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문헌★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김욱동 옮김, 민음사
(ISBN 978-89-374-6075-3, ISBN 978-89-374-6000-5(세트))
-p.257-277  대충 시대적, 지리적, 보편적, 국가적(종교적), 형식적 특징에 대해 순서대로 나열되어있는 듯 하다. 파란색 굵은 글씨로 어림잡아 구분해 놓았다. 컹=ㅅ=


작품해설

  (앞부분 생략) 1920년, 그러니까 겨우 스물세 살의 젊은 나이로 문명(文名)을 떨치던 무렵 그는 "모든 작가는 자기 세대의 젊은이들, 다음 세대의 비평가들, 그리고 그 뒤의 영원한 미래 세대의 교육자들을 위하여 작품을 써야 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일반 독자에서 비평가를 거쳐 교육자에 이르기까지 그가 예상했던 독자의 폭이 꽤 넓다는 데 새삼 놀라게 된다.
  (중략) 포크너와 헤밍웨이와 더불어 그는 20세기 미국 소설의 삼총사로서 좁게는 현대 미국 소설, 넓게는 미국 문학, 그리고 더 넓게는 세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그 위치를 굳혔던 것이다.
  (중략)

  피츠 제럴드의 작품이 으레 그렇듯이 『위대한 개츠비』에도 작가가 살아온 고단한 삶의 궤적이 깊이 새겨져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은 작가의 정신적 편력을 기록해 놓은 자서전이나 전기로도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사랑과 젊음, 재산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안일과 여유는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작가는 짧다면 짧은 생애 동안 물질적 성공을 이룩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작가의 이러한 태도는 주인공 제이 개츠비를 통하여 그대로 나타난다. 작가와 개츠비는 물질적 성공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만큼 그들이 느끼는 실망과 좌절도 무척 컸다. 그리고 개츠비가 가지고 있던 무한한 꿈과 이상의 상징이라고 할 데이지 뷰캐넌은 여러모로 작가의 아내 젤더 세이어와 비슷하다. 결국 개츠비와 피츠제럴드에게 데이지와 젤더는 하늘에 걸린 무지개처럼 한낱 이룰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작품의 주제가 지나치게 남녀의 애정과 물질적 성공에 국한되어 있다는 비판을 자주 받았다. (중략) 소설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소재를 다루느냐가 아니라 그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삶에서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여온 소재를 택하여 그것을 설득력 있게 소설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던 것이다.
  한편 『위대한 개츠비』는 시대 의상처럼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미국의 사회상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중략) 피츠제럴드만큼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의 삶을 실감나게 표현한 작가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 무렵에 활약한 어느 작가보다도 그는 미국 사회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그를 두고 흔히 '재즈 시대의 왕자'라고 일컫는 것도 그렇게 무리는 아닌 듯하다. 재즈 시대란 바로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대전을 겪은 뒤 서구 문명 자체에 깊은 회의를 보이면서 재즈에 심취하던 미국의 1920년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재즈 시대와 관련하여 피츠제럴드는 어느 작품에서 "그것은 기적의 시대였고, 예술의 시대였고, 과도의 시대였으며, 풍자의 시대였다."고 밝힌 적이 있다.
  1910년대 미국의 삶을 이해하려면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1900)를 읽어야 하고 1930년대 미국의 삶을 이해하려면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1939)를 읽어야 하듯이, 1920년대 미국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야 한다. 재즈와 찰스턴 춤과 자동차가 상징하는 1920년대 미국의 사회 현실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은 유럽과는 달리 경제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특히 상류 계층에게는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최적의 시대였다. 이 무렵에 나온 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1922년부터 1929년 사이에 주식의 수익 증가율은 무려 108퍼센트에 달하였다. 기업은 이익이 76퍼센트 증가하였으며 개인의 수입도 33퍼센트나 늘어났다. 이 소설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가 증권업에 종사하기 위하여 뉴욕에 온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제적 붐은 마침내 1929년에 월스트리트의 증권 시장이 몰락하면서 경제 대공황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성장의 그늘에는 도덕적 타락과 부패가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다. 톰 뷰캐넌과 개츠비가 타고 다니는 번쩍거리는 고급 승용차, 개츠비가 주말마다 벌이는 사치스러운 파티와 마치 '불빛을 쫓는 부나비처럼' 환락과 쾌락을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 톰과 데이지가 보여주는 도덕적 혼란과 무질서와 무책임은 바로 전쟁이 끝난 뒤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방황하던 이 무렵의 시대적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피츠제럴드의 한 단편 소설의 제목을 그대로 이 무렵의 미국은 말하자면 '현대판 바빌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톰의 저택이나 개츠비의 파티처럼 겉으로는 우아하고 고상하며 화려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놓고 보면 탐욕과 이기와 정신적 공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도덕적 타락은 닉 캐러웨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인물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도덕적 타락과 부패 그리고 무책임성은 톰 뷰캐넌과 데이지를 비롯하여 개츠비의 친구요 후견인인 마이어 울프심, 데이지의 친구이자 프로 골프 선수인 조던 베이커에게서도 잘 드러난다. 톰과 데이지는 여러모로 도덕적 마비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울프심은 1919년 월드 시리즈를 조작할 만큼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조직 폭력계의 거물이다. 닉과 잠시 사귀는 조던은 골프 시합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경기를 하는 등 닉의 말대로 "구제할 수 없을 만큼 부정직한" 인물로 밝혀진다. 작품의 첫머리에서 닉이 이 세계가 제복을 입고 '도덕적인 차렷' 자세를 하고 있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미국 역사를 통틀어 이 무렵만큼 도덕적 재무장이 절실히 요구되던 때도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시간적 배경 못지않게 공간적 배경도 자못 큰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은 뉴욕 시 근교의 롱아일랜드 마을을 지리적 배경으로 삼는다. 웨스트에그와 이스트에그는 피츠제럴드가 한때 살았던 그레이트넥과 그 근처 맷해싯넥을 모델로 삼은 곳이다. 그런데 달걀 모양을 하고 있는 이 두 지역은 단순히 지리적 배경에 그치지 않고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을 잘 보여준다. 대서양 쪼으로 좀 더 멀리 자리 잡고 있는 이스트에그는 톰과 같이 재산을 세습받은 부유한 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인 반면, 뉴욕 시 쪽에 좀 더 가까운 웨스트에그는 개츠비처럼 갑자기 떼돈을 번 신흥 부자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조지 왕조 시대의 식민지풍으로 지은 톰의 저택과 노르망디 시청을 본떠 지은 개츠비의 저택은 집주인의 사회적 신분과 가치관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스트에그와 웨스트에그의 대조는 더 나아가 미국 동부지역과 중서부 지역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동부와 중서부의 대조는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뉴욕을 중심으로 한 동부 사람들은 흔히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퇴폐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동부 사람들은 물질적 부(富)와 세련미와 교양을 갖추고 있지만 도덕적, 윤리적으로는 거의 무정부 상태에 있으며 부주의하고 무책임한 행동 양식을 보인다. 한편 닉 캐러웨이가 대변하는 중서부 지방 사람들은 비록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는 못할망정 아직 타락하지 않은 도덕적 순수성과 청교도주의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또한 닉의 집안 식구들에게서도 볼 수 있듯이 가족 간의 유대나 결속이 아직도 끈끈하게 남아 있다. 동부의 물질적 가치관과 중서부의 정신적 가치관은 어쩔 수 없이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제이 개츠비의 파멸은 바로 이러한 충돌이 빚어낸 결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소설의 화자는 "이제 나는 그것이 결국 서부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톰과 개츠비, 데이지와 조던과 나는 모두 서부 사람이어쏙, 어쩌면 우리는 동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결함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화자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물론 작가가 동부와 중서부의 지리적 차이에서 어떤 가치관의 차이를 찾아내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지역을 일대일의 관계로 상응시키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개츠비의 파티에 참석하는 손님들을 빼놓고 나면 실제로 동부 출신이라고 할 인물은 이 작품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톰과 닉은 몰라도 데이지와 조던은 중서부 출신이 아니라 남부 출신이다. 톰은 비록 중서부 출신이지만 동부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러한 사정은 남부 출신인 데이지와 조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작중 인물의 분포로 보면 동부와 중서부에 남부 출신까지 합세하여 가희 미국 전역을 아우르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가 특정한 역사적 인간과 지리적 공간에 국한된 문제만을 다루고 있다면 해묵은 달력처럼 지금은 빛바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중략) 이 소설은 시대적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표현해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삶의 보편적 진리를 형상화 하는 데에도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중략)
  (중략) 또한 비교적 '단순한' 스토리로 되어 있으면서도 수채화 한 점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고 애틋한 느낌을 준다. 그런가 하면 일인칭 화자를 등장시켜 플롯을 그의 말대로 '정교하게 도안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그 제목이 말해 주듯이 제이 개츠비라는 한 젊은이의 낭만적인 삶을 다룬다. 가난한 중서부 출신인 그는 켄터키 주 캠프 테일러에서 장교로 근무하던 중 미모의 여성 데이지 페이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그는 유럽 전선으로 떠나고 데이지는 연인을 떠나보낸 슬픔도 잠시, 곧 시카고 출신의 돈 많은 톰 뷰캐넌과 결혼한다. 그로부터 오년 뒤 전쟁이 끝나 귀국한 개츠비는 데이지가 이미 남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첫사랑을 다시 찾기 위하여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많은 재산을 모은다. 여성 편력이 많은 톰에게는 머틀 윌슨이라는 정부가 있었고 데이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물질적 풍요와 안락함 때문에 톰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머틀(Ms.윌슨)은 데이지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치여 사망하고 아내의 외도를 알아차린 윌슨(Mr.윌슨)은 아내를 죽인 사람을 찾아 나선다. 머틀을 죽게 한 것이 개츠비라고 착각하고 있는 톰은 윌슨(Mr.윌슨)에게 개츠비의 집을 가르쳐줌으로써 연적(戀敵)을 제거할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기회로 삼는다.
  이 작품에서 피츠제럴드는 무엇보다도 환상과 이상의 중요성을 가장 핵심적인 주제로 다룬다. 개츠비의 삶을 통하여 작가는 이상이나 환상을 지니는 데 바로 삶의 비결이 있으며 오직 이러한 이상이나 환상만이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삶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개츠비에게 부조리한 세계에서 삶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오직 이상과 환상뿐이다. 그런데 그 이상과 환상은 데이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품 첫 부분에서 닉은 개츠비가 조그만 만(灣) 건너편 데이지네 선착장에 켜져 있는 초록색 불빛을 응시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개츠비에게 이 초록색 불빛은 그의 삶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해 주는 낭만적 환상이요 이상이다. 그는 질퍽하고 누추한 대지보다는 천상의 아름다운 별을 좇는 인물이다. 닉이 처음 개츠비를 보았을 때 개츠비는 잔디밭에서 서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다. 개츠비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서서 은빛 후춧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개츠비의 꿈과 환상은 지나간 시간을 다시 돌려놓으려고 하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중략) 데이지가 톰과 함께 개츠비의 파티에 참석한 날 밤 개츠비는 닉에게 시계 바퀴를 오 년 전의 과거로 다시 돌려놓을 것이라고 밝힌다.

  "나 같으면 그녀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 겁니다." 내가 불쑥 말했다. "과거는 반복할 수 없지 않습니까."
  "과거를 반복할 수 없다고요?"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뇨 , 그럴 수 있고말고요!"
  그는 마치 과거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집 앞 그늘진 구석에 숨어 있기라도 하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전 모든 것을 옛날과 똑같이 돌려놓을 생각입니다."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녀도 알게 될 겁니다."


  환상과 이상에 젖어 있는 개츠비에게 지나간 과거는 다시 졸이길 수 없다는 닉의 말은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렇게 과거를 반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는 점에서 개츠비를 낭만적 이상주의자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닉이 그를 적잖이 경멸하면서도 깊이 동정할 뿐만 아니라 유대감을 느끼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개츠비는 '삶의 가능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 비록 그의 이상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일는지 모르지만 그 꿈을 성취시키기 위한 헌신적 노력은 톰과 데이지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동과 비교해 볼 때 차라리 숭고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닉은 머틀이 사망한 다음날 아침 그를 향하여 "그 인간들은 썩어빠진 족속이오. 당신 한 사람이 그들을 모두 합쳐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 것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중략)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는 자못 크다. 작가는 주인공에게 '위대한'이라는 관용어를 붙여주었다. 물론 이 형용사를 반어적으로 해석하려는 비평가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쪽이 더 옳을 듯하다. 적어도 꿈과 환상을 간직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온갖 희생을 무릅쓴다는 점에서 개츠비는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중략)
  피츠제럴드는 언젠가 자신의 인생관과 관련하여 시어도어 드라이저와 조셉 콘래드의 그것과 같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 두 선배 작가는 '삶이 인간에게 너무 거세고 무자비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삶을 축제처럼 살려고 했던 사람답지 않게 피츠제럴드는 삶의 비극적 의미를 깊이 깨닫고 있었다. 그러니 만약 이 세 작가에게서 두루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낭만적 환상을 통하여 삶의 비극적 의미를 극복하려고 하는 태도일 것이다. (중략)
  이렇게 개츠비가 보여주는 낭만적 환상이나 이상주의는 미국인들의 의식에 깊은 흔적을 남겻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상상력이나 문화의 일부가 되다시피 하였다. (중략)
  개츠비가 지니고 있는 꿈이나 환상은 개인적 차원을 뛰어넘어 좀 더 넓게 국가적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서 그의 꿈과 이상은 상징적으로 '미국의 꿈'으로 이어진다. 개츠비의 장례를 치른 뒤 닉은 동부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그러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개츠비의 집 앞 해변에 앉아 삼백여 년 전 부푼 가슴을 안고 미국 땅에 처음 도착한 네덜란드 상인들의 눈에 비쳤을 '신세계의 싱그러운 초록빛 가슴'을 떠올린다. 소설의 처음과 끝에 나오는 초록빛은 작품의 통일성에 이바지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꿈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이렇게 물질적 풍요와 안락을 찾아 초록의 꿈을 간직하고 신대륙에 도착한 사람들은 비단 네덜란드 상인들만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에 최초로 식민지를 개척했던 영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실채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제임스타운 식민지는 그 후 미국 중부와 남부 식민지 개척에 첫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신대륙에 '새로운 가나안 땅'이나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하려던 청교도들은 네덜란드 상인이나 영국의 개척자들과는 크게 달랐다. 보스턴 근교의 뉴잉글랜드에 정작한 청교도들이 찾던 초록의 꿈은 물질적 풍요와 안락보다는 오히려 간섭받지 않고 마음껏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종교적 자유에 있었다. (중략)
  뉴욕에 식민지를 개척한 네덜란드 상인이나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영국 개척자들에게서도 잘 드러나듯이 '미국의 꿈'은 자칫 물질적인 것으로만 인식되기 쉽다. 심지어는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청교도 들도 정신적인 것에 못지않게 물질적인 것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중략) 실제로 청교도들 사이에는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가난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중략) 막스 베버를 비롯한 몇몇 사회학자들이 미국이 이백 년도 채 되기 전에 자본주의 사회로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다름 아닌 청교도 윤리에서 찾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물질적 성공과 관련한 '미국의 꿈'은 청교도 정신이 점점 빛을 잃게 되면서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중략) 미국에서는 근면하고 성실하고 정직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신앙처럼 널리 퍼져 있었다. 개츠비가 어렸을 적에 프랭클린의 삶의 방식을 따르려고 한 것은 당연하다. (중략)
  그러나 물질적 성공은 어디까지나 변질된 '미국의 꿈'이거나 기껏해야 그 꿈의 작은 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참다운 '미국의 꿈'은 뭐니 뭐니 해도 다분히 정신적인 것이었다. (중략)
  이 소설의 주인공 제이 개츠비는 바로 변질된 '미국의 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데이지의 사랑을 되찾으려는 그의 꿈은 참으로 순수하고 낭만적이며 이상적이다. 비록 톰에게 데이지를 빼앗기고 말았지만 그는 지금이라도 그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개츠비가 데이지를 되찾기 위하여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느냐에 있다. 그는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기에 불법으로 밀주를 판매하거나 훔친 증권을 불법으로 판매하거나 도박을 하는 방법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은다. 전쟁이 끝난 뒤 빈털터리이던 그가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것도 마이어 울프심 같은 조직 폭력계 두목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낭만적 이상주의에 가려 자칫 놓쳐버리기 쉽지만 개츠비가 실정법을 어긴 엄연한 범법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개츠비의 이상주의가 물질주의를 그 수단으로 삼으면서 변질되고 타락한 것처럼 청교도들이 가슴에 품고 있던 '미국의 꿈'도 물질주의와 손을 잡으면서 점점 변질되고 타락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피츠제럴드는 그 빛바랜 '미국의 꿈'을 좀 더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이 작품에서 세 가지 상징적 이미지를 구사한다. 하나는 껍질만 남은 과일이고, 다른 하나는 조지 윌슨의 자동차 정비소 근처에 있는 재의 골짜기이며, 또 다른 하나는 재의 골짜기 근처에 서 있는 T. J. 에클버크 안과 의사의 광고탑이다. 개츠비는 주말마다 저택에서 화려한 파티를 벌이기 위하여 뉴욕 과일 가게에서 싱싱한 오렌지와 레몬을 몇 상자씩이나 들여온다. 그러나 파티가 모두 끝난 월요일 아침이면 그 싱싱하던 과일은 과육이 모두 사라진 채 앙상한 껍질만 남아 뒷문을 통하여 쓰레기장으로 버려진다. 윌슨의 자동차 정비소 근처의 재의 골짜기는 T. S. 엘리엇이 『황무지』(1922)에서 말하는 불모의 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패와 죽음의 개고인 이곳은 뽀얀 먼지가 그 근처를 뒤덮고 있고 온갖 악취가 코를 찌른다. 에클버그라는 한 안과 의사가 세워놓은 광고탑은 전통적인 신(神)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들은 전통적인 종교를 밀어내고 바로 그자리에 자본주의와 상업주의라는 새로운 신을 세워놓았다. 한때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그 '미국의 꿈'은 이제 과육을 빼낸 오렌지나 레몬처럼 껍질만 남은 채 재의 골짜기처럼 악취를 풍기고 있으며 안과 의사의 광고탑처럼 상있주의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중략) 개츠비는 '미국의 꿈'이라는 결코 뜨지 않는 달을 기다리다가 좌절을 겪었고, 삶의 연극에서 미처 2막이 시작되기도 전에 종말을 맞이하였다. 마찬가지로 청교도들이나 초기 국부(國父)들이 꿈꾸던 희망은 21세기를 맞이한 지금까지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피츠제럴드는 이 작품의 제목을 두고 무척이나 고심하였다. (중략) 작가가 이 소설을 어떤 식으로든지 미국과 관련시키려고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주제뿐만 아니라 그 형식과 기법에서도 눈길을 끈다. 방금 앞에서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피츠제럴드는 이 작품에서 상징과 이미지를 즐겨 사용한다. (중략) 세계 소설사를 샅샅이 뒤져보아도 이 작품처럼 서정적인 작품을 찾아보기는 그리 쉽지 않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놓치고 말았지만 원문을 읽다 보면 마치 산문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더구나 피츠제럴드는 서술 시점이나 관점에서도 실험을 꾀한다. 일인칭 서술 화법을 구상하면서도 전통적인 화법과는 조금 다르게 사용한다. (중략) 콘래드의 일인칭 화법에서 사건이 주로 서술자의 입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전달된다면, 피츠제럴들의 일인칭 화법에서 사건은 주로 글을 통하여 독자에게 전달된다. 다시 말해서 청각적 특성이 강한 전자의 작품이 '듣는' 소설이라면, 시각적 특성이 강한 후자는 '읽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첫머리에 나오는 "이 책에 이름을 제공한 사람인 개츠비"라는 구절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위대한 개츠비』는 닉이 지금 집필하고 있는 책에 해당하는 셈이고,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동시에 닉이 쓴 책을 읽고 있는 셈이다.
  또한 닉 캐러웨이는 서술자이면서도 동시에 작중 인물의 역할을 맡는다. 한편으로는 방관자나 목격자처럼 개츠비와 관련한 사건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작중 인물로서 사건을 직접 개입하기도 한다. 작가의 말대로 닉은 '이야기의 안과 밖'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스토리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중략) 실제로 이 소설을 닉의 정신적 성장 과정을 다룬 일종의 교양 소설(Bildungsroman)로 읽으려는 비평가들도 적지 않다. (이하 생략)
 
Posted by Hyos :