄이고 임금을 대폭 인상하는 한편, 유급 휴가 제도를 도입하였다.
  따라서 복지자본주의는 근로자들로 하여금 기성체제를 받아 들이게 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지식인과 대중의 간격
  기업적 가치관이 지배하게 됨에 따라, 1920년대의 미국 사회는 그것에 적응하려는 순응(conformity)의 정신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에 대해 지식인들은 반발하였다. 그 때문에 지식인들은 기업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는 대중과 멀어지게 되었다. 지식인들은 H.L 멘켄처럼 근검, 절약, 성공을 강조하는 청교도적인 가치관을 따르는 대중을 경멸하였다. 그리고 대중에 토대를 두고 있는 민주주의 제도를 조롱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지식인들이 기성 체제를 바꿀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의 사회로부터 스스로 격리되고 소외되었다. 그들은 갈길을 모르는 '방황하는 세대(Lost Generation)'가 되었다.
  그리하여 지식인들은 물질주의, 소비주의, 청교주의가 지배하는 답답한 사회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뉴욕시의 그리니치빌리치 같은 곳으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멀리 대서양 건너편의 유럽으로 도피하여 중세적인 분위기에서 안도감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지식인들은 대부분 문인이었으므로, 소설을 통해 미국의 기업 문명을 비판하였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라는 소설에서 지식인들에게 환멸을 가져다 준 사회 모습을 그리고,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는 지식인들의 환멸과 냉소주의의 뿌리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아메리카의 비극』에서 성공 만능주의 때문에 한 청년이 당하고 있는 혼란을 고발하였다. 싱클레어 루이스는 『메인 스트리트』에서 우둔함이 판치는 도시 생활을 조롱하고, 『배빗』에서는 기업가들이 획일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것을 조롱하였다.
  F. 스콧 피츠제럴드는 『낙원의 이쪽』과 『위대한 개츠비』에서 미국의 상류 계급이 얼마나 속물적인지를 보여주었다. 존 도스 페이소스는 『세 병사』에서 자본주의 자체를 공격하였다.

공화당과 청교도적 가치관
  미국의 자유방임적 체제를 지지한 사람들은 단순히 부유한 기업가들과 보수적인 공화당 정치가들만이 아니었다. 지지자들 가운데 문화적인 전통주의자(cultural traditionalist)로 불리는 농촌지역의 백인 중산계급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프로테스탄트 교도로서 개인주의 정신과 칼빈주의 신앙(Calvinism)의 가치관을 숭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러한 전통적인 중산계급의 가치가 외국으로부터 들어 온 이질적(異質的)인 요소들에 의해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고 두려워하였다. 그러한 위험한 요소는 그릇된 사고방식을 가진 카톨릭교도, 유대인, 흑인,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외래적(外來的)인 요소는 도시에서 우세했기 때문에 특히 그들은 도시가 농촌지역의 전통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의 도덕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분개하였다. 따라서 문화적 갈등은 농촌과 도시의 대립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들 백인 중산계급의 분노는 1920년에 술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하는 금주법(Prohibition)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음주는 매음, 조직범죄와 같은 전반적인 사회적 타락의 원인이었다. 그들은 미국의 도시들이 외국에서 새로운 들어 온 이방인들로 들끓고 있는 데 대해 불안감을 느꼈다. 외국의 낯선 언어, 낯선 복장, 낯선 습관, 낯선 종교 행사를 보면서, 그들은 미국이 외국인들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음을 느꼈다.
  특히 그들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南)유럽의 카톨릭 국가들에서 쏟아져 들어 오는 수준 낮은 이민들과 그들의 알콜 문화에 대해 경계하였다. 그리고 독특한 문화를 고수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증오심을 느꼈다. 그러므로 금주(禁酒) 운동은 단순한 음주 문제를 초월하여 변화하고 있는 미국 사회 안에서 옛날의 미국을 지키려는 노력을 의미하였다.

금주법
  1920년 1월에 주류 판매와 제조를 금지하는 법안이 발표되자, 중간 계급과 혁신주의자로 자처하던 이들의 대다수는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1년도 못 되어, 금주론자들이 지칭했던 '고상한 실험(noble experiment)'이 잘 되지 않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금주법이 시행되자 미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음주가 상당히 줄어들긴 했으나, 그와 함께 위법 사태도 속출했다. 오래지 않아, 과거에 합법적으로 주류를 구매했던 것처럼, 미국의 많은 곳에서 불법 주류를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합법적 기업가들이 거대하고 이윤이 많은 주류 사업을 할 수 없게 되자, 범죄 조직들이 그 사업을 인수했다.
  처음에 금주를 지지했던 많은 중간 계급의 혁신주의자들은 곧 이 실험에 시들해졌다. 그러나 지방의 농촌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개신교도 미국인인 많은 유권자들은 금주를 열성적으로 지지했다. 그들에게 있어 금주는 미국의 전통적 도덕관과 윤리를 수호하려는 노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음주는 현대 도시와 가톨릭 교도 이민자들과 결부되어져, 전통적 미국을 대치하려고 한다고 그들이 생각한 새로운 문화의 상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금주 반대자(또는 '음주자')는 서서히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1933년, 대공황이 일어나 금주 반대자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자, 마침내 '금주론자(drys)'를 효과적으로 공격하고, 헌법 수정 조항 18조를 폐지할 수도 있었다.

공화당과 토착주의
  이러한 토착주의(nativism)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 데, 가장 두드러졌던 것이 "큐클럭스클랜"(Ku Klux Klan)조직이었다. 그들은 미국적 생활속에서 외래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외래적인 요소에 대한 두려움은 종교적인 극단주의의 형태를 띄기도 하였다.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은 지방적, 농촌적인 사람들로서 도시인들과 지식인들이 과학화와 현대화의 이름으로 미국의 전통적인 신념들을 말살하는 데 대해 분개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창세기>의 천지 창조 내용을 부정하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반대하고, 그 대신 성경이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의 신앙을 내세웠다.
  따라서 문화적 전통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하고 민주당에 반대하였다. 그들은 도시의 노동자, 카톨릭, 이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민주당은 비미국적(非美國的)인 정당으로 불신하였다.

'악의 꽃'- 대공황
  국내적으로 1922년부터 신흥공업과 새로운 생산기술의 급격한 발달이 이루어졌고, 산업 전반에 걸친 기계화, 기업조직의 거대화, 새로운 기업경영 방식의 도입, 그리고 신용제도의 정비로 미국 자본주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927년에 이르러 미국 경제는 사상 최대의 호황을 맞는다.
  하지만 이러한 번영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구조적으로 심각한 문제점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한 것이 계층간 소득의 불균등 분배였다. 경제성장의 과실이 일부 계층에만 국한되어 국민의 5퍼센트에 해당하는 상류 부유층이 소득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대다수 국민의 구매력은 별로 늘어나지 않았고, 이에 따라 공장 창고들에는 소비되지 못한 물건들이 쌓여갔다.
  1920년대의 번영으로 전체 소득도 늘어나고 저축도 증가했으나 성장이 정체되면서 돈을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고 점차 증권 등 투기시장으로 몰려들었다. 물론 증권을 사는 것 자체가 투기라고 볼 수 없지만 문제는 증권시장을 통해 기업으로 흘러들어간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투자로 전환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한편 여유자금이 과도하게 증권시장으로 몰려들면서 주가가 기업체의 실질가치 이상으로 올라가는 이른바 주식시장의 거품현상이 나타났다. 주가가 계속해서 상승하면서 더 많은 돈이 증권시장으로 몰리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결국 1929년 들어 주가폭락이 심각하게 우려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증권투자의 열기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러한 우려는 드디어 1929년 10월,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주가가 폭락하는 '파탄(The Crash)'으로 이러졌다. 주가의 폭락으로 기업들은 엄청난 자산손실을 입었고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해 파산하는 기업들이 속출했다. 기업들의 연쇄파탄으로 경제 전체가 붕괴하는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주식시장의 파탄이 대공황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주식시장의 파탄은 대공황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에 불과할 뿐, 공황의 직접적 원인은 그 동안 경제성장의 모순이 누적되어온 데 있었다. 소비가 따라가지 못할 만큼 늘어난 과잉생산, 또는 생산을 따라갈 만한 유효수요의 부족이 대공황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이유였다.

결론
  1920년대의 괄목할 만한 번영은 활기 넘치던 당대인들이 '새로운 시대'라 칭하던 것의 많은 부분을 만들어 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미국은 활력 있는 전국적 문화를 만들어 냈다. 중간 계급은 성장하는 소비 문화에 젖어 갔다. 정치는 호황을 이루던 상호 의존적 산업 경제의 필요에 부응하여 재조직되었으며, 전(前) 세대의 개혁을 위한 많은 시도들을 거부했고, 새로운 기구들을 창설하여 경제 성장과 안정을 증진하는 데 지원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화려한 겉모습 이면에는 상당한 논란과 불평등이 있었다. 미국 산업사에 있어 1920년대의 번영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널리 확산되었지만, 인구의 절반 이상이 성장의 진정한 혜택을 조금도 맛볼 수 없었다. 수백만의 도시 중간 계급은 새롭고 낙관적이며 세속적인 문화에 매혹되었다. 그러나 다른 많은 미국인들은 새로운 문화에 경악했으며, 대단한 열정으로 그에 맞서 싸웠다. 이 시대의 매력 없는 보수적 성향의 대통령들은 안정의 시대를 제시했으나, 실제로는 현대 미국의 역사에서 1920년대만큼 정치, 문화적 갈등이 많았던 시기도 없었다.
  1920년대는 파멸적인 붕괴로 막을 내렸고, 그 후 경제 붕괴는 이 시대의 대한 이미지를 고착시켰다. 1930년대의 위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이루어낸 경제적 성과를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20년대의 번영에만 주목하여, 그 이후 고통을 시대를 산출하는 데 일조한 이 시대의 불평등과 불안정을 간과해서도 안 될 것이다.

Posted by Hy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